- ‘비범함과 예술적 재능을 가진 소녀’
- 신정아가 기자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절절한 사연
- “학위·논문 조력자들, 알고 보니 학위조작 브로커”
- 1·2심 재판부 ‘신정아-변양균 게이트’ 모두 무죄 선고
- 검찰 확인, 신씨 최종학력…‘고졸’ 아니라 캔자스대 중퇴
- “누드사진은 합성사진, 한 사진가의 합성작품이 흘러나간 것”
고교 시절, 고향인 경북 청송을 떠나 대구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친구는 “이왕 하숙할 거 너희 집에서 하고 싶다”며 짐을 싸 들어왔다. “어머니 된장찌개 맛을 잊지 못해서”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생활고를 겪던 친구의 집안에 조금이나마 보탬을 주려 했던 것이었다. 좁은 방에서의 3년, 시래깃국에 된장찌개만 먹던 생활이 힘겹기도 했을 터. 하지만 친구는 불평 한마디 없었다.
친구의 집안은 경북 청송에서 택시회사와 주유소 3개를 운영할 정도로 부자였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많아 청송 진보에 들어오려면 그 집안 땅을 밟지 않고선 불가능하단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경기고와 연세대를 졸업한 인물로 국회의원에 출마한 경력도 있었다. 아버지는 지병인 폐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40대 중반 나이에 고등학생인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등졌다. 이후 모든 살림은 어머니가 꾸려 나가야 했다.
고교 졸업 후 그의 어머니는 서울 서초동에 아파트를 마련했다. 맏아들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다 둘째아들인 기자의 친구조차 대입 재수를 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참에 친구의 여동생까지 서울로 전학을 왔다. 어머니는 청송 집과 서울 집을 오가는 생활을 했기에 갓 청송에서 올라온 막내딸의 공부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기자가 그녀의 가정교사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들 같은, 자식의 친구인데다 소위 명문대를 다니고 있었고, 이미 가정교사 경험도 있던 터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소녀 신정아
한국 나이로 15세, 그 꼬마 아가씨의 이름은 지난해 논문표절과 학력조작 파동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였다. 소녀 신정아는 부유한 집에서 자라 그런지, 경북의 골짜기 벽촌에서 거대도시, 그것도 최고 부유층이 사는 서울 강남지역 학교로 전학을 왔지만 구김살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15세 소녀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조리 있고 똑 부러지는 말투에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그야말로 가르칠 맛이 나는 학생이었다. “너하곤 질적으로 다르다”고 친구에게 농담을 건네면, “너에게 우리 집 기대주를 맡겨놓은 게 불안하다”는 말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막내딸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다. 숫제 “올인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그에게 정성을 다했다.
꼬마 아가씨는 공부만 잘한 게 아니었다. 책을 사다주면 며칠 안 돼서 다 읽어치운 후 이것저것 물어볼 정도로 감수성이 뛰어났다. 중학생이 소화하기에 벅찬 책들도 이해가 빨랐다. 악기도 잘 다뤘고, 특히 그림은 수준급이었다. 연습장에 끼적인 그림들조차 선의 터치가 예사롭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까지 그림을 공부했던 기자의 눈에도 그녀의 그림 실력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미술에 대해 일찌감치 비범함을 드러냈지만 친구의 어머니는 딸의 재능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사춘기를 막 지나고 있던 소녀는 마음만큼 얼굴도 예뻤다. 함께 길을 걸으면 사람들이 모두 뒤돌아볼 정도. 사실 그녀의 미모는 대물림된 것이다. 친구의 어머니는 주변에서 보기 드문 빼어난 미인이었다. 부끄럼 많은 10대 소녀, 하지만 그녀의 성격은 화통했다. 네 살 위인 친구 오빠이자 과외 선생님에게도 말을 놓고 지낼 정도였으니…. 오빠들과 달리, 속에 있는 말을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화가 나면 반드시 상대방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게 했다. 하고 싶은 일은 어떤 수를 쓰든 반드시 해내는 당찬 구석이 있었다. 기억에 그녀가 숙제를 해오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자의 가정교사 생활은 그 뜨겁던 1987년, 찬바람이 불기 전에 끝났다. 어머니는 계속 가르치길 원했지만 이미 소녀는 내가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어 있었다. 매일 데모하러 다니느라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도 미안했다. 이후 그녀의 소식은 오빠인 친구를 통해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5년 후 1992년 기자가 신문사에 들어가던 그해, 그녀는 미국의 예술계 명문인 캔자스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기자는 ‘얘가 결국 자기 적성을 찾아갔구나’라고 생각했다. 이후 그녀를 다시 본 건 휴가 때 친구를 찾아 안동에 갔을 때였다. 대학생이 된 그녀는 의젓한 숙녀로 변해 있었다. 말괄량이의 모습은 간데없고 차분하고 부끄럼 많은 여인이 되어 있었다.
‘팜파탈’로 전락한 소녀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녀의 이야기를 다시 들은 것은 친구의 다급한 전화 때문이었다. 1995년 6월 여름더위가 막 시작되던 때였다.
“동생이 무너진 삼풍백화점 안에 갇혔다 겨우 구조됐어. 초밥 사 먹으러 갔다가 큰 변을 당할 뻔했다. 야, 이거 우리 집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액땜했다고 생각해야지. 지금 애가 완전히 넋이 나갔다.”
기자는 삼풍백화점 부상자 명단에서 바로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어떤 신문에는 짤막하게 구조된 사연도 소개돼 있었다. 건물이 무너질 때 계단 밑에 있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암흑과 먼지더미 속에서 터진 상수도에서 새어나오는 물을 받아먹으며 구조를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기자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 대면한 것은 신문지면에서였다. 어느덧 이름만 대면 아는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돼 각종 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었다. 친구는 전화할 때마다 동생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근무처도 가깝고 하니 서로 보고 지내라”는 오빠의 채근에 그녀로부터 한번 전화는 왔지만 만남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가정교사로 만난 지 꼭 20년 되던 해인 2007년 7월, 그녀의 이름 석 자는 한동안 모든 신문과 방송의 톱을 장식했다. 처음에 기자는 눈을 의심했다. 동명이인이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신정아 동국대 교수, 예일대 박사학위 논문표절 논란’으로 시작된 언론의 보도는 브레이크 없는 전차처럼 달려 나갔고, 눈덩이처럼 커졌다. ‘예일대 박사, 캔자스대 경영학 석사(MBA) 학위도 가짜’, 심지어 ‘캔자스대 졸업은 물론, 입학 사실도 없어’라는 기사가 쏟아졌다. 언론은 ‘고졸자가 어떻게 교수가 되고 국내 최고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학예실장이 되는가’라며 신씨를 숫제 ‘인간 말종’으로 취급했다.
2007년 7월 당시 신정아 관련 언론 보도. 성로비, 게이트란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썼다.
심지어 일부 언론에는 사건의 본질과 전혀 관계없는 신씨의 사생활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가 확인을 거치지 않은 채 줄지었다. 신씨의 오피스텔에서 콘돔과 남성 팬티가 발견됐다는 ‘저질 보도’가 횡행하는가 하면, 문화일보는 급기야 신씨의 누드 사진을 큼지막하게 게재한 후 신씨가 노 화가들에게 성(性) 로비를 했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당시 문화일보는 그 보도로 인해 홈페이지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대부분의 언론은 신씨를 미술계의 ‘팜파탈’로 묘사하며 신씨의 성을 상품화해 학위조작과 연결시켰다.
언론에 비친 신씨의 36년 인생은 모두 거짓으로 일관됐다. 삼풍백화점 사고 이야기도 그녀가 지어낸 거짓말로 취급됐다. 그녀와 가족의 삶은 깡그리 발가벗겨졌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건가’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언론계 동료들은 그런 풍토에 대해 전혀 죄의식이 없었다. 정작 언론이 밝혀낸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보도는 대부분 엉터리였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소문, 그녀의 초중학교 시절 이야기, 영재고등학교 졸업, 금호미술관 입사와 활동에 관련된 보도는 기자가 직접 지켜보고 알고 있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언론의 집단 이지메
신씨의 학력조작 여파는 연예계, 종교계, 학계로 일파만파 번졌다. 신씨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영향력이 큰 명망가, 유명인의 학력조작 고해성사가 잇달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언론은 거기엔 별 관심이 없었다. 신씨에 대해선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지면과 전파를 배정했던 언론은 그들에겐 상대적으로 관용을 베풀었다. 스스로 시인을 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거기엔 ‘연애사’나 ‘선정적 이야깃거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신씨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감옥에 갇힌 대신 그들은 자신이 있던 그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지금도 버젓이 일하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학원들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강사들의 학위증을 강의실에 걸어두고 학생들을 유인한다. 일부 언론에서 ‘마녀사냥’식 보도에 대한 자성이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이내 묻혀버렸다.
미국에 나가 있던 신씨가 모든 것을 체념하고 국내에 들어와 변씨와 함께 구속된 지난해 10월 중순 이후 신씨 사건은 거의 잊힌 일이 돼버렸다. 언론은 특유의 냄비근성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신씨는 해외에 있던 지난해 8월 모 주간지에 자신의 입장을 밝힌 바 있으나 그마저 신씨가 인터뷰를 했다는 그 자체만 부각됐을 뿐, 실제 그녀와 그녀 가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언론은 없었다. 그녀에겐 반론권조차 인정되지 않은 셈이다. 입을 꽉 닫아버린 그녀와 가족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확인된’ 허위학력 사실을 바탕으로 ‘확인되지 않은’ 권력형 비리나 사생활을 마구 보도한 언론의 태도는 더 큰 문제였다.
‘권력형 비리’ 모두 무죄 선고
사건이 터진 지 꼭 1년이 흐른 지난 7월, 신씨, 변씨 등에 대한 고등법원 선고 공판이 열렸다. 그녀에겐 1년6개월의 실형이, 변씨에겐 징역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1심과 거의 변함없는 판결이었다. 법원은 학력조작과 관련한 사문서 위조, 행사, 업무방해 사실을 대부분 인정했고(사문서 위조 행사 부분 일부 제외) 성곡미술관과 관련된 횡령 혐의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변씨에 대해선 2개 사찰에 대해 특별교부세의 불법 집행에 대해서만 죄가 인정됐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인격을 송두리째 뒤흔든 ‘권력형 비리’ 혐의에 대해선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학력조작 또는 횡령과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고 언론에서 그의 사생활인 연애사와 관련해 대서특필했던 내용 중 대부분이 수사과정, 재판과정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셈이다. 하지만 언론은 사후 보도에 인색했다. 선고된 형량과 인정된 혐의만 짤막하게 보도했을 뿐, 무엇이 무죄로 판명됐는지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검찰의 수사과정, 재판과정에서 언론이 그동안 대서특필한 내용과 달리 새롭게 밝혀진 사실을 정리하면, 우선 신씨는 언론 보도처럼 최종학력이 고졸자가 아님이 드러났다. 검찰은 미국 수사기관과의 공조를 통해 신씨가 1992년 1월15일부터 1996년 12월30일까지 비록 졸업은 못했지만 미국 캔자스대학교 미술학과에 재학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3심 재판이 끝나봐야 알겠지만 신씨의 학력조작 혐의가 모두 사실로 확정되더라도 그녀의 최종학력은 고졸이 아니라 대학교 중퇴(3학년 수료)가 되는 셈이다. 그녀는 왜 5년 동안 다닌 학교를 그만뒀을까?
지난해 10월 중순 인천국제공항에서 검찰에 체포된 신정아씨.
사실 이 모든 혐의 하나 하나가 지난해 7~8월 이를 보도한 기자들에게 ‘특종’을 안긴(그중에는 상을 받은 기자도 있다) 주제였지만, 해당 언론들은 지금껏 그에 대해 일절 말이 없다. 특히 당시 “청와대와 기업의 커넥션이 있다. 이 중간에 신씨가 있다”며 대서특필된 10대 그룹에 대한 광고비 전시회 협찬금 수수 부분에 대해 법원은 오히려 “변씨와 신씨가 메세나 활동의 일환으로 각 기업에 미술관 전시회 협찬을 요청한 행위를 실질적·구체적으로 위법, 부당한 행위라거나, 이에 응하여 (기업들이) 협찬한 행위를 법률상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이라고 보기 쉽지 않다”고 판시했다.
당시 언론은 이들 혐의를 모두 신씨와 변씨의 부적절한 연애의 결과로 보도했다. 사실 지금에야 말할 수 있지만 이렇듯 많은 협찬이 붙는 전시회를 두고, 이름 있는 화가, 조각가, 사진가들이 서로 전시회를 하게 해달라고 접근한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성급한 언론은 이를 신씨의 ‘팜파탈적 유인의 결과’라거나 심지어 ‘성 로비의 결과’라고 보도했다. 결국 이로써 노무현 정부 최대의 권력형 비리 스캔들은 해프닝으로 끝난 셈이다.
그렇다면 신씨는 현재 2심까지의 법원 판결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억울하거나 불만은 없을까. 그녀의 2심 변호사는 “그녀가 학력조작과 횡령에 대한 법원 판결을 상당히 억울해 하고 있다. 즉시 상고해 현재 3심이 진행 중인 상황이다”라고 밝혔다. 기자는 최근 한 달 동안 신씨를 만나기 위해 일반면회와 특별면회를 신청하고 전자메일을 보냈으나 교도소 측은 “신씨는 변호사와 오빠를 제외하곤 면회와 메일 수령 등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교도소로 편지를 보내봤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는 “정아가 2심 판결 후 크게 실망해 아무런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다. 몸도 안 좋다. 생각한 것보다 형량이 너무 무겁게 나와서 그런 것 같다”고 전했다.
“나도 속았다”
기자는 지난해 7월5일 신씨의 논문조작과 가짜학위 논란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던 시점으로부터 최근까지 친구인 신씨의 오빠와 수시로 전화통화를 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들어왔다.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신씨는 “캔자스대학 졸업과 경영학 석사학위, 예일대 입학과 졸업, 박사학위 취득, 논문 작성과 관련 린다, 제임스, 트레이시라는 미국 내 지인들이 모든 것을 대행했고, 그래서 자신은 이 모든 과정을 실제라고 믿었으며 각 대학 시간강사와 동국대 교수직 임용, 광주비엔날레 감독직 선임, 금호·성곡 미술관 큐레이터 입사 당시 제출한 이력서와 졸업증명서, 입학허가서, 학위기는 그들이 보내온 것을 복사한 것이거나 원본이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하면, 신씨 자신은 학위 브로커들에게 속은 사실을 뒤늦게 알았으며, 속은 줄 모르고 각 대학과 기관에 이력서를 냈으므로, 또 직접 각종 서류를 위조하지 않았으므로 사문서 위조, 동행사, 업무방해 혐의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신씨는 재판과정에서 “그들이 브로커인 줄 몰랐고, 실제 나는 수업도 들어갔으며 각 학교에 가서 공부도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대리출석과 대리시험을 시키고 이들 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게 잘못이다. 박사학위 논문도 린다에게 내가 말한 것과 적어준 것, 토론을 통해 나온 것을 정리하라고 시켰는데 결과물은 베낀 논문이 나왔다. 이 부분에 대해선 정말 죄송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은 “신씨가 당초에 자신이 예일대 박사가 확실하다고 했다가 막상 구속돼 각종 증거가 나오니까 말을 바꾸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만약 신씨가 처음부터 허위학력과 논문표절과 관련해 모든 것을 시인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언론의 반응은 어땠을까. 과연 그녀에게도 다른 학력조작 명망가들처럼 면죄부를 줬을까? 어쨌든 1·2심 재판부는 “린다, 제임스, 트레이시라는 사람들이 실존하는지도 의심스럽고, 신씨의 증언이 심문과정마다 바뀌는데다 신씨의 집 컴퓨터 하드웨어에서 예일대 로고와 대학원 교수의 서명 등 학위기나 졸업증명서 위조에 사용될 수 있는 그림 파일이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신씨가 문서를 위조하고 이를 행사했으며 이를 통해 각 대학과 기관의 업무를 방해한 점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신정아의 편지
이쯤 되면 신씨의 캔자스대학 3학년 이후의 학력은 사실이 아닌 게 확실해 보인다. 예일대 측은 신씨가 박사학위 과정에 입학한 사실조차 없음을 후일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학력을 속이기 위해 문서를 직접 조작하고 또 학력이 허위임을 알면서도 각 대학과 기관에 허위 이력서를 냈는가 하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이와 관련, 기자는 지난 해 7월17일과 7월18일 신씨로부터 두 통의 e메일을 받았다. 당시는 박사학위 논문 표절과 학위조작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시점으로, 신씨는 언론 노출을 피해 국내를 전전하다 7월16일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물론 기자는 친구인 오빠를 통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전해 듣고 있을 때였다.
“논문표절을 고졸 학력으로 (결론) 내린 언론에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7월17일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내린 신씨는 기자들과 뜻하지 않은 몸싸움을 벌인 후 짧은 한마디를 남겼는데, 언론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상한 말”이라며 그녀의 성격적 결함을 탓했다. 하지만 이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것은 오히려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신씨는 공항을 빠져나와 호텔에 짐을 푼 후 기자에게 바로 e메일을 띄웠다. 미국에서 변호사를 구해 자신의 박사학위가 거짓이라고 발표한 예일대를 상대로 소송을 하는 한편, 사라져버린 지인, 즉 학위 브로커들을 꼭 찾아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내용이었다. 또 자신의 억울함과 10여 년간 큐레이터에서 교수가 되기까지의 회한이 절절하게 녹아 있었다. 사건과 관련된 특정인의 이름만 지운 채 두 통의 메일 내용을 그대로 공개한다. 이 메일의 내용은 신씨의 개인 생각일 따름이며 사실관계가 실제와 다를 수 있음을 밝혀둔다.
지난해 7월17일 뉴욕 존 F케네디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신정아씨.
영철 오빠.
아주 오랜만에 이름을 불러보네요. 가끔 작은오빠를 통해 소식은 들었어요. 공항에서 악마처럼 달려드는 기자들 속을 겨우 헤치고 나와 호텔에 여장을 풀었어요. 여기도 어찌될지 몰라 곧 거처할 곳을 새로 마련할 거예요.
세상에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네요. 학교 내 싸움이 이렇게 번져 제가 이 세상에 가장 파렴치한 인간이 되어 있으니까요. 13시간 내내 모자를 꾸욱 눌러쓴 채 얼굴도 못 들고 있다 한바탕 소란을 치르고 나니 정신이 좀 들어요. 너무 바닥으로 떨어져 이제는 더 떨어질 바닥도 없고, 최대한 큰 소리 안 내고 처리하려고 했던 마음도 모두 접고, 저도 이제 전쟁터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 현실에서 독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지난 10년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에서 저는 죽을힘을 다했습니다. 아무런 보잘것없는 사람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저를 보고 정치적이다 뭐다 그런 이야기들을 했지만, 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제가 당당하면 되니까요.
한 개인으로 미국의 명문대를 상대로 싸움을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잃어버린 지난 2년이 제 인생을 이리도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렸기에, 꼭 찾을 겁니다. 우선 며칠간은 변호사 선임에 힘을 쏟을 예정입니다. 제 일에 가장 열정적인 사람을 찾아 전쟁을 시작할 겁니다.
삼풍에서 두 번 살아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다시 설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좋아요. 그것과는 상관없이 제 명예와 그리고 저를 위해 그간 애써주신 분들을 위해 꼭 해낼 겁니다. 뉴욕에서의 힘든 첫날 마음을 다시 다져봅니다.
신정아 드림
‘7월18일 편지’
영철 오빠,
싸워야 할 곳이 한 군데 더 생긴 모양이네요. 저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XX라는 사람은 충분히 어떤 식으로든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언론이 지적한 것 중 하나 맞는 건 학교 재단 싸움에 저는 이유 없이 걸려든 거예요. 성곡(미술관)에 수도 없이 전화해 빨리 저를 파멸시키라고 했답니다.
언론에 제보하기까지 만든 내용들은 서울대 교수들 중 저를 아주 싫어하는 세 사람과 우리 학교 XXX라는 사람과 그리고 일부 언론사들이 넉 달 동안 준비한 내용들이니 저는 몰라요. 저는 그야말로 제 논문에 문제가 있는 것도 6월6일날 XXX가 학교에 제보하면서 알았으니까요. 학교에서 저에게 특혜를 줬다는 것도 모두 거짓말이에요.
제가 졸업할 무렵 서울대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맨 처음 저에게 제의를 해 온 곳이 바로 서울대니까요. 나중에 XXX 총장께서 동국대에 서울대에서 데려갈 사람을 데려갔다며 나중에 언젠가는 서울대에서 데려갈 거라고 해서 동국대에서 저에 대한 신임도 많았었습니다. 지금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요. 저는 학교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만약 조금이라도 제 논문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으면 사람들한테 당당하게 돌리지도 않았을 거고, 지도교수 이름을 자신 있게 말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분명한 건 지난 2년 사이 제 모든 것이 없어진 겁니다. 오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미칠 것만 같아요. 나 하나 없어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를 위해 그간 애써준 모든 사람을 위해 나만 살자고 할 수는 없어요. 아무리 세상이 그렇다 하더라도.
사실, 미국에 들어와 모두 잊고 새 출발해도 되요.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기에 힘든 길을 선택합니다. 가만히 앉아 뉴욕 출장길에 당한 이 모든 일을 제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출장 전에 본 영화 중 ‘더블 타겟’이라는 영화 생각이 요즘은 자주 나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일단은 미국 변호사 선임해서 예일대와 일을 시작해야 하니까요. 캔자스는 제가 졸업 후 서울에 돌아올 때 추천서까지 써준 것들 모두 가지고 있으니 오히려 쉬울 겁니다.
뉴욕에서도 하이에나처럼 나를 찾고 다니나 봅니다. 정말 무서운 악마들이에요. 나는 오빠를 친오빠라 생각하고 이야기해요. 그러니 내가 모든 것을 준비해서 갈 때까지 나를 믿어주세요. 오늘은 비가 아주 많이 내려요. 집 구하러 나가려고 했더니 걱정이에요.
무위로 끝난 학위 입증 노력
두 통의 메일 내용을 살펴보면 그녀가 지난해 7~8월 미국에 있을 당시까지 자신이 예일대 박사학위를 받은 것에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예일대와 캔자스대가 자신에 대한 기록을 실수 또는 고의로 누락시킨 것으로 확신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미국의 로펌을 동원해 지인을 찾고, 대학들과 소송을 벌일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더욱이 “캔자스대는 자신에게 예일대 박사과정에 입학할 수 있는 추천서까지 써줬고 그것을 모두 가지고 있다”며 자신의 결백에 대해 강한 자신감마저 보인다. 언론은 당시 신씨가 언론의 눈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간 것처럼 보도했지만 신씨 남매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신씨의 오빠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정아가 지금 미국에서 학위를 따도록 도와준 사람을 찾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도 찾고 예일대와 소송도 벌여야 해서 급히 미국으로 떠났다. 직접 로펌과 변호사를 구할 모양이더라. 이런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또 그것 가지고 말이 많을 테고 해서 모든 걸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거지. 논문표절도 최근에야 안 모양이더라. 미국에 있을 때 누구에게 부탁을 해서 같이 만든 모양인데, 정아는 그 사람이 다른 이의 논문을 베낀 사실을 언론보도를 보고서야 알았단다. 그렇다면 그것도 정아가 돈을 써서 조작했다는 이야기인가. 심지어 수강료를 낸 계산서와 도서관 출입증도 있다던데….”
지난해 7월17일 뉴욕 존 F케네디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신정아씨.
결국 신씨는 지난해 7월 중순 기자에게 메일을 보낸 이후 3개월 동안 미국 변호사들과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줄 지인들을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실패하고, 그 지인들이 결과적으로 학력위조 브로커였으며 자신이 실제 캔자스대 3년 중퇴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걸 깨닫는 순간, 그녀는 한국행을 선택했고 바로 구속됐다. 물론 검찰에 자진 출두할 땐 자신이 브로커에게 속았음을 증명하면 죄는 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겠지만 사건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일파만파로 커졌다.
가족이 무슨 죄가 있나
신씨는 기자에게 보낸 e메일에서 알 수 있듯, 논문표절, 학력조작 사태가 동국대 내부와 미술학계, 전시계 내부의 갈등이 빚어낸 일이며 자신은 그 희생양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일부 언론이 개입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그녀는 메일에서 언론을 ‘하이에나’ ‘악마’라고 몇 번씩 표현했다. 미국 뉴욕공항에서 기자들을 향해 던진 한마디도 언론에 대한 극한 분노에서 표출된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신씨뿐만 아니라 신씨 가족의 언론에 대한 거부감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 특히 가족사에 대한 근거 없는 보도와 신씨에 대한 프라이버시가 권력형 비리로까지 확대되면서 그들은 언론에 대해 완전히 입을 닫았다.
“난 정말 우리 정아가 이토록 유명한 사람인 줄 몰랐다. 나이 서른여섯의 교수가, 갓 언론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큐레이터가 이토록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연일 가십의 소재가 되는 걸 이해하지 못하겠다. 왜 이러는가. 정권에 대한 분노가 이리로 모두 전가된 것인가. 안 그러면 우리 언론들이 모두 옐로 페이퍼가 된 건가.”
2007년 10월 조계종은 모 일간지가 신씨와 불교계를 무리하게 연관시킨다며 구독 거부 운동을 벌였다.
그는 언론에 “내 어머니는 지금 거의 이성이 마비된 상태다. 지금 어머니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자신도 믿을 수 없다”고 밝혔지만, 일부 언론은 그런 그의 어머니에게 한두 마디를 주워듣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신씨 집의 역사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기자가 보기에 어처구니없는 보도들이 줄을 이었다. 예를 들면 “신씨 어머니는 무당이었다” “영부인과 친분이 있고 자주 만나는 사이다” 등등. 분명한 사실은 지금도 술집에서 회자되는 신씨 어머니와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이러저러한 소문은 그 어떤 내용도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신씨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신씨가 아니라 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씨의 오빠는 “변양균씨와 정아가 친하게 지낸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들의 관계는 절친한 지인 사이였지 절대 연인관계가 아니다. 변씨가 미술에도 조예가 깊고 불교에 대해서도 잘 알아서 평소 친하게 지낸 걸로 알고 있다”고 했다.
“신정아 누드는 합성사진이다”
신씨 측은 문화일보에 실린 신씨의 누드사진과 관련해서도 할 말이 많다. 이미 문화일보는 성 상납 기사에 대해서 공식사과를 했지만, 누드사진의 게재와 그 진위 여부를 두고선 신씨 측과 법적 쟁송을 벌이고 있다. 지금도 그 사진을 두고 온갖 추한 소문이 입 도마에 올라 확산되고 있다. 문화일보 측은 사진의 출처에 대해선 함구하며 “필름 상태로 받아서 합성사진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주장. 하지만 신씨 측의 주장은 전혀 다르다.
“그 사진은 합성사진이다. 얼굴은 정아 것이 맞지만 몸통은 다른 사람의 것이다. 정아의 이야기로는 얼굴 사진은 합성사진 작가인 황모씨가 찍은 것인데 그 사람은 정아가 처음으로 전시회를 기획해준 사람이다. 언젠가 정아가 그의 전시회를 알리는 모임에 나갔을 때 그가 갑자기 얼굴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황씨가 서울 I 갤러리에서 무슨 사진전을 한다며 정아의 얼굴에다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의 벗은 몸통 사진을 가져다 붙여 여러 장의 합성사진을 만들고 그걸 전시하려고 했다. 다행히 정아가 그걸 미리 발견해 즉시 중지시킨 적이 있다. 그때 황씨가 합성사진들을 어딘가로 다 치웠는데 그중 하나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신문사에 흘러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기자는 이런 신씨 측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I 갤러리를 찾아갔다. I 갤러리의 큐레이터 실장은 “2004년 3월쯤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황씨가 신씨 얼굴을 소재로 만든 합성사진 작품들을 전시회장에 가져와 이리저리 배치하고 있었는데 마침 신씨가 이를 보고 명예훼손이라며 당장 치우라고 버럭버럭 화를 냈다. 그래서 황씨가 후배들과 그 합성사진들을 어딘가에 치웠다. 흑인과 백인 몸통을 붙인 작품은 생각이 나는데 황인종 몸통이 붙은 사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얼굴 사진은 문화일보에 난 사진과 거의 비슷했다”고 증언했다.
신정아를 위한 변명
황씨를 잘 아는 한 사진작가는 “황씨가 미국에서 들어온 뒤 신씨가 국내 처음으로 황씨 합성사진전을 개최해줬는데 그게 대박이 난 후 신씨를 극진히 모신 것으로 들었다. 아마 그런 일이 있었다면 신씨를 위해 그런 걸 거다. 그 사람에겐 그것도 작품이다”라고 했다. 기자는 미국 교포인 황씨를 찾아 인터뷰를 하려 했지만 취재 자체가 불가능했다. 황씨가 10여 년 전에 저지른 탈세사건으로 지난해 초 FBI(미연방수사국)에 검거된 후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가 신정아의 가정교사이자 그 오빠의 절친한 친구임이 알려지자 지인들은 농담처럼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때 좀 제대로 가르치지. 그랬으면 이렇게 거짓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신씨에 대해서 기자가 이런저런 해명을 하면 대부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완전히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 잡으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 동료 기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기자는 신씨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일련의 과정을 지나오면서 ‘여론몰이’의 무서움을 절감했다. 그리고 ‘기자’라는 직업의 한계도 뼈저리게 경험했다.
신씨가 학위를 직접 조작했는지 아니면 브로커에게 속았는지 여부는 3심에서 명확하게 답이 나올 것이다. 또한 전시회 비용을 횡령했는지에 대해서도 시비가 분명하게 가려져야 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신씨 사건에서 우리 언론은 철저히 ‘죄보다 사람을 더 미워했다’는 게 기자의 판단이다. 기자의 ‘신정아를 위한 변명’은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