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호

책으로 나를 담금질하다

  • 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입력2008-10-02 14:4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책으로 나를 담금질하다

    ‘실크로드의 마지막 카라반’ : 아리프 아쉬츠 지음, 김문호 옮김, 일빛, 352쪽, 1만5000원. ‘레드 로드’ : 손호철 지음, 이매진, 424쪽, 1만7000원

    지난 여름 12명의 대원이 중국의 북서쪽 끝자락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13일간 장정을 했다. 직장인으로서는 눈치가 보이는 긴 휴가지만 중국의 1/6, 남한의 17배에 달한다는 이 드넓은 지역을 답사했다고 말하기에는 염치없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어쨌든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우루무치(신장위구르의 주도)에 갔다고 하면 단박에 “실크로드?”라는 반응이 나온다. 이때부터 잠시 세계지리 수업이 시작된다.

    중국 전체를 닭 모양으로 보면 신장위구르자치구는 닭 꼬리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3개의 산맥이 관통한다. 북으로 알타이산맥이 러시아·몽골과 국경을 이루고, 남으로는 쿤룬(곤륜)산맥이 티베트 자치구와 경계를 이룬다. 신장위구르를 남북으로 가르는 것은 톈산(천산)산맥이다. 톈산산맥 북쪽에 준가르 분지가 있고 이 지역을 동서로 잇는 길이 톈산북로(天山北路)다. 반면, 톈산산맥 남쪽에는 타림 분지와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으며 동쪽의 시안, 란저우, 하미, 투르판, 타슈켄트, 카슈가르, 사마르칸트 등 오아시스 도시를 잇는 길이 톈산남로다. 이 길에 석굴로 유명한 둔황이 있다. 많은 관광객이 찾는 코스가 바로 톈산남로의 실크로드다. 원래 실크로드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서역북로(톈산남로)와 서역남로를 가리켰으나 서역남로의 이용도가 떨어지면서 서역북로가 실크로드를 대표하게 됐다고 한다.

    톈산북로와 톈산남로의 차이

    산맥 이름이 나오고 북로, 남로 왔다갔다 하면 벌써 머리가 아파온다. 우리는 한때 대륙을 경영하던 조선의 후예지만 대륙 끝자락 반도의 땅에 머문 지 오래, 그나마 남북으로 갈라진 땅에서 우리의 시야는 바늘구멍만해졌다. 당장 내 집 앞의 산 이름도 모르는 판에 남의 나라 북서쪽 끝 어딘가에 있는 산맥이 무슨 상관이람. 얼마 전까지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알타이, 내몽골 알타이, 몽골 알타이, 이런 식으로 매년 알타이 문명의 근원을 찾아 떠돌면서 “길은 어딘가로 통하고 사람과 사람은 이어진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오늘처럼 비행기로 단숨에 달려가진 못해도 옛 사람들은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가다가 막히면 돌아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며 끊임없이 왕래를 했다.

    올해 답사는 우루무치에서 시작해 톈산북로를 거쳐 알타이산맥 아래쪽을 빙 돌아 다시 우루무치로 오는 코스였다. 지금은 인적이 끊긴 곳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바위그림과 돌사람(선인상), 사슴돌, 돌무덤 등이 우리가 찾고 있는 알타이 문명의 흔적이었다. 후투비 바위그림 아래서 우리는 그들의 주술적인 춤 동작을 흉내 내며 잠시 시간 여행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벅찬 감격은 휘발성이 강하다. 힘겨운 장정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다. 답사를 마친 지 두 달이 되었건만 아직 사진과 일정 정리도 하지 못했다. 아마 내년 답사 코스가 확정될 때까지 한없이 게으름을 피울 것이다. 그런 내게 채찍질을 한 책이 ‘실크로드의 마지막 카라반’(아리프 아쉬츠 지음, 일빛)과 ‘레드 로드’(손호철 지음, 이매진)였다.

    낙타를 타고 실크로드를 가다

    ‘실크로드의 마지막 카라반’은 터키의 사진작가 아리프 아쉬츠가 중국 시안에서 터키 이스탄불까지 2년에 걸쳐 낙타를 타고 옛 실크로드 1만2000km를 종주하며 기록한 책이다. 바로 톈산북로 코스다. 이 길을 아쉬츠 일행은 자동차 대신 고대인들처럼 낙타를 타고 건넜다. 아쉬츠는 사진작가답게 현지인들의 다양한 표정, 사막과 낙타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책 속에 담아놓았다. 만만치 않은 여정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마지막 카라반’은 이미 10년 전에 출간됐다. 그 사이 그들이 거쳐온 나라(중국,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들의 사정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특히 중국은 어디를 가도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신장위구르 지역만 해도 엄청난 광물과 석유 자원 덕분에 지금은 광활한 땅 구석구석까지 도로가 뻗어 있다. 더 이상 말과 낙타의 나라가 아닌 것이다. 그러한 시간 지체 현상을 감안한다면, 이 책은 옛 실크로드를 두 발로 걸어서(물론 낙타를 타고) 답사한 기록으로 후대에 그 길을 다시 가는 사람들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앞으로 이 이상의 기록이 나올 수 있을까.

    왜 그는 빨간 길을 택했을까

    ‘실크로드의 마지막 카라반’에 비하면 손호철 교수의 ‘레드 로드’는 여행을 마치자마자 출간된 정말 따끈따끈한 책이다. 저자는 1934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중국 장시성의 난창에서 산시성의 시안까지 368일 동안, 노동자와 농민 8만5000명을 이끌고 1만여 km를 걸었던 대장정 코스를 따라갔다.

    이 책은 여행서로서 세 가지 장점을 갖췄다. 첫째, 흔히 여행서들이 건너뛰기 쉬운 여행의 준비과정이 충실하게 소개돼 있다. 저자는 2004년 여름 한 달 일정의 남미여행 도중 중국의 힘을 깨닫고 21세기를 이해하기 위해 중국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해 가을 무렵 중국 시안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중국공산당과 홍군이 장정을 마무리한 옌안에서 옛 혁명 유적지를 돌아본 뒤 여행 목적과 코스를 정한다. 일단 결심을 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중국의 장정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정보를 모으는 것이었다. 이듬해 가을 안식년이 시작되자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6개월간 집중적으로 중국어 공부를 한 다음 자세한 중국지도를 구입해 장정 코스를 하나하나 점검해간다. 경비와 차량, 통역, 운전사 보조 겸 보디가드 1명 등을 확보했다. 중국 정부로부터 어렵게 취재 허락과 비자를 받았다. 2007년 3월 중순에 시작해 5월 중순에 끝나는 65일의 일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둘째, 단순히 이 코스를 둘러보고 다음 코스로 달려가는 나열식 관광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는 역사문화기행의 진수를 보여준다. 오늘의 중국을 탄생시킨 역사의 현장에서 장정에서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 현대사를 이해하고 ‘21세기 중국’의 미래를 가늠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에드거 스노우가 ‘중국의 붉은 별’에서 “장정과 비교하면 한니발의 원정은 주말 피크닉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만큼 장정은 엄청난 스케일의 도전이었다. 홍군은 하루 평균 40km씩 걸으며 수없이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출발시 8만5000명이었던 홍군이 도착했을 때 8000명으로 줄어 있을 만큼 큰 희생을 치렀지만 대신 그들은 중국 전역에 공산주의의 씨를 뿌리는 데 성공했다.

    저자는 독자에게 이런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이 여행을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시작했다. 특히 상하이는 중국공산당의 메카이자 오늘날 중국 자본주의의 상징으로서 모순을 떠안은 곳이다. 개혁개방 이후 수많은 외국인이 상하이에 머물렀지만 화려한 서구식 카페 밀집지역 신톈디(신천지)에서 ‘공산당 1차 전국대표대회 유적지’를 찾아볼 생각을 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셋째, 이 책에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치르는 중국의 현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마오가 ‘수호지’를 연상케 하는 활약을 펼쳤던 징강산(중국 5대 성지 중 하나다)으로 향하던 도중 승합차의 기름이 떨어져간다. 그런데 주유소마다 기름이 없다고 판매를 거절했다. 휘발유보다 경유의 기름난(難)이 더 심했다. 대도시에서는 몰랐던 중국의 에너지난을 실감하며 아침마다 주유소 문이 열리기 한 시간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런 일 정도는 본격적인 출발 전 몸 풀기에 불과하다. 장정 중 12개의 성을 거쳐간 홍군이 그중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렀다는 구이저우로 가기 위해 싼장에서 총장으로 출발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모든 길을 아스팔트를 뜯어내고 수리 중인 데다 비가 와서 웬만한 차로는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길을 찾아 빙빙 돌다 150위안(2만1000원, 3~4일 일당에 해당)짜리 고액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어둠 속 산길을 찾아가야 했다. 여기에 손님은 뒷전이고 차만 아끼는 운전기사까지 속을 썩인다.

    오죽했으면 책 말미에 저자는 ‘21세기 장정’의 다섯 가지 투쟁을 이렇게 정리했을까. 첫째 길과 벌인 투쟁, 둘째 기사와 벌인 투쟁, 셋째 시간과의 투쟁(30km 거리를 여섯 시간 반을 걸려 가야 하는 상황), 넷째 각종 출입통제 등 규제와 벌인 투쟁, 다섯째 나쁜 길과 짜증나는 운전기사, 누적되는 피로 등 폭발 일보 직전 ‘나’와 벌인 투쟁이다.

    인간과 혁명을 다시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가 ‘레드 로드’를 선택한 이유는 인간과 혁명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저자는 마오의 평생 동지이면서도 문화대혁명 때 가장 비참하게 숙청을 당하고 죽음에 이른 류사오치와 펑더화이가 마오와 이웃사촌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현장을 둘러보며 저자는 묻는다. “장정을 비롯해 40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한 혁명 동지들을 그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야만 혁명이 가능한 것인가? 혁명이란 어디까지나 수단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것 아닌가?” 마오가 살아 있다면 속시원히 대답해주었을까? 아니, 대답은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해야 한다.

    저자가 장정을 끝낸 지 3개월 만에 이처럼 탄탄한 한 권의 책을 엮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사전준비가 치밀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책을 보며 일정 정리조차 차일피일 미뤄온 게으른 나를 담금질하며, 다음 답사를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다행히 ‘실크로드의 마지막 카라반’이나 ‘레드 로드’ 어디에도 올해 내가 다녀온 코스는 나오지 않는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