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호

스튜디오와 갤러리 연 박영사 안종만 대표

책과 미술에 미친‘모던 뽀이’

  • 김민경│주간동아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9-02-05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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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종만 대표는 박영사라는 학술서적 출판사의 이미지보다 훨씬 컬러풀하다. 그리고 낭만적인 열정이 없다면 꾸기 어려운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그는 아직도 책과 그림을 보면 어린 시절 처음 설탕을 핥았을 때처럼 달콤하다고 말한다.
    스튜디오와 갤러리 연 박영사 안종만 대표

    사진 박해윤 기자

    안종만 대표를 만나신다고요? 좀 괴짜세요. 일반적인 인터뷰이(inter-viewee)로 생각했다가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어요.”

    기자가 박영사 안종만 (63)대표를 인터뷰하기 전, 모씨는 이렇게 귀띔했다. 이런 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 성격이 ‘나쁜’ 것도 아니고 ‘괴짜’라니, 이보다 더 불편한 예비지식도 없다.

    결론을 말하면 그는 박영사라는 학술서적 출판사의 무채색 이미지보다 훨씬 ‘컬러풀’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심지어 가족도 손을 들게 한 낭만적인 열정이 없다면 꾸기 어려운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20년 전 북한산 등산길에서 밑그림이 나왔다는 파주출판단지의 출판 3인방 중 한 사람이 바로 그다(열화당 이기웅 대표,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다른 2인).

    출판사로서 박영사는 1952년 문을 연 이래 대학생이나 고시생들의 책꽂이에서 여전히 단일 브랜드로 가장 많은 권수를 차지하는 브랜드가 아닐까 싶다. 또한 당장 인터넷 지식 검색에서 경제와 관련한 정보를 검색하면 출처를 박영사의 최대 히트작 ‘경제학대사전’(1964년 초판 발행)으로 단 것이 많다. 그것은 믿을 수 있는 레이블이란 뜻이기도 하다. 박영사는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지식과 학문의 세계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 옆에 서서 질문을 기다리는 스승처럼 묵묵히 존재해온 이름이다.

    지난해 말 파주출판단지의 갈대밭 사이에 자리 잡은 출판사 사옥들 사이에 ‘갤러리박영’을 열지 않았다면, 박영사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무미한 학술전문 출판사로만 기억됐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이미 약속된 전시 기획조차 줄줄이 취소되는 ‘엄동설한’에 박영사는 큰일을 냈다. 3개의 전시실과 미디어 카페를 갖춘 1000평(3300㎡) 규모의 갤러리를 연 것이다. 그리고 낸시랭, 김태중, 최진아, 이지현, 한지석, 이진준 같은 젊고 문제적인 작가들에게 작업을 위한 스튜디오를 제공해 미술계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박영사와 갤러리박영은 심학산과 샛강 갈대들로 둘러싸인 파주출판단지 한 모서리에 나란히 있다. 파주출판단지는 출판사 대표들이 서명한 이른바 ‘위대한 계약서’에 의해 건물 높이를 15m로 제한하고, 페인트도 금지해 홀로 눈에 띄는 건물을 찾기가 어려운 곳이다. 갈대숲 사이로 난 길을 이리저리 걷다가 오늘 아침에 읽은 책을 펴낸 출판사를 만나게 되는 곳이다.

    박영사와 갤러리박영의 단정한 먹색 간판도 그렇게 만나게 된다. 간판만큼이나 단순한 외관에 비해 달팽이관처럼 복잡한 구조를 가진 갤러리박영 2층에 안종만 대표의 사무실이 있다. 모든 사무실과 여섯 작가의 스튜디오 모양이 제각각 다르게 생겼다. 내부를 베이징의 예술구 798에서 따왔다는 말을 듣고 ‘괴짜’란 말이 맞는가 싶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의 방은 다시 작은 정육면체다. 독일 출신의 세계적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과 재기발랄한 프랑스 작가 콩바(Robert Com-bas)가 갤러리박영 개관을 축하하며 보낸 메시지가 마주하고 있다. 1971년 박영사에 입사한 이래 거의 매일 아침 5시30분에 집을 나선다는 그는 인터뷰 직전 무슨 일인가에 골몰했던 듯, 선문답처럼 “숲을 봐야지, 사람들이 나무만 본다”고 말했다.

    “최근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다 보니 학자가 아니라 전문직들, 소위 ‘사’자 붙은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일에만 최선을 다하며 살다 보면 나이 들어 인생 전체를 보지 못했다는 후회를 하게 된다. 뭐든 이젠 사람 사는 일 전체를 놓고 보게 된다. 자, 그럼 우리는 무슨 얘기를 할까?”

    ▼ 구상부터 1차 완성까지 20년 넘게 걸린 파주출판단지 조성이 이제 2단계 사업에 들어간다는 보도가 며칠 전에 있었다. 박영사가 1단계 사업을 주도했으니 남다른 기대가 있겠다.

    “2단계는 영화, 영상 쪽에서 주도한다. 더 많은 사람이 출판단지를 찾을 테고, 이곳의 변화 속도도 더 빨라질 것이다.”

    ▼ 파주출판단지에 출판사와 갤러리만 지은 것이 아니라 ‘쇼핑몰’까지 지어 분양하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출판사와 쇼핑몰 분양은 같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스튜디오와 갤러리 연 박영사 안종만 대표

    사진 박해윤 기자

    “말도 못한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봤다. 이 벌판에서 돈 벌겠다고 쇼핑몰 지었다면 정신병자다. 파주출판단지를 북시티로 활성화하기 위한 기반시설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출판사들이 빨리 들어와 사옥을 짓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일을 벌였다. 무모하긴 참 무모했다. 책 만드는 사람이 건설 분양업을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게 된 것에 항상 감사한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 파주출판단지에 와본 사람들은 누구나 독특한 건축물들이 겸손하게 자연과 어울려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출판단지 자체가 하나의 문화상품 기능을 하고 있다.

    “파주출판단지를 이렇게 만드느라 고생한 것도, 또 착각 속에 일을 벌이게 된 것도 돌아보면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미술 작품을 컬렉션한 것이 20년쯤 됐는데, 2000년에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에 가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구겐하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프랭크 게리가 빌바오에 지은 건축물을 보기 위해 250만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렌조 피아노가 기획한 포츠담의 건축물들도 환상적이다. 영국의 유명한 책마을 헤이언와이,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벨기에의 레듀 등을 다 돌아보고 파주 출판도시 건축물들 자체가 강력한 문화적 소프트웨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상업건물인 쇼핑몰 설계도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미노루 야마사키에게 맡겼다.”

    ▼ 어떤 부분이 착각이었나?

    “당시 우리나라 1인 국민소득이 1만달러 남짓이었는데, 출판도시가 활성화된 나라의 1인 소득은 4만달러는 됐다. 몇 년이 빨랐던 거다. 상황이 점점 좋아지고 있는 걸로 자위하고 있다.”

    ▼ 젊은 시절부터 남보다 앞서 일을 벌이는 성격이었나?

    “선친(고 안원옥 박영사 창업자)에 이어 2대로 하는 사업인데다 선친이 병약하셔서 내가 더 부지런히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세대 상경대 3학년 재학 시절부터 출판사에 나왔는데, 첫 번째 일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교정 보는 일이었다. 졸업하고 정식 사원이 돼 제주도 출장을 가는데, 출장비용이 너무 적어서 목포에서 여객선을 타고 10시간 걸려 제주도에 갔다. 제주시를 다 뒤져 제주서점과 거래를 트고 왔다. 지방을 돌며 신규 거래선을 넓히고 소장 학자와 필자들을 새로 발굴하는 게 내 일이었다.”

    ▼ 박영사는 한국에서 처음 정찰제를 시작했다. 당시 반발도 크지 않았나.

    “지방 서점들을 다니며 책을 할인 판매하는 행위가 결국 제살 깎아먹기로 서점 부도의 원인이 되고 서점을 영세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대학원 논문 제목도 ‘출판사의 매출 채권 관리에 대한 연구’였다. 초기엔 서점들이 거래를 끊는 등 반발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대단히 잘한 결정이었다.”

    박영사 초기엔 미술과 예술 관련 서적도 꽤 많이 출판했고, 1950년대 초반에 낸 김소월 시집은 당시 초판만 30만부가 넘게 팔리는 메가히트를 기록했다. 박영사가 학술전문 출판사로 인식된 건 ‘경제학대사전’ ‘경영학대사전’ 등이 학계에 워낙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1960년대 초 박영사가 ‘경제학대사전’ 제작에 의욕적으로 뛰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창업자 고 안원옥 사장은 경쟁출판사인 법문사에서도 경제학과 법률학 대사전을 만들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고 안 사장은 법문사를 찾아가 작은 시장규모와 엄청난 제작비 등을 고려해 하나씩 나눠 출판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엔 두 출판사가 쉽게 동의했다. 그러나 당시 법률에 대한 인기가 더 높아 서로 법률학대사전에 욕심을 냈다고 한다. 고 안 사장이 결국 법률학사전을 양보하기로 하고, 법문사에서 경제학사전을 편찬하던 직원과 자료를 인수해 꼬박 3년의 작업 끝에 1964년 경제학대사전을 발행한다. 1850쪽에 가죽을 댄 호화양장본으로 정가는 3500원.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법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법률학대사전은 수정과 보완이 그치질 않아 애물단지가 된 반면, 경제학대사전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어 박영사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 ‘경제학대사전’은 인터넷 시대인 지금도 경제 ‘지식’의 기본이 되고 있다. 책의 가치가 종이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수고에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책이 인터넷과 경쟁하는 구도가 돼버렸다.

    “70년 된 반즈앤노블을 아마존이 컴퓨터 몇 대로 4년5개월 만에 무너뜨렸다. 이것을 ‘발전’이라 말하지만, 우리 같은 출판사는 희생되는 면이 많다. 그래도 경제학대사전 같은 사전을 계속 보완해온 건 큰 자부심을 갖게 한다. 갤러리박영을 오픈하면서 ‘박영북스’라는 브랜드를 새로 만들었다. 소설 등 문학작품과 미술, 어린이 서적 등이 나와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스튜디오와 갤러리 연 박영사 안종만 대표

    심학산과 갈대밭, 샛강에 둘러싸인 파주출판단지에 갤러리박영이 있다.

    ▼ 출판인이 새로운 출판 브랜드보다 미술갤러리를 먼저 열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살다 보면 먼저 내게 오는 것이 있는 거 아니겠나. 순서 정하고 살 수 있겠나.”

    ▼ 미술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나.

    “부친이 동양화에 대한 조예가 대단히 깊으셨다.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인사동 화랑에서 청전과 겸재, 혜원의 그림을 보는 호사를 했다. 미술에 빨리 눈을 떴는데 아무래도 젊으니까 컨템포러리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더라.”

    ▼ 컬렉션은 추상, 비구상이 많은데, 갤러리박영의 레지던스 작가들은 구상 쪽에 가깝다.

    “구상은 실체가 정해져 있어서 재미가 없다. 추상은 볼 때마다 달라지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다 알 수가 없어서 매력적인 거다. 그러나 갤러리박영은 젊은 작가들을 위한 공간이다. 가요도 조용필 김건모 비 이런 식으로 세대 사이의 맥락이 있는 것처럼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젊은 작가들의 맥락을 보여주려 하다 보니 구상, 팝아트 쪽에 가까워졌다.”

    ▼ 원래 이곳에 갤러리가 아니라 공장을 지을 계획이었다고 들었다.

    “꼭 책을 만들어야 공장인가. 미술품을 만들어내도 공장인 거다. 하하. 10년 전쯤 석란상을 받은 작가의 공방을 찾은 적이 있다. 작가 10여 명이 함께 작업하던 곳인데, ‘창작의 산실’이 화장실 샤워장 취사 시설도 없이 비참했다.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아 꼭 작가들을 위한 스튜디오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 컬렉션이나 레지던스 작가들 중에도 책이나 문자를 소재로 하는 작가가 많은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내가 책을 만드는 사람이니 매우 특별하다. 어렸을 때 설탕을 먹으면 맛있는 것처럼 책을 소재로 한 작품을 보면 무작정 좋다.”

    그의 컬렉션은 루이스 부르주아에서 나이젤 홀, 린넨브링크, 바스키아와 랄프 플렉에 이를 만큼 방대하다. 갤러리박영에서 곧 그의 소장품전도 열린다. 그에게 어떤 작품들을 더 소장하고 싶은지 묻자 “너무 많다. 능력이 없어서 아쉬울 뿐”이라고 말했다.

    “잭슨 폴록을 꼭 컬렉션하고 싶다. 또 마크 로스코, 앤디 워홀도. 젊을 땐 아내 몰래 대출받아서 그림을 사느라 고생도 참 많이 했다.”

    ▼ 일 벌이기 좋아하는 가장을 두면 가족들은 ‘오늘도 무사히’를 새기며 하루하루가 불안하게 마련이다.

    “아, 그런가? 가족 간에도 가치관의 차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안중근 의사가 가족 생각했으면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죽였겠나? 안 의사가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일 아니겠나. 선생님들이 월급 생각하면서 아이들 가르치겠나? 자기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사는 보람이 있는 거다.”

    동그란 안경테, 긴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모습이 문득 낯익어 보인다. 1930년대 사진과 삽화에서 본 근대의 지식인 ‘모던 뽀이’가 바로 그 모습이다. 사회의 변화에 민감했지만, 완고한 현실에 부딪혔던, 그래서 홀로 낭만적이고 데카당했던 ‘모던 뽀이’. 그래서 미칠 만한 뭔가를 평생 갖고 살아야 하는 모더니스트의 ‘벽(癖)’을 그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괴짜라고 이름 붙인 것의 정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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