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호

아내와 함께하는 주말 걷기

  • 양기화│의학박사·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입력2012-11-20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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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와 함께하는 주말 걷기

    기사 내용과 상관없는 이미지 사진입니다.

    주말이면 간단히 꾸린 배낭을 메고 아내와 집을 나선다.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코스를 따라 걷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어느 신문사에서 추천한 주말 걷기 코스를 찾다가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 책에 나온 서울과 수도권의 52개 코스를 완주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함께 걷기를 시작한 것이 벌써 6년째 접어든다. 처음에는 불어난 뱃살을 줄이기 위해서 집 근처 양재천 산책길을 같이 걷던 것이 3년 전부터 주말 걷기로 발전했다. 주말 걷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막연했지만, 이제는 지자체마다 걷기 코스를 개발하고 있어 갈 곳이 넘치고도 넘친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걷기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고조되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되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 의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다. 그는 “걷기는 두 발을 움직이는 물리적 행동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정신적 행동인데 아무래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한국 사회가 성찰이 필요한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한다.

    주말 걷기로 얻는 느낌은 어디를 걷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서울성곽을 따라가거나 왕릉 혹은 북촌의 골목길을 걸을 때는 그곳에 살았던 옛사람들이 남긴 향기를 뒤좇게 된다. 그런가 하면 군포 수리산이나 덕소 새재를 넘어갈 때는 산자락을 따라 퍼지는 소나무 향기에 취하기도 한다. 이럴 때면 가던 길을 멈추고 배낭에 넣어 갔던 책을 꺼내 들기도 하는데, 소나무 사이로 흐르는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거두어 이내 독서 삼매경에 빠져든다.

    다비드 르 브르통 교수는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라고 ‘걷기 예찬’을 시작한다. 주말 걷기는 바쁜 한 주를 마무리하고 자연으로 걸어 들어가는 만큼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오감이 절로 열려 자연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한다. 이때는 평소 같으면 흘려들었을 작은 새의 노랫소리나 길가를 흐르는 시내에서 노니는 작은 물고기까지 눈에 들어온다.



    그런가 하면 자연에서 비롯된 상상력도 덩달아 날개를 편다. 주말 걷기를 다녀오면 그날의 느낌을 정리해 블로그에 소개하곤 한다. 서울 강동구 강동그린웨이를 다녀오던 날엔 명일근린공원에서 일자산으로 향하는 능선에서 본 경치를 두고 소나무 몇 그루가 외롭게 서있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와 닮았다고 적어두었으니 말이다.

    ‘따로 또 같이’하는 즐거움

    서울 서대문구 안산에서 백련산으로 넘어가는 능선을 걸을 때 손에 잡힐 듯한 산 아래 동네를 보면서 피에르 상소를 떠올린 것도 비슷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기복이 많은 길을 걷고 있으면 지구의 등뼈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적었는데, 이 능선에서 바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동조(同調)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걷기가 주는 매력 가운데 하나다. 자연에서 들어온 자극이 나의 기억에 갈무리되어 있는 자료들과 동조를 일으키는 현상 말이다.

    자연의 메시지를 받는 동안에는 생각이 다른 세계로 날아간다. 아내와 함께 그날 예정된 코스를 따라가면서 집안일이나 세상 돌아가는 일을 화제 삼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끊길 때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든다. 가끔은 ‘따로’가 되지만 그래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함께한다는 느낌이 참 좋다. 그 시간과 공간에서 얻는 그 무엇을 공유하는 것도 중요한 소득이다. 아내와 같이하는 주말 걷기가 ‘따로 또 같이’하는 즐거움이 되는 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앞서 적은 것처럼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정말 훌륭한 걷기 코스를 발견하는 재미를 우선 꼽을 수 있다. 막다른 길처럼 보이는 골목길을 돌아들면 뒷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한 숲길은 이어질 듯하다가 끊어지기도 하는데 골목을 조금 더 걸으면 작은 숲을 다시 만나 이어지기도 한다. 마치 우리네 삶에서 만나는 질긴 인연들처럼.

    남산에 있는 산책길에 들어보면, 1000만 명 넘게 사는 도심 한복판에서 산과 계곡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산자락을 벗어나면 바로 대도시의 번화한 거리로 나설 수 있고, 그런가 하면 어느새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과거의 공간으로 연결되는 마술이 펼쳐지기도 한다. 상소는 마르세유에서는 ‘바람’이, 리용에서는 ‘빛’이, 니스에서는 ‘바다’가, 그리고 파리에서는 ‘녹지대’가 특이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적었다. 필자라면 한강과 그 지천이 주는 이미지에서 서울을 ‘물’과 연결하고 싶은데, 상소라면 서울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가장 완전한 치유활동

    우리는 흔히 도시의 길에서는 걷는 재미가 별로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도시에는 시골과 또 다른 무언가가 숨어 있다. 바로 도시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이 만든 인공물이 주는 특별한 느낌들 말이다. 이런 느낌들을 만나기 위해 다비드 드 브르통은 “도시 안에서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은 혹시 뭔가 유별난 것이 눈에 띄지 않나 싶어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숲 속을 지나가듯이 길을 걷는다”고 했다. 마치 우리가 자연을 걸을 때처럼 말이다. 차를 타고 도시의 길을 지나다보면 어떤 장소에 숨어있는 독특하고도 세밀한 부분을 놓칠 수밖에 없다. 특히 사람들이 넘쳐나는 도심의 길모퉁이에 특별한 것이 숨어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한가롭게 거니는 것이야말로 도시의 길을 걷는 진정한 기술이라고 한 브르통의 말에 공감한다.

    상소는 “말하기, 읽기, 글쓰기 등 각자의 속도와 리듬에 따라 일정하게 행해지는 이런 행위들은 길을 걷는 행위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했다. 딱히 맞아떨어지는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필자 역시 글을 써야 할 때는 혼자서 양재천을 따라 산책하곤 한다. 글머리들을 모으고 순서를 정하며, 적당한 비유들을 떠올리다보면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산책길을 오가는 사람은 많아도 생각은 안으로만 향하기 때문에 수월하게 정리된다. 상소의 말대로 길을 걷는 행위가 글쓰기와 다르지 않아서일까?

    숲 속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면서 책을 읽고 사유했다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는 필자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를 수 있다’고 위안하면서도, 소로처럼 숲의 소리를 듣거나 호수를 지나가는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느끼려면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계절의 변화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 별로 없는 도심으로의 출퇴근이 일상인 까닭에 더욱 그렇다.

    아내와 함께하는 주말 걷기
    양기화

    1954년 경기 화성 출생

    1979년 가톨릭의대 졸업

    1998~2000년 을지대 의대 병리학 교수

    2000~2004년 식품의약품안전청 독성연구부 부장

    2005~2008년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현재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사람들 속에 묻혀서 걷는 것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오감을 열면 양재천에서 일어나는 사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산책길 양편에 만개한 샛노란 개나리를 보면 봄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 한결같던 개울물이 술렁거리면 ‘벌써 5월이구나!’한다. 한강에 사는 잉어들이 몰려들어 수선스럽게 짝짓기하면서 생기는 변화다. 한여름을 지나 산책길 은행잎의 푸른빛이 흐려지면 가을을 예감하고, 싸늘해진 바람이 낙엽을 싣고 먼 하늘가로 지나면 겨울 맞을 채비를 한다.

    그래서 올리비에처럼 혼자서 실크로드 걷기에 나서는 만용보다는 소박하게 집 근처 작은 산책길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걷기로 한다. “걷기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치유활동”이라는 그의 주장에 동감하면서 말이다.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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