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호

나를 매혹시킨 것이 나를 분노하게 한다

  •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입력2015-06-25 1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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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매혹시킨 것이 나를 분노하게 한다

    나를 찾아줘 <br>길리언 플린 지음, 강선재 옮김, 푸른숲

    누구나 화를 낼 수는 있다. 화내는 것은 쉽다. 하지만 딱 맞는 사람에게, 적당한 수위로, 그리고 꼭 맞는 시기에, 올바른 목적으로, 게다가 정당한 방법으로 화를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게 정당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만약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당신에게 늘 이런 말을 한다면, 당신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평범해, 지루해, 이류야, 놀랍지 않아, 만족스럽지 않아, 인상적이지 않아.” 언제부턴가 평범함은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결코 특별하거나 탁월하지 못함’을 일깨우는 악담의 일종이 됐다. 하지만 실제로 평범함은 평화로움의 일종이며, ‘모나지 않게, 지나치게 힘들지 않게, 소중한 것들의 축복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의 다른 이름이다.

    평범함이란,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하를 보게 되는’ 미디어 중독의 시대, 이제 무엇을 봐도 그리 놀라지 않게 되어버린 현대인이 잃어버린 행복의 비결이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지극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비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소설 속의 주인공 닉도 그랬다. 경이롭고 대단하고 화려한 에이미를 만나기 전까지는. 닉은 자신이 지금까지 만난 어떤 여자들보다도 화려하고 돋보이는 에이미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푹 빠진 시절은 미국 경기가 호황을 누리던 때였다. 그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 미국 호황이 낳은 자본주의의 기린아였던 것이다. 닉과 에이미가 둘 다 작가로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그 시대는 종이책 르네상스 시대였다. 닉은 자신이 ‘한때 작가’였다고 고백한다. “뉴욕에는 작가가 넘쳐났다. 잡지, 진짜 잡지가 셀 수 없이 많았던 때니까. 그때만 해도 인터넷은 출판계의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진기한 애완동물 같은 존재였다.”



    ‘평범한 삶’의 가치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종이책 전성기는 끝난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자신의 삶을 모델로 한 시리즈물 ‘어메이징 에이미(Amazing Amy)’의 주인공이기도 한 에이미는 이 변화의 직격탄을 맞는다. 늘 최고의 모범생으로 자랐고, ‘어메이징 에이미’ 시리즈를 통해 셀러브리티의 자리까지 꿰차고 있던 에이미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머니가 암 투병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자 닉은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에이미를 설득한다. 에이미는 당황스럽다. 항상 ‘세상의 중심’인 뉴욕에서 ‘어메이징 에이미’로 살아가던 그녀가, 미주리의 한적한 마을로 가서 산다는 것은 ‘몰락’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에이미는 이때부터 닉과 그의 가족을 대놓고 무시한다.

    글을 통한 밥벌이를 더는 할 수 없게 되자 닉은 쌍둥이 여동생 ‘고’와 함께 고향에서 술집을 연다. 에이미에게 8만 달러를 빌려 술집을 연 닉은 이제 아내 앞에서 ‘을’로 전락해버린다. 에이미의 눈에 비친 남편은 그저 풀 죽은 루저일 뿐이다. 에이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은 자신의 몰락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상품 가치 몰락’이다. 이제 몰락한 중산층 남자의 ‘평범한’ 아내가 되어버린 에이미는 더 이상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권태기가 찾아온다. 그들은 불황 속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찾는 ‘평범한 삶’의 가치를 발견해내지 못했고, 둘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닉은 결국 젊은 여대생과 불륜을 저지르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에이미는 복수극을 기획한다. 그녀의 부모가 만들어낸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신화를 훌쩍 뛰어넘는 새로운 신화, 바로 멀쩡히 살아 있는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참혹하지만 ‘상품성 높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자신을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녀를 괴물로 만든 것은?

    에이미는 철저히 계획적으로 남겨둔 일기에서 자신을 ‘남편의 손에 살해된 불쌍한 여자, 게다가 임신까지 한 채로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로 그린다. 그를 위해 자신이 납치되는 정황, 자신이 남편이 휘두른 둔기에 맞아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린 흔적까지 조작해낸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참혹한 괴물로 만들었을까. 일차적으로는 부모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아동심리학자인 부모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외동딸 에이미를 어린 시절부터 ‘상품’으로 만든다. 책 속의 ‘놀라운 에이미’는 매번 ‘실제 삶에서의 평범한 에이미’를 앞질러갔다. 그녀가 아무리 용을 써도 엄마, 아빠가 조작해낸 그 ‘경이로운 에이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부모는 딸을 상품화해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딸이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릴 때마다 ‘소설 속의 에이미’를 승승장구하게 만듦으로써 기이한 대리만족을 즐긴다.

    닉은 아내가 자신을 살인범으로 몰아세우고, 자신을 도와준 옛 애인 데시를 강간범으로 조작해 끝내 죽여버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언론’이다. 에이미는 언론 플레이를 통해 처음에는 아이를 가진 채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비련의 여인으로, 나중에는 스토커로부터 강간당한 후 그를 ‘정당방위’로 죽인 영웅으로 자신을 화려하게 포장해 미디어에 전시한다. 미디어가 없었다면, 과열된 취재 경쟁이 없었다면, 열광하는 대중이 없었다면 ‘어메이징 에이미’는 없다. 에이미를 무서운 소시오패스로 완성한 일등공신은 바로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 유명해질 수만 있다면 어떤 불이익도 감수할 수 있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닉은 배 속의 아이 때문에 아내를 떠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는 그가 ‘평범한 여자’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녀가 소시오패스라는 사실을 모르며, 그녀가 ‘더 큰 거짓말’을 할수록 그 화려한 입담과 현란한 이미지에 현혹된다. 그녀는 이제 자기 거짓말의 노예가 됐고, 부모가 만들어낸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상품을 넘어서서 스스로 창조한 ‘괴물 에이미’가 된다. 그녀는 남편은 물론 배 속의 아이까지 저널리즘의 상품으로 만든다. “나는 아내를 데리러 경찰서로 갔다가 록스타이자 오스카 수상자이자 압승을 거둔 대통령이자 처음으로 달에 간 사람처럼 언론의 환호를 받았다.” 닉은 그저 에이미의 놀라움에 기생해 그녀의 상품성을 드높여주는 부가적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그들이 재산을 잃거나 명성을 잃는 것보다 더 나빴던 것은 그들의 분노가 결국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무엇을 점점 잃게 만든 것이다. 분노가 인간을 파괴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그에게 본래 있었던 가장 좋은 것들, 가장 빛나는 것들을 말살해버린다는 점이다. 분노는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빼앗아간다. 당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당신을 정복하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분노의 원인보다 더욱 비참한 것은 분노의 결과라고. 그녀는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신화적 매트릭스를 깨부수고, 맨주먹으로 일어나 새로운 삶의 영토를 개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 혹독한 신화의 감옥을 만듦으로써 이제 누구도 구해줄 수 없는 죄악의 감옥에 스스로를 유폐한 것이다.

    선량한 사람들의 충언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제정신을 차린 사람이 닉의 쌍둥이 여동생 ‘고’였다는 점이 내게는 가녀린 희망처럼 다가왔다. 그녀는 천재적인 두뇌와 매력적인 성품을 지녔지만 대단한 부귀영화를 바라진 않는다. 닉을 끝까지 말리며 ‘언젠가 널 죽일지도 모르는 여자와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는 것도 그녀다.

    세상은 이런 선량한 사람들의 충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당신의 주변에 가장 평범한 듯 보이지만 가장 조용하고 담담하게,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낸 것 자체에 만족을 느끼는 ‘착한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가장 소중한 길벗, 당신이 온갖 분노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때마다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아름다운 평범성의 화신일 것이다.

    나는 오늘 하루도 어김없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황당한 뉴스에, 받아들일 수 없는 참담한 현실에 분노했다. 그러나 나의 분노를 새하얀 이성의 테이블 위에 놓고 그 빛깔과 냄새를 하나하나 분석해본다. 나의 분노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내가 꼭 맞는 상황에서 꼭 맞는 사람에게 꼭 맞는 방법으로 분노하고 있는지. 나는 한참 멀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언처럼 적당한 때, 적당한 사람, 적당한 상황을 골라 제대로 분노할 수 있으려면. ‘정당한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나의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따뜻하게 만드는 분노. 홀로 고립되는 분노가 아니라 함께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분노를, 언제쯤이면 ‘꼭 맞는 곳, 꼭 맞는 사람, 꼭 맞는 시기’에 표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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