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부터 친화력이 좋았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 대학원 재학 시절엔 경제학 원서를 다량 확보해 서울대 상대 도서관에 보냈다. 후배 학생들은 ‘사공일 기증’이란 스탬프가 찍힌 귀중한 책들을 보고 그의 존재를 깨달았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사공 박사는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둥지를 틀었다. KDI가 국책 연구기관인 만큼 소속 연구위원은 정책 수립에 깊숙하게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랬다. 공리공론을 남발하는 일부 학자들과는 달리 그는 현실감각이 탁월했다. ‘똑 부러지는’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정책의 우선순위는 경제 쪽에 맞춰졌다. 쿠데타 집권에 따른 국민들의 저항을 ‘빵’으로 무마하기 위해서다. TV 황금시간대에 경제교육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KDI 부원장이던 그는 여기에 출연해 ‘스타’로 부상했다. 세계의 석학들과 인터뷰하는 유창한 영어 실력, 한국경제를 살리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핵심을 잘 정리하는 언변, 호감을 주는 용모 등이 돋보였다.
그는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으로 발탁됐다. 경북고 출신이어서 ‘5공’ 실세 세력과 지역적 동질성도 가졌다. 전두환 대통령의 신임도 두터웠다. 세계 경제의 회복세를 내다본 그는 거시정책을 자신의 주도로 이끌었다. 이 예견은 적중해 ‘3저’(유가, 달러가치, 국제금리) 호황시대를 맞는다. 이를 잘 활용해 고물가 고리를 끊고 경상수지 흑자를 이루었다.
3년 8개월 동안 경제수석 자리에 앉았던 그는 재무장관으로 발탁된다. 당시 과천 정부청사의 재무장관실이 ‘401’호였는데 방 번호와 이름이 같은 장관이 들어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관 시절엔 정치권력이 경제에 개입되지 않도록 차단막 역할에 앞장섰다.
관직을 떠난 그는 세계경제연구원이란 민간 연구소를 세워 글로벌 시대에 한국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는 데 몰두한다. 그의 행동 반경은 지구촌 전체에 뻗어 있었다. 미국, 유럽, 아시아 등지를 누비며 석학들과 정책 책임자들을 만났다. 한국에 유력한 인사들을 초청해 토론과 공동연구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 미국의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 등 미래를 내다보는 고수들과도 흉금을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다. 이들을 가끔 한국에 초청해 한국의 미래를 진단받았다.
세계 곳곳에 포진한 그의 인적 네트워크가 한국의 국가경쟁력 강화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의 경륜과 친화력, 리더십이 또 빛을 뿜을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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