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실에서 일한 경험은 없다. 외교부 제1차관 시절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역 자원외교 활동에 관심을 둔 것이 한승수 총리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총리실장으로 발탁됐다는 후문이다.
외무고시 8회로 1974년 입부해 1980년 일본 게이오대에서 연수를 마친 후 주로 대일 외교업무를 맡아왔다. 외교부 내 끈끈한 인맥 풀인 ‘저팬 스쿨’로 분류되기도 한다.
외교 기반이 없던 시절,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중국과의 관계 발전 현장을 발로 뛰며 지켜봤다.
1981년 주일본대사관 2등서기관을 거치며 전두환 대통령의 ‘한일 경제협력’ 추진에 한몫을 담당했다. 1989년 대통령비서실을 거쳐 1991년 동북아1과 과장, 1992년 주중국 참사관, 1995년 주일본 참사관, 1999년 아시아태평양국장 등 요직을 거쳤다.
특히 중국 참사관 시절 사회주의 국가 몰락 등 북방 국가들과의 관계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한중 관계 발전 기반을 닦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주로 일본과 중국 업무를 맡다 보니 한일 역사 문제가 불거진 후 설치된 대통령 소속 ‘동북아 평화를 위한 바른 역사 정립기획단’에서 2005년부터 약 8개월 동안 부단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차관급인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을 지내다 2006년 말 제1차관으로 승진했다. 나이는 네 살이 많지만 외시 기수로는 후배인 송민순 당시 외교부 장관을 원만하게 보좌하며 내실을 기했다는 평가다.
2007년은 그에게 다사다난(多事多難)한 해로 기억된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 여수 국제박람회 유치, 한국-중앙아시아 협력포럼 창설…. 원래 일복이 많은 편이지만 지난해 한 일만 기록해도 책 몇 권은 쓸 정도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인질사태가 발생하자마자 현지로 날아가 대책본부를 진두지휘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현지 네트워크를 만들고 호텔방에서 햇반과 컵라면으로 근 한 달을 보냈다. 당시 막막한 마음으로 가축과 자동차가 얽힌 도로를 달릴 때 본 석양과 모래바람을 잊지 못한다고.
그러나 차관시절 ‘일복’으로 새로운 업무에 대한 적응력과 전략적 사고를 인정받았다는 평이다. 중앙아시아를 한국 기업의 ‘블루오션’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관계 발전에 나선 점 등이 특히 높게 평가됐고 이 점이 장관급인 총리실장으로 승진하는 데 한몫을 했다. 자원 에너지 외교와 기후변화 대응 등으로 외연을 확장하는 자리에 적임자라는 평.
평소 과묵하지만 꼼꼼한 원칙주의자라 아랫사람들에게 다소 엄하다고 한다. 그 밑에 있으면 ‘외교관 ABC’를 배울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