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교수로 있던 1986년, 전두환 정부가 정권을 연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후배 교수와 함께 반대 서명운동을 계획했다. 거기에 첫 서명을 한 것도 정 위원장이었다. 나중에 그는 “여자인 내가 처음 서명을 해야 남자들이 부끄러워서라도 동참할 것이란 말을 듣고 맨 먼저 서명했다”고 털어놨다.
어느 날 갑자기 정 위원장에게 이런 비판 정신과 사회 참여 의식이 생긴 건 아니다. 정 위원장은 일찍이 4·19혁명 때 동덕여고 학생회장으로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을 정권이 무차별 연행으로 탄압하던 1980년대에는 제자들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이런 일들로 인해 그는 비판의식이 살아 있는 지성으로 통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신문의 칼럼 등을 통해 이른바 ‘민주화 세력’에 대해 날선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운동에 치우쳐 제대로 공부를 못했고, 그러다 보니 정권을 잡았어도 의욕만 앞섰지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고 꼬집었고, ‘민주화 운동의 전력을 팔아 공을 보상받으려는’ 세태를 지적했다.
6·25전쟁 때 정 위원장이 겪은 비극적인 가족사(史)는 이제는 잘 알려진 얘기다. 1942년 강원 춘천시에서 1남 4녀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피란길에 청평호수를 건너던 배 위에서 아버지가 세 여동생을 안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때 목숨을 건진 그는 그 뒤에도 피란길에서 어른 목까지 차는 여울을 건너야 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한 젊은 군인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났다. 그런 경험 때문에 그는 ‘평화사관’을 역사관으로 갖게 됐다. 정 위원장은 이런 개인사를 2004년 펴낸 에세이집 ‘오늘이 역사다’에 숨김없이 털어놨다.
역사학자로서 그는 조선 후기의 문화사, 사상사, 지성사를 재조명해 새로운 학문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이름이 높다. 규장각에 흩어져 있던 사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도 높이 평가받는다.
원래 문학을 꿈꿨던 정 위원장은 퇴직 후 고향 춘천에 마련한 집필실에서 조선시대에서 근현대까지 아우르는 역사 이야기를 쓸 계획이었다. 그런 그를 이명박 대통령이 “아직 일할 게 많은데 벌써 쉬려 하느냐”며 국편 위원장직을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국편 위원장으로서 그는 대중이 역사에 접근하기 쉽도록 데이터베이스(DB) 작업과 한글 번역 작업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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