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야학 생활을 하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나온 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서울에서 구속돼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4개월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인천 부평에서 노동교육연구소를 창설해 상담실장을 지내는 등 14년간 노동운동에 종사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을 보고 선거를 통한 개혁 가능성에 눈을 뜬 데다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한 강성노조의 투쟁을 노동운동의 변질이라 생각하면서 ‘사상적 방황’을 하다가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리던 고(故) 제정구 의원으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고 제 의원의 보좌관이 됐다.
이 비서관은 가난의 문제는 운동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봉사와 정신의 혁명으로, 그리고 경영으로 풀어야 한다는 제 의원의 생각을 계승했다. 이 비서관은 같은 맥락에서 빈민운동 그룹 가운데 주택 교통 등 도시통계 연구의 중요성을 자각한 전문가군(群)을 중심으로 2002년 도시통계연구소를 만들었다. 도시통계연구소는 민중논리 일색의 운동권적 시각에서 벗어나 시장 중심의 합리적 정책대안 마련을 위한 도시통계 분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분야에 연구를 집중해 권위를 인정받는 연구소로 발전했다.
이 비서관은 나아가 좌파 성향 정권이 두 차례 이어지는 동안 ‘건강한 우파’의 중요성에 뜻을 같이하는 김진홍 목사의 기독교 개혁운동에 공감해 뉴라이트 운동에 뛰어들었고, 2006년 봄부터 김 목사가 맡은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의 보좌역이 되었다.
정권교체를 위한 대안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돕기로 한 이 비서관은 김 목사의 추천으로 이 대통령 경선 캠프 대외협력팀장과 대선 당시 한나라당 상황분석팀장을 맡아 뛰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국민성공정책제안센터장을 맡아 새 정부에 바라는 국민의 각종 정책제안을 접수, 반영하는 일을 했다. 수원 장안구에서 출마해 제정구 의원의 뒤를 따르겠다는 명분으로 한나라당에 18대 총선 공천을 신청했으나, ‘싸움’이 자신의 체질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면서 철회했다고 한다.
공직사회의 일처리 방식이 아직 다소 낯선데다 나서기를 꺼리는 조용한 성품이지만,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끊임없이 일을 만드는 워커홀릭(일중독증) 기질이 있으며, 과거 경험이 몸에 밴 탓에 ‘을(乙)’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얘기를 경청하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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