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비서관은 학생운동 전력을 이유로 탈락한 응시자들을 정부가 구제하기로 함에 따라 면접에서 떨어진 지 1년 만인 1982년 공직의 길로 들어섰다. 특허청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와의 국제협력 업무를 담당한 그는 업무는 물론 영어에 능통한 게 눈에 띄어 당시 상공부 간판부서인 상역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수출1과, 아·중동과, 국제협력과, WTO(세계무역기구)와 대전엑스포조직위원회 등에서 국제통상업무를 익혀나갔다. 이어 1995년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준비를 위해 파리로 날아갔고 1년 뒤 한국이 OECD에 가입한 이후 파리에 설립한 OECD 한국대표부에서 무역과 투자·산업·자원·에너지 분야 업무를 담당했다. 초대 OECD 한국대표부 공사를 지낸 김중수 현 청와대 경제수석과의 인연도 그때 시작됐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던 1998년 초 귀국해 대통령비서실에서 경제구조조정기획단의 무역·산업담당과장을 맡았고 이후 산자부에서 미주과장 자원개발과장 수출과장에 이어 당시 윤진식 산자부 장관 비서관을 지냈다.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들어가게 된 것도 대통령직인수위에서 국가경쟁력강화특위 부위원장을 지낸 윤 전 장관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부터는 3년간 주중한국대사관 상무참사관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최대 교역상대국이자 투자대상국인 중국 전문 관료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GS칼텍스 칭다오법인의 대규모 화학공장과 베이징현대자동차 증설투자 비준을 비롯해 중국 진출 중소기업의 투자애로 해결을 위해 중국 전역을 발로 뛰며 현장 행정을 폈다. 중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관료의 힘이 세지만 기업들이 중국 관료들을 접하기가 쉽지 않아 상무참사관의 역할이 컸다. 중국 상무부 관료들과의 친분도 두터운 편이다.
WTO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때 MTN그룹 의장(전 김철수 WTO 사무차장) 보좌관을 지내고 대전엑스포 BIE공인협상, 러시아 가스전개발, 베트남 15-1광구개발, 한일대륙붕 공동개발, 중국과의 마늘협상, 미국과의 지재권 협상 등 다양한 양자간 및 다자간 통상업무를 경험했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져 목발을 짚은 상황에서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마늘협상에 참가해 약을 공수하면서까지 시일을 연장하며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부인과의 사이에 홍익대 미대에 다니는 딸과 중국 칭화대 전자공학과에 재학 중인 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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