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러화 영국파운드화 유로화(위부터).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달러화가 다른 이유로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지하는 한 달러화 가치 하락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상대국 통화에 대해 낮아진 가치만큼 돈을 찍어 보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되면 기축통화의 지위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여기에 많은 국가가 달러화 위상에 의문을 가지고 도전하는 상황 그 자체가 달러화 약세를 부추길 수 있는 형국이다.
이와 관련, 이미 각국은 장기적 차원의 달러 기축통화 체제 폐지론을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원유 거래에 있어 달러화 사용 관행을 바꾸자는 논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만 중국, 러시아 등 이른바 강대국들은 거의 직접적인 어법으로 달러화 기축통화 체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지난 3월 저우샤오촨 중국 인민은행장은 인민은행 홈페이지에 이례적인 영문 리포트를 발표해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인 SDR을 전세계 공용의 슈퍼 통화로 격상시키자는 의견을 제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명시적으로 달러화 기축통화 체제를 바꾸자는 주장은 아니었지만 국제 통화체제의 개혁이 불가피한 만큼 SDR의 기능을 제고하고, 특정국 통화가 국제무역에서 통용되고 다른 통화들의 기준이 될 경우 기축통화의 발권 국가가 스스로의 경제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달러화 기축통화 체제를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6월에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상하이협력기구(SCO) 6개국 정상회담에서 글로벌 금융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달러 이외에 새로운 기축통화를 만들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 것이나, 브라질이 중국과의 교역에서 자국 통화 사용을 검토하고 있으며 향후 SDR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산유국 역시 이미 오래전부터 달러화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바레인으로 구성된 걸프협력협의체(GCC)는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지역 단일 통화론, 원유 공동시장 창설 등을 통해 원유 거래시 달러화 사용을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이후 미국 경제 활황으로 논의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서브프라임 위기 이후 움직임이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미국 경제 불안과 저금리 장기화
결국 지금은 경상수지와 재정수지 적자라는 두 가지 표면적 이유에 미국 중심의 일극 경제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강대국과 산유국들의 움직임이 맞물려 기축통화로서의 달러화 가치 약세를 부추기는 형국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 경제는 이러한 움직임에 맞설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상황인가. 설사 지금 일시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해도, 조만간 글로벌 일극체제(Uni-polar system)의 맹주로서 제 역할에 충분한 경제적 파워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미국 입장에서 보면 애석하지만 미국 경제가 글로벌 각국의 움직임에 맞설 만큼 강한 파워를 유지할 수 있을지가 매우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물론 미국은 아직까지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인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GDP는 여전히 글로벌 GDP의 20%를 상회한다. 또한 경제력과 밀접한 상호관계를 갖는 정치, 군사력 측면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적어도 경제에서 미국의 미래는 별로 낙관적이지 않다. 경상수지와 재정수지 적자 확대의 이면에 있었던, 또는 그러한 적자 확대의 원인이 됐던 민간 부문의 대출 증가와 이를 통한 성장 확대가 계속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미국의 민간 부문은 2000년대 들어 소득을 초과하는 지출을 지속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지출을 위한 재원의 상당 부분은 이머징 국가로부터의 자본 유입에 의존했다. 여기까지 보면 문제는 경상수지와 재정수지 등 수지 측면에 국한된다. 하지만 국내적으로 가계 부문의 소득을 넘어서는 소비는 대출 증가와 자산가격의 상승을 통해 이뤄졌다. 즉 자산가격이 계속 오를 경우에는 상관없지만, 자산가격이 떨어지면 가계의 재무적인 건전성이 빠르게 나빠질 수밖에 없는 형태로 성장이 이뤄져온 것이다.
달러화 약세의 원인
그런데 이제 자산가격은 떨어졌고 가계의 평균적 재무적 건전성은 악화된 상황이다. 물론 재무 건전성이 악화된 상태에서도 금융기관이 열심히 돈을 꿔주면 다시 예전과 같은 성장이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금융기관들이 낮은 금리하에서도 좀처럼 대출에 나서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계신용증가율은 올해 들어 계속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사실 자금시장에서는 낮은 금리라면 언제든 대출받을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플러스 투자수익을 낳는 기회는 사방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미국 금융기관들은 그러한 수요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왜 금융기관들이 민간 경제 주체들에게 돈을 꿔주지 않을까.
민간 부문의 재무적 건전성 약화와 버블 이후 안전하고 수익성 높은 투자 기회의 부진 때문이다. 돈을 빌리려는 사람은 여전히 많지만, 금융기관의 기준을 만족하는 민간 부문의 대출 규모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 과정을 통해 민간 부문의 재무적 건전성이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6~07년에 마이너스를 넘나들던 미국의 가계저축률은 올해 들어 꾸준히 상승해 5%를 넘나들고 있다. 시간이 흐른 후 재무적 건전성 측면 때문에 줄던 민간 부문의 신용은 다시 확대될 법하다. 그렇다고 해서 2002년부터 2007년까지와 같은 대출과 부동산 가격 상승에 기반을 둔 고성장이 지속될 것으로 보긴 어렵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의 정책 및 시장금리가 상당 기간 낮은 수준을 유지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저금리하에서 진행되는 달러캐리 트레이딩과 자금 이탈 가능성은 계속해서 달러화 가치 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상 약화와 미국 경제의 불안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달러화 가치의 장기적 하락 압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살펴봤다. 그렇다면 이제 달러화 앞에는 끝없는 가치 하락이라는 미래만이 놓여 있는 것일까. 달러화의 가치 하락과 함께 위안화 등 다른 통화들의 위상이 빠른 속도로 달러화가 이룩해놓았던 것과 같은 위상으로 올라설 것인가.
정치경제적인, 심지어 군사적인 힘의 균형까지 영향을 미치는 통화 변동에 확실한 답을 내긴 어렵다. 하지만 위의 질문에 대한 필자의 답은 이렇다. 달러화 가치는 장기적으로 하락할 가능성이 높지만, 이를 막는 여러 요인이 존재하며, 단기적으로도 달러화가 한 방향의 움직임만을 나타낼 것으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중국을 위시한 이머징 국가의 성장 전략이 여전히 수출에 맞춰져 있고 이러한 전략하에서 글로벌 소비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의 통화가 상대가치 방어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소 어려운 주제이므로 풀어서 설명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