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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초가 삼성전자 키 잡은 이윤우 부회장

“뚱뚱한 고양이 안 되려면 ‘Work hard’ → ‘Think hard’로!”

사면초가 삼성전자 키 잡은 이윤우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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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 반도체 산 증인, 말단 사원에서 스타 CEO로
  • 64K D램 개발 기간 日 후지쓰 16분의 1로 단축
  • “쥐도 못 잡는 뚱뚱한 고양이를 경계하라”
  • 기흥공장 건설 때 한나절에 4km 포장도로 만들어
  • 집무실 소파 없애고 회의용 탁자…야전 사령관 텐트 분위기
  • ‘이재용 전무 컴백 때까지만 역할’ 회의적 시각도
사면초가 삼성전자 키 잡은 이윤우 부회장
지난 5월16일 삼성전자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이윤우(李潤雨·62) 부회장은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면서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25층 집무실의 6인용 소파부터 치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 10여 명이 모여 앉아 회의할 수 있는 탁자를 가져다놓았다.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생각에서였다. 부사장급만 참석하던 업무보고 등의 회의 자리에 이때부터 수하 임원들도 참석하기 시작했다. 해당 업무를 잘 파악하고 있는 임원들이 회의에 나와 실질적인 성과를 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예전 집무실이 펜타곤의 전략회의 분위기였다면 바뀐 집무실은 전장에 나선 사령관의 야전 텐트가 된 셈이다.

이런 변화의 배경은 이 부회장의 CEO 선임이 평시의 차분한 바통 터치가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의 CEO 선임은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CEO로 선임된 날 오후 사전에 예정된 미국 출장길에 오르는 바람에 태평양 상공에서 첫 경영구상을 가다듬을 정도였다.

삼성특검 등으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겪은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의 사퇴 및 그룹 전략기획실 해체라는 예상치 못한 격랑을 겪은 직후였다. 더구나 유가 상승,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 담보대출) 부실로 인한 경기침체, 반도체 가격 폭락 등 세계 경제 환경이 악화일로여서 한마디로 위기의 한복판에 뛰어든 셈이었다.

삼성전자의 한 고위 관계자는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도체 사업 진출 당시 이 부회장이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가져다놓고 결국 사업을 성공시킨 일화는 유명하다”며 “지금 이 부회장이 사무실에 테이블을 가져다놓으며 그때 심정을 다시 떠올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싸움에서 이기다



지금의 이윤우 부회장을 키운 것은 ‘8할’이 반도체와의 싸움이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스타’로는 황창규 삼성전자 기술총괄 사장과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 사장(전 삼성전자 사장)도 꼽히지만 이 부회장과는 상황이 달랐다.

서울대 공대 후배들인 황 사장, 진 사장 두 사람이 삼성전자 반도체라는 ‘비행기’에 탑승한 뒤 고공 비행하며 스타 CEO가 됐다면, 이 부회장은 맨바닥에 앉아 철판과 나사를 모아서 비행기를 조립해낸 사람이랄 수 있다. 이 부회장은 두 사람과 달리 해외유학 한 번 다녀오지 않은 국내파다. 미국 인텔, IBM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소를 거친 두 사람과 달리 사회생활의 첫발을 삼성에서 내디뎠다. 강한 의지와 실행력으로 밑바닥부터 다지며 스타 CEO로 올라선 것이다.

이 부회장과 반도체의 인연은 1975년에 시작됐다. 당시 입사 8년차로 삼성NEC(현 삼성SDI) 건설기획과, 진공관 제작과 등에 근무하던 이 부회장은 ‘반도체가 아니면 안 된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회사를 어렵게 설득해 집적회로(IC) 개발 계획을 마련했다. 당시 삼성NEC는 진공관 사업만 벌이고 있었다. 일본 반도체 선두주자였던 NEC로부터 기술을 이전받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수립했다.

하지만 그를 필두로 한 50여 명의 반도체팀은 일본에서 첫 실패를 경험한다.

“일본 NEC에 도착하니 직원들이 운동장에서 풀을 뽑거나 돌을 줍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1975년은 제2차 오일쇼크의 해로 NEC마저 일이 없어 공장을 놀리고 있었던 거죠. 연수가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습니다.”

의기소침해 있던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의 3남인 이건희 당시 동양방송 이사가 인수한 한국반도체가 한국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반도체 생산라인(FAB) 사업을 벌인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그는 회사 인사팀에 한국반도체로 전보해달라고 요청했다. 회사는 좀처럼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의 고집이 이겼다.

“한동안 마음고생을 했죠. 하지만 결국 회사는 제 편을 들어줬습니다. 이왕 갈 거면 최고가 되라는 인사담당자의 협박(?)에 가까운 말을 들으며 1976년 10월31일 한국반도체로 전출됐지요.”

그때부터 그와 반도체의 끝없는 싸움이 이어졌다. 섬세한 반도체 생산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미세한 온도 차이 때문에 품질이 엉망이 되기도 했고, 심야에만 생산이 제대로 되고 낮에는 불량이 쏟아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속출했다. 이 부회장은 반도체가 그토록 애를 먹였지만 “규소판 위에 지도를 새기고, 그 위를 전자(電子)라는 놈들이 흘러 다니며 우리가 원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며 반도체와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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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동아일보 산업부 기자 nex@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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