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업의 성장이 곧 국가경제 발전으로 인식되던 때가 있었다. 수많은 중소기업은 대기업을 위해 그저 ‘소’처럼 일했다.
- 정부, 언론도 그래야 한다고 강변했다.
-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경제가 발전했고 많은 대기업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이들을 위해 희생한 중소기업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불공정거래, 대기업의 보복 등으로 중소기업은 점점
- 병들어갔다. ‘신동아’는 공정거래 확립, 규제 해소를 목적으로 설립된 기업호민관실과 공동으로 우리 경제가 가진 갖가지 문제를 진단, 평가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불필요한 규제로 인한 기업활동의 제약 사례,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한 거래관행 사례 등을 발굴, 진단하고 대안도 제시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편집자>
지난 2월 25일 열린 삼성전자 3D LED TV 신제품 발표회 모습. 삼성전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연간 수십조원의 수익을 내고 있다.
중소기업 울리는 대기업의 횡포
경기도 소재 B기업 역시 불공정거래의 피해자다. 이 회사는 ‘특허 공유’를 전제로 대기업과 거래를 시작했고 첫 3년간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대기업이 거래시작 조건으로 공유했던 특허로 B사라는 경쟁사를 육성하여 경쟁시킨 후, 수익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국제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불공정거래였지만 B사는 변변히 항의도 못한 채 속앓이만 해야 했다. 같은 고통을 겪은 서울 구로구의 한 소프트웨어업체 사장은 “중소 소프트웨어업체들이 겪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단가는 계속 떨어져 결국 수익의 대부분은 대기업에 돌아간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환율과 국제유가가 하락할 경우 대기업은 당연하다는 듯이 중소 협력회사에 납품 단가 인하를 요구해 관철시킨다. 그러나 환율이 올라간다고 단가를 올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얼마 전 기업호민관실에 접수된 충북의 한 중견 반도체 소재업체 D사의 사례를 보면, 환율 변동으로 단가 인상 요인이 발생했지만 오히려 대기업은 단가 인하를 요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를 해 보니, 우선 대기업은 D사의 원가계산서를 입수해 경영상황을 훤히 알고 있었고 이 기업이 개발한 특허기술을 다른 중소기업에 공유시켜 D사의 경쟁업체로 키운 것으로 나타났다. 발주와 취소는 항상 ‘말’로 이뤄져 기록도 없었다. D사가 거래 중단을 각오하고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D사에‘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자율조정’같은 얘기는 그저 ‘그림의 떡’이었던 것이다.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사례는 위에 소개한 것 외에도 많다. 사례를 들추다보면 그야말로 ‘불공정 백화점’이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대기업들은 외국 유명 기업 앞에서는 감히 입도 떼지 못하는 부당한 거래 조건을 힘없는 중소기업에 버젓이 요구하고 있다. 이런 불공정거래는 비단 대기업과 제조 중소·벤처기업 사이의 문제만은 아니다. 종합 건설업체와 전문 건설업체, 이동통신회사와 게임 개발업체, 방송사와 드라마 제작사, 대형 시스템통합(SI) 업체와 SW개발업체, 케이블 방송사와 콘텐츠 공급사 등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세계적인 석학 기 소르망 교수는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 역사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다”며 한국의 경제발전을 높게 평가한 적이 있다. 삼성, 현대자동차, LG, SK와 같은 대기업들은 이런 평가를 받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그러나 뜯어보면 이들 대기업의 성장을 위해 우리나라는 그만한 대가를 치렀다. 특히 언제나 ‘을’의 위치에 있었으며 대기업을 위해 ‘소’처럼 일해 온 중소기업들의 피땀이 있었다. 대기업이라는 형님 집이 잘되면 동생인 중소기업에도 빛이 들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역대 정부도 열심히 이를 지원했다. 그 결과 한국이 낳은 자랑스러운 기업 삼성전자는 연간 20조원 이익이라는 전대미문의 실적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중소기업의 사정은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졌고 이제는 폭발 일보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
대·중소기업 양극화
표에 따르면, 지난 몇 년간 삼성전자 등 대기업의 이익률이 10%대로 증가한 반면 중소기업의 이익률은 오히려 3% 이하로 감소했다.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대기업 이익의 상당 부분은 뛰어난 자체 역량의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중소기업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평등한 협상의 결과도 큰 이유가 됐음은 분명하다. 어려울 때는 동반자라는 명목으로 단가를 깎고, 환경이 좋아지면 내부 역량이라며 보너스 잔치를 하고, 엄청난 이익을 내고도 납품기업의 단가를 회복시켜주지 않는 대기업의 일방적 수탈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다.
지난해 8월 미국에서 발행되는 잡지인 ‘컨슈머리포트’는 현존 최고 패밀리세단으로 현대자동차의 YF쏘나타를 선정했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익률 차이가 모두 경쟁력의 차이로 인한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가 납품업체인 중소·벤처기업보다 5배가량 혁신역량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도, 심지어 삼성전자 측도 이런 주장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당장 우리나라가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LCD 관련 산업만 봐도 그렇다. 삼성과 LG가 최종 제품을 생산해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이면에는 교세라, 3M, 코닝 등과 대등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제품을 공급하는 국내 중소·벤처기업들의 공로가 크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들 중소기업은 IT강국 대한민국의 근간이 되어왔다. 이런 사실들을 볼 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벌어지는 불공정한 구조를 내버려둔 채 중소·벤처기업을 지원한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썩은 웅덩이를 두고 모기를 잡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중소기업 지원정책보다 공정거래의 기틀을 세우는 것이 우리 경제를 위해 더 중요하다고 기업호민관실이 판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정거래 확립을 위한 대안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는 기업 간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이상의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일단 불공정거래는 사회 양극화의 근본 원인이 되어 사회통합을 저해한다. 대·중소기업의 부가가치 분배의 격차는 사회자원의 균형 배분을 저해한다. 현재 대기업의 임금은 지방 중소기업의 거의 2배에 달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청년들에게 중소기업에 취업하라고 장려하는 것은 공허할 뿐이다. 대·중소기업 문제는 청년 일자리 미스매치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사회적으로는 결혼이 늦어지고 출산율이 저하되는 등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도 된다. 결론적으로 왜곡된 대중소기업 관계는 국가의 성장과 분배 전체를 왜곡하여 선진국 진입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중소기업들이 공정거래위원회 등 국가기관에 대기업의 불공정행위를 제소하고 공정위가 신속하게 불공정 행위를 징계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정말 순진한 발상일 뿐이다. 힘없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제소하는 것은 ‘회사 문을 닫는다’는 각오를 하지 않고는 못 할 일이라는 걸 그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다. 바로 ‘대기업의 보복’ 때문이다. 물론 하도급법(19조)은 ‘원사업자가 이 법을 위반하였음을 관계 기관 등에 신고한 행위’에 대하여 보복할 경우 형사처벌을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법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일단 형사처벌을 받은 사례가 거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보복의 이유가 된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듯이 중소기업에 대기업의 보복은 언제나 목을 죄는 현실로 다가온다. 기업호민관실이 무기명 신고제, 신고 대행제, 입증 책임 전환제도 등을 주장해 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정위에서는 “중소기업들이 신고를 하지 않는 데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고 강변한다. 신고만 한다면 엄정 대처하겠다고 말한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불공정한 단가 인하
중소기업들이 겪는 애로사항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불공정한 단가 인하’다. 단가 협상 때 대기업은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원가계산서를 중소기업에 공공연히 요구함으로써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 ‘을’의 위치에 있는 중소기업은 울며 겨자 먹기로 원가를 공개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보면 대기업이 정해주는 가격이 곧 적정가격이 된다. 중소기업에 영업비밀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공정한 거래를 위한 장치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대기업이 공정위에 신고한 후에만 중소기업에 원가계산서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등록제도 도입이 절실하다. 또 원가 확인을 한다는 이유로, 경영지도라는 명목으로 수시로 이뤄지는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현장 감사도 제한돼야 마땅하다. 중소기업이 어렵게 개발한 특허의 공유를 요구하는 관행도 사라져야 한다. 대·중소기업이 협상할 때 비밀유지 약정을 의무화하는 조치도 마련해야 한다.
글로벌 표준에 맞는 구매 관행도 준비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대기업들도 이제는 애플, 시스코 같은 글로벌 기업들처럼 6개월 전에 중소기업에 물량 예측치를 제공하고 최소 3개월 전에는 구매요구서를 제공하도록 하는 관행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장기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글로벌 표준이 성장의 새로운 역량이 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구두발주, 구두취소 같은 불공정거래에 대해서는 징벌적 배상제 등 강력한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기업호민관실은 지난해 7월 출범한 이후 지금까지 대·중소기업 불공정거래 사례를 수집해왔다. 그리고 ‘대·중소기업 선순환 생태계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국무총리실, 언론 등이 호민관실의 연구에 관심을 보였고 문제해결에 동참했다.
지난 7월1일에는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관계 부처 책임자들이 첫 모임을 갖기도 했다.
대·중소기업 선순환 생태계는 크게 공정거래 부분과 상생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합법적인 영역인 공정거래 문제는 공정위의 몫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합리적인가 아닌가’의 기준이 되는 거래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세우는 일이다. 이를 위해 기업호민관실은 현재 ‘호민인덱스’라는 평가 지표를 별도로 개발하고 있다.
호민인덱스
한국에서는 대기업이 협력업체에 구매 물량 장기 예측치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 무슨 대단한 관행처럼 되어 있다. 따라서 납품 중소기업은 설비 증설 판단을 하기가 아주 어렵다. 대부분의 대기업은 구매요구서를 빨라야 한 달 전에 중소기업에 제공한다. 그렇게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납품을 위한 원자재 수급에는 두 달 정도가 걸린다. 중소기업은 사전에 눈치껏 원자재를 발주하지 않으면 납품 지연으로 대기업에 보상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중소기업이 기술 개발에 전념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지난 5월14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녹지원에서 중소기업인 400여 명을 초청해 오찬을 함께 하고 46명의 중소기업유공자에게 훈장과 포장,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그런 점에서, 기업호민관실이 준비하고 있는 호민인덱스는 앞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중요하게 다루는 기준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보복 금지와 기업비밀 보호, 기업 내부 평가시스템 등이 수치로 평가될 것이며 환율이나 원자재 가격 변동을 납품 단가에 반영하고 적정한 유지·보수 계약을 체결하는가 하는 항목도 중요하게 분석될 예정이다. 그동안 편안하게 시장을 요리해온 대기업으로서는 그리 기분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다.
일각에선 이런 주장도 내놓는다. “대기업과 1차 협력업체는 문제가 없는데, 2,3차 협력업체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기업은 현금이나 60일 이내의 어음으로 신속하게 대금을 지급하는데, 2,3차 협력업체는 이러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금지급 문제는 호민관실의 조사에 따르면, 불공정거래에서 차지하는 심각도가 부당원가 인하, 부당거래 조건, 기술탈취에 이어 네번째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경쟁업체 간 원가계산서 비교, 원가를 확인하는 부당한 현장 실사 등 다양한 불공정 행위는 2,3차 협력업체가 아니라 대·중소기업 간의 거래에서 특히 심각하다.
부당거래 조건은 더욱 심하다. 제조업에서 건설 유통에 이르기까지 대기업의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부당거래는 설계에서부터 납품, 사후 서비스에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기술 탈취는 누가 뭐래도 대·중소기업 간의 문제다. 대기업과의 거래에서 특허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은 하도급법상 엄연한 불법임에도 중소기업인들 사이에서는 당연한 상식으로 통한다. 사업 제안 후 아이디어 탈취 사례는 대기업의 대표적인 문제다.
일본보다 강한 우리 중소기업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문제가 부각되자 중소기업인들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한 공정사회 구현의 첫걸음이 바로 대·중소기업 간 공정거래의 정착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정거래는 혁신경제 구조정착, 사회 양극화 해소, 청년 일자리 미스매치 등의 현안 문제 해결의 열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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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부에서도 대·중소기업 상생을 적극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대·중소기업 상생은 문제의 본질인 공정거래보다 대기업의 시혜적인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대기업에 오히려 ‘면죄부’를 준 측면이 있다. 핵심 문제는 상생 이전에 공정거래의 확립이다.
대만은 대기업이 부족하고, 일본은 중소기업 혁신이 약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대기업의 글로벌 시장 개척력과 중소벤처의 혁신 역량의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어떤 나라보다 강력한 경쟁력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기업을 위해서라도 ‘공정거래 문화’의 정착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