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살구꽃 피었는데도 권력 영욕 얽힌 석어당은 처연했다

[명작의 비밀]

  • 이광표 서원대 휴머니티교양학부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4-05-0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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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목대비·광해군·인조 운명이 얽히고설킨 곳

    • 월산대군 사저이던 곳… 임진왜란 때 임시 정전

    • 광해군이 인목대비 유폐시켜

    • 인조반정으로 앞마당에서 폐위

    봄을 맞은 덕수궁 석어당. [문화재청]

    봄을 맞은 덕수궁 석어당. [문화재청]

    덕수궁엔 늘 사람이 많다. 그중에서도 3월 말~4월 초가 되면 특별하게 더 붐비는 곳이 있다. 살구꽃 핀 석어당(昔御堂) 앞이다. 석어당은 궁궐의 수많은 전각 가운데 유일하게 2층 건물이다. 그런데 단청이 없어 전체적으로 흑갈색 톤이고 가로로 길게 뻗어 있어 외관이 꽤나 이색적이다. 석어당 외관은 화려하고 웅장하다기보다는 무언가 쓸쓸하고 외로워 보인다. 단청이 없기 때문일까. 가로로 길게 펼쳐져 있기 때문일까.

    석어당 바로 앞에 수령 400년이 넘은 살구나무가 있다. 커다란 고목에 살구꽃이 만발하면 사람들은 살구꽃을 배경으로 석어당을 촬영하고, 석어당을 배경으로 살구꽃을 촬영한다. 봄밤의 석어당 살구꽃에 취하는 사람도 많다.

    언제부턴가 석어당은 덕수궁에서 내 발길을 가장 오랫동안 잡아끄는 공간이 됐다. 덕수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도 좋고, 근대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나 정관헌(靜觀軒)도 좋지만 석어당은 석어당만의 묘한 매력이 있다. 길게 늘어선 흑갈색 건물은 왠지 보는 이를 쓸쓸하게 한다. 그 쓸쓸함이 보는 이의 발길을 계속 붙잡고, 화사한 살구꽃은 석어당을 더 쓸쓸하게 한다. 저 쓸쓸함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석어당 바로 옆엔 즉조당(卽阼堂)이 있다. 석어당과 즉조당 앞에 서면 400여 년 전 어느 풍경이 자꾸만 떠오른다.

    임진왜란 거치며 행궁 된 덕수궁

    덕수궁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때다. 덕수궁은 애초에 왕궁이 아니라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私邸)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는 의주로 피란을 갔다. 말이 피란이었지, 백성을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을 간 것이다. 그러자 분노한 백성들이 경복궁과 창덕궁에 불을 질렀다. 그뿐만 아니라 공노비, 사노비의 문서를 보관하던 장례원과 형조에도 불을 질렀다. 이듬해인 1593년 전황이 진정되면서 선조 일행은 한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경복궁과 창덕궁이 모두 폐허가 된 상항에서 왕이 머물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이에 선조는 월산대군의 사저에 머무르게 됐고, 이곳은 자연스럽게 행궁(行宮·임금의 임시 거처) 역할을 했다.

    그 사저에서 석어당과 즉조당은 중심 공간이었다. 당시 석어당, 즉조당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선조는 단청 없는 2층 건물(지금의 석어당)을 정전으로 사용했으며 1608년 이곳에서 승하했다. 곧바로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이 즉위했다. 당시 광해군의 나이 33세였고, 이복동생 영창대군(1606~1614)은 두 살이었다. 광해군의 즉위식은 바로 옆 건물 서청(西廳·지금의 즉조당)에서 거행됐다. 3년 뒤인 1611년 광해군은 월산대군 사저를 경운궁(慶運宮)이라고 명명해 궁궐 지위를 부여했다. 동시에 중건 공사를 마무리한 창덕궁으로 환궁했다.



    광해군의 서자 콤플렉스, 영창대군을 죽이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5년이 지난 1613년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계축옥사(癸丑獄事)다. 실은 영창대군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대북파(大北派) 이이첨 등이 조작한 사건. 영창대군이 눈엣가시였던 광해군은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하고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도 처형했다. 이듬해인 1614년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가 영창대군을 작은 골방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그 열기로 영창대군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증살(蒸殺)이었다.

    광해군은 서자(庶子) 출신인 데다 첫째가 아닌 둘째였기에 적장자(嫡長子) 출신의 영창대군이 늘 부담스러웠다. 31살이나 어린 동생이라고 해도 적장자는 그 자체로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영창대군 세력이 언제든 왕위를 빼앗아갈지 모를 일이었다. 이른바 ‘서자 콤플렉스’였다. 적장자 왕위 계승 원칙의 조선에서 서자 출신 임금이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서자 콤플렉스는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조는 조선의 첫 서자 출신 임금이었다. 그것이 선조의 콤플렉스였다. 그렇기에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 놓고도 늘 적자가 태어나 왕위를 계승해 주길 바랐다. 그 과정에서 선조와 광해군 사이의 갈등은 점점 커졌고, 두 사람은 부자(父子) 관계를 넘어 정치적 라이벌로 변해갔다. 그러던 중 1606년 계비 인목왕후(1584~1632)가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과의 나이 차이는 31살이었지만 광해군에게는 중차대한 상황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선조의 마음은 영창대군 쪽으로 급격히 기울였다. 이를 눈치챈 세력은 영창대군 앞으로 줄을 섰다. 이른바 소북파(小北派)였다.

    광해군은 불안해졌다. 1608년 선조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천만다행 왕위에 올랐고, 그때 영창대군의 나이가 불과 두 살이었지만 즉위 후에도 어린 이복동생을 정치적 라이벌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급기야 영창대군을 제거하기에 이른 것이다.

    석어당 앞에서 처지 바뀐 인목대비와 광해군

    조선 말기 문신 김성근이 1905년 쓴 석어당 현판. [이광표]

    조선 말기 문신 김성근이 1905년 쓴 석어당 현판. [이광표]

    여덟 살의 어린 영창대군이 무참하게 살해되자 인목대비(인목왕후)는 충격에 휩싸였다. 인목대비와 광해군은 법적으로 모자(母子) 관계였으나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원수가 됐다. 광해군은 이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목대비의 권력까지 제거해야 했다. 급기야 1615년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경운궁 석어당에 유폐했다. 이어 3년 후인 1618년엔 아예 대비의 자리에서 폐위시켰다.

    임진왜란 때 세자에 올라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전투를 이끌고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오랜 기다림 끝에 왕위에 올라 실용 중립외교로 탁월한 국제정치력을 발휘한 광해군. 그런 그가 서자 콤플렉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치명적 덫에 걸린 것이다.

    인목대비는 석어당에 갇혀 살았다. 석어당은 이렇게 인목대비의 한이 맺힌 곳이다. 그런데 반전의 시간이 찾아왔다. 바로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1623년 4월 12일 새벽, 한양도성 밖 홍제원(지금의 홍제동) 근처에 반정의 세력이 모였다. 광해군과 북인(北人) 중심의 정치로부터 소외당한 서인(西人)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세검정에서 칼을 씻으며 전의를 다진 뒤 한양도성 창의문(북소문)의 빗장을 부수고 도성 안으로 진격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이들은 여세를 몰아 곧바로 광해군이 있는 창덕궁으로 돌진했다. 광해군은 간신히 창덕궁 담장을 넘어 밖으로 도망쳤다.

    반정은 손쉽게 성공했다. 반정 세력은 곧바로 인목대비가 머물고 있는 경운궁 석어당으로 달려갔다. 대비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강화부사의 목을 잘라 석어당 처마에 매달지 않고선 경운궁을 나갈 수 없다”고 외쳤다. 광해군에 의해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인목대비의 한 맺힌 목소리가 경운궁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폐위된 왕은 죽이지 않는 법”이라는 신하들의 만류에 따라 죽이겠다는 마음을 거두었다.

    광해군은 반정군에 붙잡혀 석어당 앞으로 끌려왔다. 인목대비는 석어당 앞마당에 광해군을 꿇어앉히고 폐모살제 등 36가지 죄를 물어 왕에서 폐위시켰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고 반정 다음 날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는 석어당 옆 즉조당에서 왕위에 올랐다.

    엄청난 반전(反轉)이다. 자신이 폐위한 인목대비 앞에서, 그것도 유폐의 공간 석어당 앞마당에서 인목대비에게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고 광해군은 생각이나 했을까. 석어당에 유폐된 인목대비가 절치부심(切齒腐心) 재기를 노리긴 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복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을까. 조선 정치사에서 이보다 더 극적인 반전은 없을 것이다.

    석어당과 즉조당은 이렇게 드라마틱한 공간이다.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고 폐위된 인목대비가 갇혀 지낸 곳, 그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무릎 꿇리고 왕위에서 끌어내린 곳, 광해군이 즉위하고 폐위된 곳,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가 즉위한 곳. 광해군, 인목대비, 인조의 악연이 얽히고설켜 있으니 한편으론 무시무시하고, 한편으로 처연하고 쓸쓸하다.

    영조가 이름 붙인 석어당과 즉조당

    석어당 2층에서 내려다본 살구꽃. [문화재청]

    석어당 2층에서 내려다본 살구꽃. [문화재청]

    덕수궁 석어당은 중화전 뒤편에 있다. 석어당 바로 왼쪽 뒤편에 즉조당과 준명당(浚明堂)이 있다. 즉조당과 준명당은 운각(雲閣·다락집 복도)으로 연결돼 있다. 그런데 석어당과 즉조당이란 이름이 붙게 된 내력이 다소 복잡하다.

    단청 없는 2층 건물(석어당)은 1593년 선조가 행궁으로 사용할 때부터 존재했다. 그때는 궁궐이나 사찰이 아니라 월산대군 사저(민가)였기에 단청을 할 수 없었다. 애초부터 살림집 분위기였던 셈이다. 선조는 15년 동안 이 건물을 정전으로 삼았고, 1608년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바로 옆 즉조당에서 즉위한 광해군도 1611년 창덕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이곳 석어당에서 집무를 보았다.

    이후 인목대비는 1615년 석어당에 유폐돼 8년 동안 갇혀 지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석어당 앞으로 끌려와 폐위됐고 다음 날 인조는 그 옆 즉조당에서 왕위에 올랐다. 16세기 말~17세기 초 격변의 시기에 경운궁은 치열한 권력 투쟁의 현장이었고, 석어당과 즉조당이 그 핵심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 두 건물은 특별한 이름이 없었다. 석어당은 정전으로, 즉조당은 서청으로 불렸을 뿐이다. 두 건물에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영조였다. 영조는 1769년 왼쪽 건물에 즉조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즉조는 임금이 즉위한다는 뜻. 두 명의 왕(광해군과 인조)이 즉위한 곳이니 그 의미가 각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4년 뒤인 1773년 영조는 ‘昔御堂’이라는 어필 현판을 하사해 즉조당에 걸도록 했다. 즉조당의 이름을 석어당으로 바꾼 것이다. 석어당은 ‘옛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 ‘옛 임금이 즉위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옛 임금이 머물던 곳’이라는 의미로 바꾼 것인데, 그 차이는 무얼까. 영조는 왜 이렇게 이름을 바꾸었을까.

    대한제국의 힘겨운 내력까지

    그러곤 100여 년이 흘렀다. 창덕궁과 경복궁에서 온갖 파란을 경험한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을 통치 공간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무렵 제국의 황궁으로 활용하기에 경운궁은 부족하고 왜소했다. 그래서 고종은 우선 지금의 즉조당(당시는 석어당)의 이름을 태극당(太極堂)으로 바꾸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의 정전 건물로 사용했다. 또한 그 옆에 준명당을 새로 지었다. 1년 뒤인 1898년엔 태극당에서 중화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4년 뒤인 1902년 중화전에서 즉조당으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대신 새롭고 크게 중화전 건물을 새로 지었다(이 건물이 지금의 덕수궁 중화전이다). 이 과정에서 2층짜리 단청 없는 건물은 석어당이란 이름을 얻었다.

    석어당과 즉조당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됐다. 당시 경운궁에 대화재가 발생해 전각 대부분이 불에 탔다. 이때 고종은 석어당과 즉조당을 가장 먼저 재건할 것을 지시했고, 이 덕분에 1905년 석어당과 즉조당이 중건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석어당의 형태가 다소 변했다. 평면이 一자형에서 ㄴ자형으로 바뀐 것이다. 1935년 중수 공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건물은 ㄴ자형에서 一자형으로 다시 변형됐다. 그 모습이 지금의 석어당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경운궁은 1907년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살구꽃 피면 더 처연한 곳

    고종이 1905년 직접 쓴 즉조당 현판. [이광표]

    고종이 1905년 직접 쓴 즉조당 현판. [이광표]

    석어당은 현재 1층은 정면 8칸에 측면 3칸, 2층은 정면 6칸에 측면 1칸이다. 대청 앞쪽 두 칸은 개방하고 그 양옆은 모두 창호를 달았다. 왼쪽 방 내부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2층은 칸막이 없이 방 하나로 트여 있다. 현재 석어당의 1층에는 고종의 어필 현판이 걸려 있으며 2층에는 1905년 중건 당시 김성근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즉조당에는 고종 어필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석어당과 즉조당을 보면 그 내력이 다소 복잡하고 이름도 자주 바뀌었다. 애초 궁궐로 조성된 것이 아니었기에, 그것도 전란의 와중에 사저를 행궁으로 사용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경운궁의 역사에서 17세기 초는 가장 드라마틱했다. 석어당과 즉조당은 17세기 초 치열한 권력투쟁의 현장이었다. 단청 없는 2층짜리 석어당은 그 외관과 분위기에서 17세기 초의 비극과 잘 어울린다. 처마와 벽체 등의 짙은 흑갈색. 가로로 쫙 펼쳐진 건물. 이색적이면서도 어딘가 쓸쓸하다. 단청 없음의 아름다움은 묘하게도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그 흔적이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석어당의 시커먼 처마와 목재를 배경으로 분홍빛 살구꽃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더 아련하다. 저 살구꽃은 400여 년 전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비극적 인연을 다 알고 있는 것일까.

    명암이 짙게 엇갈리는 반전의 공간, 석어당과 즉조당. 그 앞에 서면 만감이 교차한다. 인목대비 앞에 무릎 꿇은 광해군의 모습이 떠오른다. 권력의 영욕이, 인간의 삶과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옆에 붙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권력자들의 운명이 얽히고설킨 곳, 그래서 한없이 쓸쓸해지는 곳. 살구꽃이 피면 석어당은 더 처연해진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前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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