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빚 2000원에 저당 잡힌 충무공 묘소
동아일보 보도로 대국민 모금 운동 시작
성금 보낸 국민이 남긴 1000여 통 편지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김윤석 분)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노량해전에서 이충무공은 숨을 거둔다. 영화 말미에는 이충무공의 상여를 운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충무공을 떠나보내며 땅을 치고 통곡하는 조선의 백성들. 이충무공의 흔적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후대 사람들은 이충무공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통영의 한산도, 진도의 명량, 하동의 노량에도 있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에도 있다. 국보로 지정된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장검 2자루, 보물로 지정된 요대(허리띠)도 있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충무공 동상을 통해 위대한 영웅을 기억하기도 한다.
그런데 좀 특별하고 이색적 유물이 있다. 1930년대 초 이 땅의 보통 사람들이 이충무공을 기리면서 써 내려간 1000여 통의 편지다. 이 편지들은 현충사와 관계가 깊다. 이충무공 사당인 현충사는 조선 숙종 때인 1706년에 창건됐다. 이충무공이 세상을 떠난 지 10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현충사는 철폐됐다. 그 현충사가 다시 세워진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이었다.
당시 현충사 중건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다. 현충사 중건은 1931년 이충무공의 묘소와 위토(位土)가 담보로 잡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위토는 묘소 관리와 제사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경작하는 토지를 말한다.
저당 잡힌 이충무공 묘소와 위토
이충무공의 묘소와 위토가 은행에 저당 잡힌 사실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동아일보 1930년 9월 20일자를 통해서였다. ‘이충무공 묘각(廟閣)이 퇴락/제토(위토)는 은행에 저당되고 춘추향사(春秋享祀)도 그칠 지경’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충무공 종가(13대 종손 이종옥)의 가세가 기울어 충무공 묘소와 위토가 저당 잡혀 곧 잃어버릴 지경”이라고 전했다. 1년 뒤인 1931년 5월 13일 동아일보는 ‘2000원 빚에 경매 당하는 이충무공의 묘소위토’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다음은 그 기사의 일부다.“임진란, 거북선과 함께 역사를 만든 민족적 은인 이충무공의 위토 60두락지기가 장차 경매에 부칠 운명에 있다. (…) 13대 종손 이종옥 씨의 살림이 차차 영세해지면서 그 토지를 (담보로) 1300원의 빚을 얻었던바, 지금은 이자까지 붙으면서 2400원이 되어 동일은행에 들어가 있다. 동일은행에서는 그 채무자인 이종옥 씨와 공동 소유자들인 이씨 일족 70여 명에게 여러 번 독촉을 했으나 갚지 못하자, 오는 5월 말까지 갚지 않으면 당연히 경매 처분하겠다고 했다.”
위당 정인보는 동아일보 1931년 5월 14일자에 ‘민족의 수치, 채무에 시달리는 충무공 묘소’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5월 15일자에도 정인보는 관련 글을 싣고 “이순신의 묘소와 위토를 보존하는 것은 우리 조선인의 공동 책임”이라며 “일기(난중일기), 금대(金帶), 장검, 묘계(墓階), 병풍석, 비각 등의 수리보존을 이어가야 한다”고 했다.
9일 만에 모인 2919원
동아일보 1931년 5월 13~15일자 기사를 통해 이충무공 묘소와 위토 저당 사건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5월 16일부터 동아일보로 성금이 답지했다. 동아일보는 같은 해 5월 17일부터 성금 기탁자 명단과 관련 사연 등을 소개했다. 아울러 이 같은 분위기를 살려 민족성금운동으로 펼쳐나갔다. 동아일보는 1931년 5월 18일자에는 경성(서울)에 사는 황영소(13세・수송공립보통학교 5년) 황영희(6세・중앙유치원) 남매의 사연을 인터뷰 형식으로 소개했다. 두 남매는 “충무공 산소가 경매될 지경에 빠졌다고 어른들이 동아일보 보시면서 퍽 걱정을 하시기에 그러면 내 저금통을 가져갈까요? 하고 아버지께 여쭈었더니 그러라고 하시기에 가져 왔습니다”라고 했다.모금 9일째인 5월 24일 모인 성금은 총 2819원 15전. 이충무공 후손들이 갚아야 할 채무액을 넘어섰다. 1938년 9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당시 부동산 가격이 치솟아 한 채당 300~400원 하던 서울 기와집 가격이 600원까지 치솟았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서울 기와집 가격을 400원이라고 가정하면 총 성금액은 서울 기와집 70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거액이었다.
하루 전인 5월 23일엔 윤치호, 정인보, 한용운 등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결성했다. 유적보존회는 1931년 6월 8일 현충사를 재건(중건)하기로 결의했다. 닷새 뒤인 6월 13일 채무(2372원 22전)를 변제하고 위토의 저당권 설정을 해제해 위토 문서를 되찾았다. 이어 유적보전회는 6월 18일 한산도의 이충무공 사당인 제승당(制勝堂)을 중수하기로 결의했다.
민족성금운동은 이런 과정을 거쳐 전국적인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으로 확산됐다. 이충무공유적보존회는 1931년 7월 현충사 중건 사업에 착수했다. 1년 동안의 공사를 거쳐 1932년 6월 5일 현충사 낙성식과 이충무공 영정 봉안식을 함께 거행했다. 현충사 낙성식엔 전국에서 3만여 명이 몰릴 정도로 대성황이었다. 성금 모금운동은 현충사 낙성식이 열린 1932년 6월 5일 마무리됐다. 국내와 해외에서 2만여 명과 400여 단체가 참여했고 최종 모금액은 1만6021원 30전이었다.
문화재가 된 편지 1000여 통
충무공 묘소를 지키기 위해 경성(서울)에 사는 황영소(13세·수송공립보통학교 5년) 황영희(6세·중앙유치원) 남매가 보낸 편지.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편지를 보면, 성금 참여자는 각계각층을 망라한다. 유치원생,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야학교의 학생, 제국대학과 전문학교 학생, 각종 학교의 교원, 운수 종사원, 부두 노동자, 어물(魚物) 행상원, 극장 직원, 제사(製絲)공장 여공, 고무공장 직공, 철공소 직원, 인쇄소 직공, 세브란스병원 직원, 토기 상인, 권번의 기생, 여관 보이(점원), 금주단연회(禁酒斷煙會) 회원, 일본의 탄광 노동자, 중국의 국숫집 직원, 주류회사의 일가족 28명, 어린 남매 등등. 미국의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 멕시코의 멕시코시티, 일본의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와카야마(和歌山) 후쿠이(福井) 시노모세키(下關) 후쿠오카(福岡) 고베(神戶), 중국의 단둥(丹東) 랴오닝(遼寧) 룽징(龍井) 옌벤(延邊) 등 해외 곳곳의 동포들도 성금운동에 참여하고 편지를 보냈다. 어떤 어린이들은 학용품 값을 아끼거나 저금통을 깼고, 어떤 학생들은 송충이를 잡아 번 돈을 모았으며 누군가는 굶어가면서 노동 품삯을 아꼈고 누군가는 담배를 끊고 돈을 모았다.
원통함과 비분강개, 뼈저린 자성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산정리에 자리 잡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 [동아DB]
“저는 어려서 아버지, 어머니와 영원한 나라로 작별하고 할 수 없이 이리저리 몸을 굴려 다니다가 지금은 여관보이 생활을 하는 아이입니다. 하루는 여러 손님들이 귀보를 읽으시면서 이충무공의 묘소 문제에 대해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는데, 충무공의 영혼이 이 미천한 제 가슴에까지 자극을 주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마 돈 많으시고 큰 집에 살고 있는 여러분의 가슴에도 충무공의 영혼의 에너지가 감읍이 되겠지요. 저는 차마 견딜 수가 없어서 가방을 털어보니 금 30전이 있어 보내니 태산을 일으킴에 한 줌의 흙이라도 보태어 이충무공의 묘소를 우리의 먼 장래까지 전해주시옵소서. -박천읍내 동아여관 보이 유화성 올림”
“이천만 동포 머릿속에 계신 충무공의 하늘 같은 은혜는 머릿속에 새겼는데 몇 백년 된 오늘에 잊어버리겠습니까. 다시 위세를 벗어난 백의동포는 시들어 말라가는 모질고 악스러운 목소리로 멀리 떨어진 거북선 시대를 앙앙하게 부르짖을 따름입니다. 더욱이 공의 묘소 문제를 들은 백의의 피를 이은 우리 동포는 핏줄에 떨리는 애통에 때를 당한 설움과 통탄한 눈물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세파에 시달리는 잔약한 몸은 1원의 여유도 없어서 50전의 핏 돈으로 백의동포의 핏줄을 잇고자 하며 공의 하늘 같은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까 감히 바랍니다. 공의 신령이시여 핏줄에 딸린 이천만의 백의동포가 흑암에서 방황하고 고해에서 애원하는 소리가 보이지 아니하고 들리지도 아니하십니까. 당대에 위엄스러운 거북선은 어찌 지금은 이름이 없습니까. 동서양 바다 사이에서 기울어가는 흰 돗을 단 배는 거북선 오기만 고대합니다. -아산군 둔포 독자 김동섭”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성금 편지에는 비분강개, 원통한 심정이 두드러진다.
“이번에 꿈에도 잊지 못할 이충무공의 묘소 문제를 읽고 통곡하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하기를 조선 사람들이여, 피눈물을 많이 흘려야 합니다. 흘려서 그 묘소를 깨끗하게 씻긴 후에 진실로 완전한 묘소가 될 줄로 믿습니다.”(경남 남해군 남해면 북변동의 고학준)
“우리 피 끓는 동포로서 육체가 분쇄되기 전에는 백의민족의 생령이 되시는 우리 충무공 영묘만은 우리가 찾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경성의 동우친목회)
비분강개와 원통, 충격의 심정은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이충무공의 묘소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였다.
“오늘에 이르러 그 묘소까지 담보 잡히는 지경에 처하였다 함은 실로 전민족의 죄요 수치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황해 평산의 한포엡윗소년회) “이천만 동포의 생명을 구하는 데 몸을 희생하신 거룩하신 어른의 묘소 하나를 지키지 못하고 경매 딱지가 붙게 한 우리들의 죄악은 무엇이라 말할까요? 먼저 외국인이 이 사건을 알 때 조선 사람을 얼마나 애국심이 없고 뜨거운 피가 없고 뼈 없는 썩은 송장으로 알겠습니까?”(피 끓는 사람)
그래도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으면 묘소와 위토를 되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많이 보인다.
“어찌 하더라도 거북선 어른을 구할 수 없을까요? 그까짓 채무 같은 것을”(도쿄의 고학생),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했으니 우리 민족이 1원씩이라도 보태면 그까짓 3천원은 금방 상환할 것”(평남 강동의 최정조), “충무공 묘지 채무쯤은 3000명이 1원씩만 지출해도 상환될 것”(경기 개성의 허완 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 있는 고택. 이순신 장군이 무과 급제 전 머물던 집이라고 한다. [동아DB]
망국민에겐 심적 구원이던 충무공
이충무공 묘소와 위토를 민족의 유산으로 인식해 공동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묘소와 위토를 저당에서 해제한 뒤엔 덕수 이씨 문중이 관리할 것이 아니라 공공에서 관리하자는 제안이 대표적이다.“1만 명만 응해도 그들 사손(嗣孫)에게 위탁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영원히 보존하도록 설계할 수도 있을 줄 압니다.” (경기 개성의 허완 외) “함께 노력해서 민족의 수치가 되는 이 채무를 하루 빨리 삭감시키고 이 사회에 영구히 충무공을 봉안하며 그 유물을 완전히 보존할 방법을 강구하는 운동에 있을 뿐입니다.”(경남 마산의 민영호) “일시적 경매 문제만 해결하지 않고 충무공의 묘소, 사당, 위토, 비각, 유물 등을 영구 완전하게 보관할 기본대책을 수립해야 할 것으로 확신하는바…”(경남 부산의 이충무공보은회원 일동)
성금 편지엔 이충무공의 유물・유적에 대한 관심도 자주 드러났다. 이충무공뿐만 아니라 역사적 인물의 유물과 유적을 사회가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도 나타났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시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충무공의 묘소와 위토를 되찾기 위해 시작된 민족성금운동이 현충사 중건,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이러한 인식이 깔려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서 소개한 한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공의 신령이시여 핏줄에 딸린 이천만의 백의동포가 흑암에서 방황하고 고해에서 애원하는 소리가 보이지 아니하고 들리지도 아니하십니까. 당대에 위엄스러운 거북선은 어찌 지금은 이름이 없습니까. 동서양 바다 사이에서 기울어가는 흰 돛을 단 배는 거북선 오기만 고대합니다.” 흰 돛단배는 어둠에 갇혀 있는 조선과 조선인(백의동포)을 상징한다. 거북선(이충무공)은 현재의 어둠을 뚫고 돛단배를 구해줄 희망의 구세주다. 이렇게 당시 사람들은 이충무공을 구원의 존재로 받아들였다.
영화 ‘노량’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충무공의 상여가 노량 바닷가를 지난다. 이충무공은 떠났으나 백성들은 그를 보낼 수 없었다. 1931~1932년 성금을 내고 편지를 보낸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이순신의 묘소와 위토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된 식민지 조선의 현실. 장삼이사(張三李四) 보통 사람들은 뼈저린 죄책감으로 성금을 보내고 편지를 썼다.
이충무공의 흔적은 곳곳에 있다. 국보 ‘난중일기’, 국보 이순신 장검 같은 유물도 남아 있다. 하지만 1000여 통의 편지는 또 다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편지에 가득한 1930년대 조선 백성의 순수함과 절절함. 이보다 더한 감동이 어디 있을까.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前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