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황묘(城隍廟)는 도교 사원이지만, 그 안에 재신전(財神殿)이 있어 돈벌이를 기원하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어느 경영학 교수가 TV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그후 광고 카피로 활용돼 화제가 되더니 어느새 가까운 사람들끼리 부담없이 주고받는 인사말이 됐다. 이 대목에서 굳이 ‘부담없이’라는 말을 쓴 것은 과거 부자나 돈에 대한 우리 관념이 이중적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누구나 돈을 좋아한다. 하지만 청빈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사회다 보니 돈이 많다는 사실이 자칫 고결함을 훼손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인지는 몰라도 ‘나 부자요’라거나 ‘부자 되세요’란 말을 대놓고 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돈이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면 그럴 필요가 없을 법도 한데, 우리 사회에는 겉으로는 싫은 체, 고결한 체하면서도 뒤로는 돈을 챙기는 사람이 많았다. 이게 바로 돈에 대한 이중적 태도다.
돈 그 자체는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문제가 된다면 돈을 버는 방법과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것일 텐데, 그것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
돈은 그냥 벌리지 않는다. 상당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네 삶은 돈이라는 바퀴가 있어야만 굴러갈 수 있는 것이다. 돈이 귀한 줄 알아야 삶 또한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사회에 ‘부∼자 되세요’란 인사말이 통용되기 10여 년 전에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12억 중국 인민들을 향해 “부자가 되는 것이 영광”이라고 부르짖었다. 천안문 사건의 후유증이 채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소련마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1992년 초 한 달여 동안 중국 남부지역을 시찰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였다.
앞에서 인용한 말은 덩샤오핑이 그때 행한 ‘남순강화(南巡講話)’의 일부로, 거기에는 앞으로 10년 내에 중국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적어도 ‘샤오캉(小康·중류수준)’에 도달하게끔 하겠다는 공언도 포함됐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저 유명한 흑묘백묘론을 주창한 덩샤오핑은 실용주의의 선봉자였다.
‘돈 많이 벌라’가 최고의 덕담
따지고 보면 중국인들만큼 실용적이고, 그래서 돈을 밝히는 민족은 달리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상인종(商人種)’이란 말까지 듣겠는가. 사정이 이런데도 덩샤오핑의 ‘부자 예찬론’은 대서특필됐다. 그가 중국의 최고지도자였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면 분명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중국 대륙은 1949년 공산당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 결과 시장경제는 무시되고 경제구조는 필요에 따른 평균 배분방식으로 전환됐다. 돈을 삶의 최고 가치로 삼던 중국인들은 졸지에 돈 벌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것이 가져다준 것은 궁핍뿐이라 참기 어려웠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이같은 모순을 감추고자 홍위병을 동원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백성의 배를 불리기보다는 이념을 앞세워 상인을 소인배라 멸시하며 허기지게 만들었으니 그는 중국 역사의 이단자였다. 일찍이 중국 역사에 이런 지도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그와 달랐다. 마오쩌둥에 의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중국인들의 삶에 새로운 기운을 북돋우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스스로 “부자 되세요”라고 외쳤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와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신중국의 총(總) 설계사’ 덩샤오핑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중국인들은 오랜만에 상인종의 DNA를 되찾게 됐다.
중국인들은 돈 버는 것을 ‘파차이(發財)’라고 한다. 그래서 ‘궁시파차이(恭禧發財)’, 즉 돈 많이 벌라는 말은 정초에 나누는 최고의 덕담이기도 하다.
정월 초하루는 섣달 그믐날(음력 12월30일) 자정이 지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준비는 그보다 훨씬 일찍부터 이뤄진다. 그 중의 하나가 귀성이다. 일자리를 찾아, 혹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도 이때만은 부모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그들에게 집은 모든 것의 출발점인 만큼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각오와 소망으로 신년을 맞는 곳은 고향의 집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