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히 북한이 2002년 이후 2월10일 핵 보유 선언으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쏟아져 나온 바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를 통해 ‘몸값’을 올려 미국과 협상하면서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와 함께 협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파키스탄처럼 핵 보유국의 지위를 굳건히 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억제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4월29일 서울 삼청동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열린 ‘33차 통일전략포럼’에서 주목할 만한 견해가 제기됐다. 이날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연세대 김용호 교수(국제정치학)가 “북한의 3세대 권력승계와 최근의 북핵 문제는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 이러한 견해는 그간의 분석이 국제관계, 혹은 억제이론 같은 군사적 시각에서 나온 것임에 견주어, 북한 내부사정을 통해 접근한 것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김 교수는 그동안 북한이 극단적인 대외강경 노선을 걸으며 긴장을 고조시키던 시점은 모두 권력승계와 관련해 중대한 변화가 있던 때라고 분석했다. 1960년대 말 발생한 푸에블로호 납북사건과 1·21 청와대 습격사건은 김정일 위원장으로 2세대 권력승계가 처음 준비되던 시기에 발생했으며, 1990년대 초의 1차 북핵 위기는 그의 권력승계가 마무리되던 시점에 불거졌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와 관련해 “내부적으로 새로 등장하는 지도자의 지도력을 확보하고 체제를 결집시켜 비토 세력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이 같은 강경 분위기를 조성한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2002년 가을 시작된 2차 북핵 위기와 이후 계속되는 초강경 노선 또한 김정일 이후 3대 권력승계 문제와 연관이 있는 것 아닌가 주목된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접근해보면, 북한이 결국 핵실험을 감행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는 이른바 ‘협상용 카드’론과는 사뭇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실제로 초강경 노선이 3대 권력승계와 연계되어 있다면, 핵 능력의 과시가 군부에 후계자의 지도력을 입증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핵실험 감행 가능성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 교수가 이날 세미나에서 공개 배포한 발제문과 30여 분간 진행된 모두발언 내용 가운데 관련 부분을 소개한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본래의 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쉽게 풀어 정리했음을 밝혀둔다.
북한의 권력승계와 핵 문제의 분석
북한의 권력승계 문제를 논의하면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이를 흔히 생각하듯 권력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실질적으로 넘어가는 인수인계 같은 ‘현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권력승계는 하나의 ‘과정’이다. 대기업이 총수가 건재함에도 2세에게 주식을 증여하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것은 이들 기업이 승계 ‘과정’에 있다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김일성에게서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는 30년 가까이 진행된 하나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 중에 김일성 사후의 과정은 4년에 불과하다. 김정일이 중앙정치 무대에서 사실상의 후계자로서 공식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은 1974년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면서지만, 북한을 연구하는 전문가라면 누구나 사실상 1972년, 멀리는 1960년대 후반부터 물밑에서 권력승계 준비작업이 진행되어 왔음을 잘 알고 있다. 북한에 대한 개론서는 대부분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김정일이 당 선전선동부와 조직지도부 부장이라는 두 자리의 핵심 포스트를 차지하면서 북한정치를 움직이는 당을 장악한 것이 1972년이다. 1972년은 1912년생인 김일성이 환갑을 맞는 해였다. 그런가 하면 그해 중국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 린뱌오(林彪)가 옛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