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동차 연료비와 대중교통 요금이 비싼 영국 사람들은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게 습관이 돼 있다.
글래스고와 한국을 잇는 직항노선이 없어서 우리는 네덜란드항공 소속 비행기를 타고 일단 암스테르담의 스키폴공항으로 가, 거기서 다시 인천공항행 비행기를 탔다. 갈아타는 시간까지 합하면 장장 열여섯 시간에 달하는 긴 비행이었다. 쉴 새 없이 보채고 싸우는 아이들을 달래며 지루한 비행 끝에 도착한 인천공항의 공기는 숨이 턱 막히도록 더웠다. 그 속에서 영국과는 다른, 낯익고도 익숙한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아, 드디어 한국에 돌아왔다. 1년 동안 영국에서 보낸 수많은 날이 마치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엄마, 한국 사람들 되게 많다! 봐봐, 한국말로 방송도 나와!”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치자 단체관광을 다녀오신 아줌마 승객들이 우리 가족을 힐끔거렸다. 인천공항이니 우리말 방송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지난 1년간 엄마말고는 한국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던 아이들에겐 그마저 신기하게 느껴졌나보다.
내 집으로 돌아가는 두려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다지 한국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내 집과 내 고향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너무도 그리웠기 때문에 도리어 오고 싶지가 않았다.
1년의 시간 동안 나와 아이들은 힘들게, 정말로 힘들게 낯선 생활에 적응해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스산한 북구(北歐)의 도시에 뿌리내리고 사는 과정은 말 그대로 ‘고군분투’였다. 그리고 거의 1년간의 고군분투 끝에 우리 세 식구는 그럭저럭 글래스고를 ‘우리 동네’라고 여기면서 살게끔 된 것이다.
그런데 가까스로 영국 생활에 적응한 이 시점에 한국에 돌아가면 우리 가족은 영국에서 익힌 삶의 방식을 금세 잊어버릴 게 분명했다. 너무도 편안한 아파트 생활과 익숙한 주위 여건, 은행이든 식당이든 약국이든 편하게 말이 통하고 텔레비전을 켜면 기다렸다는 듯 우리말이 쏟아져 나오는 환경에 몸을 담그면 어렵사리 적응한 ‘글래스고식 삶의 방식’을 다 잊어버리게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두 달간의 필드워크를 끝내고 다시 글래스고로 돌아가면 우리 가족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또다시 힘겨운 ‘타향살이’를 시작하게 될 터였다.
나는 그 과정이 몹시 두려웠다. 이제 거의 잊어가고 있는 ‘내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것, 그리고 잊고 있던 내 집의 안락함에 다시금 몸을 맡기게 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내 영어 선생님이자 친구인 캐시는 “한국에 가면 아이들보다 네가 먼저 영어 쓰는 방식을 잊어버릴 걸?” 하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