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 살 때 일본으로 건너와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간신히 연명했다. 병명도 모른 채 죽어간 아버지와 형, 잡역부를 전전하던 어머니, ‘람보’가 돼야 했던 자신…. 하지만 넝마 속에 버려진 책은 그의 인생을 밝히는 등불이 됐다. 가난한 식민지 문학소년은 재일 한국인 문학의 제1인자, 나아가 일본의 대문호로 성장했다. 그가 정식으로 학교를 다닌 기간은 6년에 불과했다.
“1919년 한국 경상남도 창원 출생. 1997년 사망. 열 살 때 일본에 건너와 야학, 고학을 거쳐 일본대학 예술과를 졸업. 정식으로 학교에 다닌 기간은 통산 6년. 대학입시에서 학력 자격이 미달해 사촌형의 성적표를 떼어다 변조해 들어갔다.
가정이 빈한해 넝마주이, 건전지공장 공원, 토목공사장 인부, 부두노동자, 목욕탕 심부름꾼, 가내공장 입주공원, 공사장 토사운반차 밀기, 영화관의 영사기사 등을 하면서 문학을 향한 꿈을 키웠다. 독학에 필요한 책과 자료는 거의 다 넝마업자에게서 얻은 것이다.
재일교포 사회의 잡지 ‘민주조선’의 편집과 창작을 통해 민족운동에 참가. 1948년 장편소설 ‘후예의 거리’를 발표. 이후 대표작 ‘현해탄’ ‘태백산맥’을 쓰고, 소설 ‘고국 사람’ ‘박달(朴達)의 재판’ ‘밀항자’를 발표했다. 민족문학 문화운동에 관한 평론도 집필, 재일 한국인 문학의 제1인자로 떠올랐다.
그는 한국 문화와 역사를 일본에 소개하는 고대사 연구가이기도 하다. 일본 각지에 남은 한국 문화 이입의 흔적을 찾아 취재 기록한 ‘일본 속의 한국문화’가 있다. 그는 한일 고대사와 문화교류사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고대 한일관계사 입문’ ‘일본 고대사와 한국문화’ ‘나의 아리랑 노래’ 같은 작품이 있다.”
김달수는 1919년 11월 경상남도 창원군 내서면 호계리 구미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병규, 어머니 손복남 사이에서 태어난 4남매 중 셋째아들. 위로 여섯 살 많은 성수, 두 살 많은 양수, 그리고 여동생 면수가 있었다.
중농의 아버지는 큰아들 성수를 4km 떨어진 내서면 공립보통학교에 보내고 양수와 달수는 서당에 보냈다. 당시 농촌 형편에 보통학교 학비는 꽤나 부담스러웠다. 구미동에서 보통학교에 다닌 건 성수와 또 다른 한 명, 둘뿐이었다.
“하늘 천(天) 따 지(地) 검을 현(玄) 누루 황(黃) 집 우(宇) 집 주(宙) 넓을 홍(洪) 거칠 황(荒)….”
달수가 네 살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천자문의 첫머리다.
병명도 모른 채 죽어간 父子
서른 살의 아버지는 한량이었다. 마산의 기생집에서 주색잡기로 소일했다. 전답을 날려가면서 유흥삼매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10년 한일강제합방이 되자 나라 잃은 청년이 미래를 자포자기했던 것이었을까.
1925년 아버지가 가산을 완전히 탕진해 집마저 차압당해 빼앗기게 됐다. 패가망신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성수, 누이동생 면수를 데리고 사촌이 먼저 이주해 살던 일본으로 향했다.
달수와 양수는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빈손으로 가는 일본행이라 식구를 줄이는 것이 안전했다. 할머니가 고향을 지키며, 두 손자를 데리고 먹여 살리는 책임을 졌던 것이다. 그러나 양수는 빈궁한 살림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영양실조나 폐결핵으로 추정되지만, 의사를 찾아가 진찰받을 돈이 없었다. 달수는 형이 병명조차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 헤어진 3년 뒤인 1928년 아버지도 도쿄에서 사망했다. 객지의 토목공사장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다 병이 들었으나 의사를 찾아볼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도 병명조차 알지 못한 채 비참하게 세상을 떴다. 친척이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와 고향 선산에 묻었다. 돈이 없어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아버지였다.
1930년 열 살이 되던 해, 달수는 일시 귀국한 형 성수를 따라 도쿄로 향했다.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下關)까지 가고 거기서 기차로 도쿄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관부연락선에서부터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 일본사람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유롭게 타고 내렸다. 하지만 같은 ‘일본 국민’이라고는 해도 한국인은 경찰이 발부하는 ‘도항증명서’ 혹은 ‘일시 귀국증명서’가 없으면 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증명서가 있어도 한국인에게는 여러 가지 조사 절차가 따라붙어 일본인이 모두 승선한 뒤에야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열여섯 살이던 성수는 일본에서 도항증명서를 끊어 귀향한 터였다. 그러나 성수는 동생 달수의 도항증은 생각조차 안했던 모양이다. 열 살 소년이 도항증명서 없이는 연락선을 탈 수 없을 줄이야. 그래서 마산을 떠나 부산에 도착한 형제는 경찰의 제지로 배조차 탈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달수 몫의 도항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다. 도항증이 나오자 이번에는 여비가 떨어졌다. 형제는 도쿄의 어머니에게 돈을 부쳐달라고 전보를 쳤다. 며칠이 걸렸는지 모른다. 가난한 어머니가 도쿄서 보내 준 여비는 딱 연락선 승선료와 교통비 정도였다.
도쿄로 가는 이틀 동안 형 성수는 달수에게 도시락 한 개를 사주고 자신은 밀감 한 개로 여섯 끼니를 때웠다. 그래도 달수는 어머니를 만난다는 기대, 낯선 이국의 화려한 도시 도쿄로 간다는 기분에 들떠 배고픈 줄도 몰랐다. 그러는 사이에 도쿄의 시나가와(品川) 역에 도착했다. 배로 하루, 기차로 하루 해서 이틀이 걸린 고단한 여정이었다.
어머니의 하얀 치마저고리
“아이고, 달수야!”
어머니는 울부짖으며 그를 맞았다. 참으로 사연 많은 이별의 세월이었다. 헤어져 있던 5년 사이 아버지도 죽고, 작은형 양수도 죽었다. 모자는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가 사는 도쿄 집은 비좁았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성수, 달수, 면수 세 자녀의 생계를 하숙 치는 수입으로 꾸려갔다. 하숙생은 네 명이나 되고 모두 한국에서 온 기층민이었다. 하숙생들은 토끼장 같은 다락 공간에서 기식했다.
어머니는 처음, 그러니까 5년 전 도쿄에 도착해서는 친척 연줄로 나가노(長野)현의 제사(製絲)공장에서 여공으로 일했다. 여공이라고는 해도 말이 안 통해 그는 그저 잡역부 일을 하고 급료도 형편없이 적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유흥으로 지새던 젊은 날에는 상상도 못했던, 이역 땅 일본에서 토목공사 인부가 되어 일했다. 그러나 해보지 않은 일이라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루 일하면 이삼일을 쉬는 룸펜 노동자일 수밖에 없었다. 큰형 성수도 건전지공장에 견습공으로 나가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병으로 죽고 도쿄로 옮겨온 뒤, 그렇게 하숙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동포’ 하숙생 중 두 사람은 넝마주이였다. 망태를 짊어지고 길거리를 배회하며 고철, 빈 병, 종이 같은 폐품을 수집해 파는 ‘거지’가 직업이었다. 또 한 사람은 세탁물 수거원. 항상 하얀 와이셔츠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다니지만, 세탁물을 내놓으라고 외치고 그 수거량만큼 보수를 받는 이른바 ‘세탁소 외판원’이었다. 마지막 한 사람은 낫토(納豆·일본식 청국장. 메주를 띄운 발효식품)를 파는 행상이었다.
1929년 미국을 휩쓴 경제공황은 일본 경제에도 큰 타격을 안겼다. 실업자가 속출하고 ‘후케키(不景氣)’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억척으로 일했다. 하숙생에게 식사를 대기 위해 시나가와 일대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싼 음식재료를 모으고 멀리 근교까지 걸어가서 야채를 사왔다.
어머니는 한국 습관대로 하얀 치마와 저고리만 입고 다녔다. 그렇게 눈에 띄는 차림으로 장을 보러 다니면서, 꼭 달수를 데리고 갔다. 일본 사회에서 어색하기만 한 차림새 때문에 달수는 놀림 받기 일쑤였다.
“조∼센진! 어이, 조센진∼.”
달수 또래의 아이들이 그와 어머니에게 손가락질하며 야유하는 것이다. 달수는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어머니는 “괜찮다, 괜찮아” 하고 아들을 달래며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러면 일본 아이들은 원숭이처럼 볼을 우그리고 혀를 내밀며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마치 동물원의 애완동물을 놀리듯 했다. 어떤 녀석은 돌을 던지기도 했다.
“이놈의 자식들아!”
어머니는 날라온 돌을 주워 되던지며 아이들을 쫓았다.
한참 가다가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달수에게 말했다.
“달수야, 이런 일 있어도 너만은 도망치지 말고 내 곁에 있어다오. 네 형놈은 길에서 날 보면 모르는 사람 보는 듯한 낯빛으로 쳐다본다. 그러곤 도망치지. 너마저 그러면 난 더 못살아!”
불쌍한 어머니. 당시 성수는 열여섯으로 철이 들 만한 나이였다. 달수는 먼 훗날 작가가 되어 어머니의 가슴 미어지는 슬픔도, 형의 도망치는 심정도 모두 이해되는 것이라며 이렇게 적었다.
작가 김달수는 단 한번도 한국 이름을, 한국인임을 거부한 적이 없다.
“1976년 12월14일자 아사히신문 투고란에 김경득(金敬得)이라는 27세 청년이 ‘변호사로 인정해달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나 김경득은 일본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이다. 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최고재판소(대법원)로부터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는 한, 사법수습생으로 채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귀화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내 안의 ‘한국적인 것’을 거부해왔다. 한국말 배우는 것도 거부하고,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모르는 체 지나쳤다. 주위의 누군가가 내가 한국 핏줄인 것을 알까 두려웠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할 무렵 재일한국인인 내가 그렇게 희망하던 언론계에 취직하는 것이 99.9%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일본 사회의 차별을 피해 살려던 생각을 버리고, 나 자신에게 한국인임을 써붙이고 한국인으로 살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한국인 변호사’가 되어 한국인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설 것을 내 생애의 목표로 삼기로 했다. 그러려면 참된 의미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일본인으로 귀화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일본의 최고재판소가 나를 한국인 사법수습생으로 채용해서 나에게 한국민족과 일본과의 참된 이해와 우호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것을 간곡히 바란다.”
김경득은 결국 의지를 관철해 한국 국적을 가진 최초의 변호사가 되어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1970년대에도 재일동포는 이런 처지였다. 하물며 1930년대의 일본 사회에서랴. 김달수는 “부모를 보아도 남 보듯 달아나버리는 게 동포소년의 심리 아니겠느냐”고 형을 감싼다.
궁핍한 나날이 계속됐다. 어머니는 하숙생과 아이들의 숙식을 거드는 한편, 멀리 오이마치(大井町) 마고메(馬혺)까지 가서 지반 정지공사장의 한국 인부식당(함바·飯場)에서 품을 팔았다. 지금은 번화가가 된 지역이지만 당시는 논밭과 삼림이 우거진 교외였다. 도시화가 진행되고 택지가 늘어나면서 이곳도 거주지로 변했고, 그 택지 공사에 주로 빈민 노동층의 한국인들이 노동력을 팔았다. 어머니는 몇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인부들을 위한 취사나 세탁 일을 거들었다.
어머니의 ‘알바(아르바이트)’는 이것 말고도는 더 있었다. 여덟 살 난 달수의 누이 면수를 데리고 ‘들파기(하랏파호리)’하러 다녔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주택가 공터는 원래 쓰레기 매립지였다. 그래서 면수랑 둘이서 쇠꼬챙이로 그 속을 파헤치면 빈 병이나 깡통 쇳조각이 나오곤 했다. 어머니는 그것들을 캐내 팔아 돈을 만들었다.
성수는 오키나카시(?仲士)가 되어 일했다. 부두의 하역노동자다. 컨베이어 벨트도, 크레인도 드문 시절이라 오키나카시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중노동이었다. 그래서 “멸치가 생선이냐, 오키나카시가 인간이냐”는 말도 생겼다. 수입은 그런 대로 괜찮았지만 이 노동으로 어깨뼈가 뭉그러진 사람도 있다. 슬롯머신 제작으로 세계적인 부호의 반열에 오른 평화기업을 세운 재일동포 정모씨도 부두 하역노동자 출신이다. 그는 취재 기자에게 어깨 짐의 무게로 변형된 어깨뼈를 훈장처럼 보여주었다.
달수라고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한 형편에 미안해서라도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열 살의 달수도 낫토 장수와 넝마주이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어 한마디도 못하는 그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낫토, 낫토! 삼봉(三本), 주우센(十錢)(낫토가 세 꾸러미에 10전)!”
기본 어휘만 겨우 익히곤 거리로 나섰다. 낫토 장수는 10전 동전을 보여주며 손님한테 그것을 받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손님이 한 꾸러미만 달라고 하면 “고젠(5전)!”이라고 외치라고 했다. 처음에는 창피해서 소리가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달수는 들판에 가서 큰 소리로 연습한 뒤 낫토 상자를 등에 메고 거리로 나갔다.
낫토 장사는 달수가 세상 인심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부잣집 앞에서 마나님이 그를 부르고는 “세 꾸러미에 10엔인데, 한 꾸러미 5엔은 너무 비싸다. 3엔에 팔아라”고 깎기 일쑤였다. 그는 부자일수록 인색하게 구는 게 세상임을 알게 됐다.
낫토 장사는 아침저녁의 일거리였다. 낮에는 넝마주이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웠다. 제 키만한 넝마지게를 지고 다니며 빈 병, 빈 깡통을 주워 담았다.
이듬해 1931년에 인쇄공장의 도제 겸 심부름꾼으로 들어갔다. 입주해서 숙식을 제공받는 조건이었다. 10년 경력이 쌓이면 월급 1000엔이라는 좋은 조건이었다. 일본어 활자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고 주인의 말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달수는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어느 날, 형이 찾아와서는 “장래성 없는 일”이며 함께 집으로 가자고 해 그만뒀다. 형은 달수에게 학교(야학)에 다니라고 했다.
이후 달수는 시나가와 구립 오이(大井)심상야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수업은 읽기, 쓰기, 산술 세 과목뿐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낫토를 팔고 낮에는 넝마를 줍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나날이었다.
주먹 휘두르는 ‘람보(亂暴)’
1932년, 달수는 사촌이 주간(낮) 소학교에 다니는 것이 부러워 자신도 보통소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어머니를 졸랐다. 어머니는 빈궁한 형편이었지만 차마 아들의 꿈을 꺾지는 못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들어간 곳이 시나가와 구립 겐지마에(源氏前)소학교였다. 3학년에 편입했다.
이 학교에선 읽기, 쓰기, 산술에다 수신(도덕), 작문, 도화(그림), 수공(手工), 창가(음악)가 더 있어 공부가 어려워졌다. 무엇보다 야학교 학생은 한국 극빈노동자의 자녀가 대부분이었으나 이 정상 소학교는 일본 아이들의 학교였다. 아이들은 걸핏하면 “야, 조센진!” 하고 그를 놀렸다. 그때마다 달수는 주먹을 휘두르곤 해 ‘람보(亂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래도 공부는 뒤처지지 않았다. 집이래야 노동자 하숙생들과 함께 자고 일어나야 하므로 공부를 하려 해도 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책은 모두 학교의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몸만 오가며 공부했다. 그는 수업시간만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 들었다. 예습, 복습이 필요없을 정도로 수업에 몰두했다.
일본인 교사들도 달수를 귀여워했다. 아이들의 놀림과 차별은 있었어도, 제법 일본말도 익숙해지고 그림 솜씨가 좋아서 미술 시간에는 교사한테 칭찬도 받았다. ‘소년구락부’라는 잡지, 다치가와(立川)문고가 내는 책을 접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문학을 향한 꿈이 싹트기 시작했다.
역사 연구가가 된 이유
김달수는 작가가 되어 소설도 많이 썼지만 역사 연구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특히 고대 이래 한반도의 핏줄이 일본 열도에 어떻게 정착하고, 어떤 유적을 남겼는가에 관심을 기울였다. 20여 년간 일본 천지를 헤매고 현장을 답사하며 ‘일본 속의 한국문화’ 시리즈 12권을 펴냈다. 이 책들은 일본 최대의 출판사 고단샤(講談社)에서 간행했다.
고대의 한일 문화교류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소학교 5학년 국사(일본사) 시간에서 비롯된다. 일본사는 국정교과서 한 종류뿐이었는데 군국주의의 광기가 휩쓸던 시절이었으니 교과서도 국책에 맞추어 날조되어 있었다. 황당무계한 내용이 넘쳐흘렀다.
“황국 기원 860년(서기 200년) 중애(仲哀)천왕은 구마소(熊襲·지금의 규슈 사쓰마 지방)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것을 진압하기 위해 신공(神功)황후와 함께 규슈에 내려갔다. 그런데 도중에 중애 천황은 돌아가시고 만다.
이 무렵 한반도에는 신라, 백제, 고려의 삼한(三韓)이 있었다. 그 중에 신라가 일본과 가장 가깝고 세력도 강해 구마소와도 잘 통했다. 구마소의 반란도 배후에서 신라가 자극해서 일어난 것이다. 신공황후는 그래서 신라를 치기로 하고 병사를 이끌고 반도로 쳐들어갔다.
황후가 ‘신의 도움과 너희 병사들의 힘으로 신라를 복속시키려 한다’며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왕은 크게 놀라서 ‘동쪽의 일본이라는 신국(神國)에서 천황이라고 하는 존재가 오시는 것을 들었다. 그 군선(軍船)은 신병(神兵)들로 가득 차 있을 터인즉 어찌 막을 수가 있으랴’하면서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
신라왕은 ‘비록 태양이 서쪽에서 뜨는 일이 있더라도, 강물이 거꾸로 흐르는 한이 있어도 우리 신라는 결코 매년 공물(貢物)을 빠뜨리지 않고 바치리다’ 하고 맹세했다. 신공황후는 개선해 돌아왔고 그후 백제도 고려도 우리나라에 복속하게 됐다.
조선 정벌 성공과 더불어 규슈의 구마소도 자연히 진압됐다. 그후 백제로부터 왕인(王仁)이라는 학자가 와서 학문을 전하고, 반도로부터 베짜기(織機) 야금(鍛冶) 기술자가 속속 건너와 일본의 세력은 해외에까지 떨치고, 점점 나라가 열리게 됐다.”
연대기로도 서기 200년은 터무니없는 소리려니와, 삼한은 마한·진한·변한이고, 고려는 고구려의 오기(誤記)다. 반도 정벌에 성공해서 한자와 학문, 방직 야금 기술이 들어왔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물론 소학교 5학년의 달수가 고대 역사 기술의 진위를 소상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나중에 술회했다.
“나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교과서에 백제의 왕인이 천자문 한자를 가져온 뒤부터 일본에 문자가 생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삼한정벌 같은 역사는 문자가 없는데 어떻게 기록으로 전해질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선생도 당황하면서 자신 없는 말투로 ‘그거야 구전(口傳)으로 전해와서 후대가 알게 된 것이겠지’라고 했다. 그러나 그 답변에 만족하지 못한 나는 커서도 의문을 씻지 못해 한일 고대사에 매달리게 되었다.”
김달수는 한국 문화와 역사를 일본에 소개하는 고대사 연구가이기도 했다. 특히 한일 고대사와 문화교류사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그의 저서들.
일본 아이들은 달수를 향해 그렇게 놀렸다. 과거에 “야, 조센진!” 하던 것을 발전시킨 야유였다. 하지만 교과서에 나오고 교실에서 공식으로 가르친 역사이므로 달수는 달리 변명할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이 놀림인 것만은 분명하므로 운동장 끝까지라도 쫓아가 패줬을 뿐이다. 그래서 달수는 ‘람보’와 ‘삼한정벌’이라는 두 개의 별명을 얻게 됐다.
일본사에 대한 반감 때문에 역사 시간에 교사한테 혼난 적도 있다. 교과서에는 천황과 황후가 백성을 굽어보는 삽화가 실려 있었다. 교사가 물었다.
“자, 천황의 뒤쪽에 서 있는 분은? 아는 사람?”
그러자 다들 손을 들었고 달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사는 달수를 지명했다. 기세 좋게 일어섰으나 갑자기 황후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누라입니다(오카미상데스).”
교실은 경악으로 수라장이 되고 교사는 그를 크게 꾸짖었다. 천황에 대한 우상화, 신성화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라 불경죄치고도 대단한 죄를 지은 것이었다.
‘귀화인’을 ‘도래인’으로
이런 쓰라린 경험을 한 김달수는 고대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집요하게 캐들어갔다. 그 결과 일본 책의 ‘귀화인(歸化人)’이라는 단어를 ‘도래인(渡來人)’으로 바꾸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귀화란 일본을 문화 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놓고 거기 순응해 한반도 사람이 머리 숙이고 들어갔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도래인은 그것을 객관화하고 가치중립화한 단어다.
예를 들면 역사학자 이시모 다쇼우(石母田正)는 저서 ‘일본고대국가론’의 개정판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구고(舊稿) 중에 정정한 게 있는데, 특히 김달수씨의 제언에 따라 귀화인을 도래인으로 고친 것이 한 예다.’
생활은 여전히 빈궁했다. 어머니는 달수와 성수 형제를 도쿄에 두고, 누이동생 면수만 데리고 군항(軍港) 요코스카(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출신 지역)로 이사해 살았다. 거기서 항만매립 축대공사에 동원된 한국인 인부들을 상대로 밥을 짓고 한국 막걸리를 빚어 팔며 생계를 꾸렸다. 밀주 제조는 법으로 금지돼 있어 어머니는 수시로 경찰서에 잡혀갔다.
달수의 성적은 50명 가운데 3∼4등이었다. 그러나 중학 진학은 기대할 수 없었다. 진학하는 아이는 1할이 안 되는 서너 명뿐이었다. 그 중 1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달수보다 성적이 낮았다. 달수는 서러웠다.
설상가상으로 형 성수가 실업자가 됐다. 마고메의 정지(整地) 공사장에서 날품팔이 노동을 하다 공사 자체가 완공되어 일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토목인부들 사이에는 처량한 푸념이 떠돌았다.
‘토목공 죽이는 데 칼 같은 건 필요없네. 비만 이삼일 내리면 다 죽어 버리니까.’
하루살이 인생. 비가 내리면 일을 못하니까, 목에 풀칠도 못하고 굶어 죽고 만다는 넋두리. 그 대부분이 한국에서 온 부평초 같은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달수는 진학도 못하는 판에 소학교 졸업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건전지 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했다. 공장이래야 대여섯 명이 일하는 가내공장 같은 데였다. 탄소와 아연 염화암모늄으로 만드는 단순 전지공장이었다.
그래도 하루 1엔을 받는 자랑스러운 ‘공장진(工場人)’이 된 것이다. 어머니는 ‘공장’을 그대로 한국 발음으로 부르고 사람 ‘인’의 일본식 발음 ‘진(人)’을 붙여 그를 ‘공장진’이라고 부르며 좋아했다. 그러나 이 일도 원인 모를 병에 걸려 몸져눕는 바람에 오래 하지 못했다. 병원 갈 형편도 못돼 두어 달 집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그동안 형이 갖다 준 ‘로빈슨 크루소 표류기’를 읽고 거기에 빠졌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으며 무인도에 표착한 로빈슨 크루소와 달수 자신을 번갈아 생각해봤다. 구원의 손길이 없는 맨주먹 생활이, 작품 속 주인공과 자신의 처지가 어쩌면 그리 비슷할까 싶었다.
로빈슨 크루소의 처지
몸이 웬만큼 회복되자 그는 어머니가 있는 요코스카 항구에 다시 나갔다. 항만 매립지공사의 토사 운반차 인부도 해보았다. 하지만 이 또한 15세 소년 달수에게는 중노동이었다. 10대도 넘는 운반차 행렬이 토사를 가득 싣고 내리막 레일을 내달릴 때 조금만 흐트러지면 차량 행렬이 헝클어져 뒤집히고 만다. 자칫 이런 실수라도 하게 되면 할당된 작업량을 해치워야 벌이가 되는 인부들은 “너 때문에 일 망쳤다. 손해만 보았다”며 욕설을 퍼붓고 구박했다.
달수는 다시 도쿄로 돌아와 조그만 가내공장에 입주했다. 철판에 구멍을 뚫는 기계 세 대가 있는 작은 공장이었다. 그런데 이 집의 사장인 50대 할머니는 끼니마다 생마늘을 여러 쪽 까먹는 독특한 식습관이 있었다. 아무리 마늘 양념을 곁들인 김치가 몸에 밴 달수라고 해도 그 집안의 기괴한 마늘 냄새는 참기 어려웠다. 게다가 빈대가 엄청 많았다. 밤잠을 설칠 정도로 많아 성냥개비로 빈대를 찔러 잡으면, 마늘과 빈대의 피 냄새가 진동했다. 머리가 터질듯이 아파오고 구토가 밀려왔다.
그래서 책방에서 일해보기로 하고 몇 날을 책방 앞에서 기웃거리고 다녔다. 이력서를 손에 쥐고. 어느 날 이치로라는 일본인 친구와 함께 가마타(蒲田)역 앞의 어떤 서점에 ‘점원 구함’이라는 광고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치로가 달수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중년의 서점주인인 듯한 사람이 “책방 일도 간단한 게 아니야!” 하더니 이력서를 훑어보았다.
“아, 조선인가? 조선 사람은 우리가 쓰지 않아.”
거절이었다. 달수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몸을 떨리는 것을 느꼈다. 책방을 나서면서 친구 이치로는 “칙쇼(畜生·일본의 욕설)!”를 외치며 길바닥의 돌을 몇 개나 걷어찼다. 달수는 그저 고개를 떨군 채 묵묵히 걸었을 뿐이다.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달수에게 전차비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늘 걸어다녔다. 한번은 시나가와역 앞을 지나가는데 순사(경찰관)가 불렀다. 가출소년으로 봤던 것 같다. 그런데 그가 한국 소년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태도가 돌변했다. 순사는 달수의 주머니에서, 소지품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데도 캐고 묻고 조사한다면서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뿐인가. 이유도 없이 뺨을 때리는 것이었다. 달수는 무섭고 두려워 눈물만 흘릴 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식민지 소년의 설움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 취직한 곳이 목욕탕이다. 리어카를 끌고 거리에서 땔감을 주어다 불을 지피고 탕의 물을 데우는 일이었다. 입주해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월급은 5엔이었다.
“센토(錢湯)라고 하는 동네 목욕탕에서 일하면서 놀라운 일본 문화를 접했다. 거기서 일하는 산스케(三助)라고 부르는 떼밀이 남자와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아이 서너 명이 있었는데, 하루 일과가 끝나면 남녀 한꺼번에 홀랑 벗고 같은 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 것이었다. 유교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온 나로서는 혼욕(混浴) 자체가 커다란 문화충격이었다. 여자 심부름꾼 아이들은 탕 속에 나를 불러들여서는, 복숭아 같은 예쁜 유방을 드러내놓고 알몸으로 춤을 춰 보이기도 하는 것이었다. 아찔한 경험이었다.”(김달수의 회고집 ‘차별 속을 살다’에서)
식민지 소년의 설움
목욕탕은 일본 순사들의 관음증(觀淫症)을 충족시키는 장소이기도 했다. 순사들은 범인이 욕탕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수시로 순시를 왔다. 목욕탕집 주인이 탕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 구멍(손님은 의식하지 못한다)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남탕은 관심이 없고 숫제 여탕만 들여다보았다. 때로는 동료 순사들까지 합쳐 두세 명이 몰려와 여탕을 감시(?)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소년에게는 성인 순사들의 묘한 짓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았다.
목욕탕 일을 한 지 한 달 남짓 됐을 때 형 성수가 찾아왔다. “이 따위 일로 허송세월이냐?”며 집으로 가자고 했다. 성수는 도쿄의 시바우라(芝浦)에서 짐을 옮기는 하역인부(오키나카시·?仲士)를 하고 있었다. 뾰족한 대책이 있어서 그의 목욕탕 일을 중지시킨 것은 아니었다. 달리 할일이 없어진 달수는 요코스카의 어머니에게 가서 일거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형이 도쿄에서 요코스카까지 갈 차비로 2엔을 주었다. 달수는 차비를 아끼기 위해 한번 걸어서 가보기로 했다. 어머니와 동생 면수, 그리고 의붓아버지(어머니는 한국인 노동자와 동거를 시작했다)에게 수박 한 통을 선물하기 위해 도쿄서부터 걸어서 가기로 한 것이다. 물론 전 구간은 아니고 요코하마의 나마무기(生麥)에서 스기타(衫田)까지는 7전짜리 전차를 타고 나머지는 걷는 여정이었다.
도쿄에서 가나자와핫케이(金澤八景)에 이르자 날이 저물었다. 달수는 끝까지 걸어서 수박 한 통을 사들고 어머니와 조우했다. 의붓아버지에게 ‘빈손’ 손님의 체면만은 면했으나 피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는 요코스카 도처를 걸어다니며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요코스카 전기관이라는 영화관에 영화기사 견습생을 구한다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즉각 이력서를 써서 찾아갔다. 서점에서처럼 “한국 출신은 안 돼”라고 거절당하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지배인은 선선히 받아주었다. 지배인은 그에게 ‘일본 이름’(이른바 通名)을 갖고 있지 않냐고 물었다. 달수는 가나야마 주타로(金山忠太郞)라는 통명을 댔다. 그것은 야학에 다니다 소학교로 옮길 무렵, 혹시 통명이 필요하다고 할 경우에 대비해 사촌형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만년의 김달수.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길바닥 쳐다보고 걸어다니는 게 낫다.”
그들은 차라리 길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우러 다니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다니기로 했다. 아침에 도시락을 싸서 나가면 밤 10시까지 근무했다.
영사기사, 변사, 밴드, 호객꾼
영사기사란 카본을 전기로 태워 스크린에 비추는 단순한 기술자였다. 그러나 극장이 영세하고 무성영화가 주종이던 시절이라, 달수는 변사(辯士)가 자리를 비우면 대본을 들고 읽는 변사 대역도 했고 때로는 음향효과를 넣는 밴드도 해야 했다.
더러는 영화를 선전하기 위해 거리에서 호객을 하거나 전단을 나눠주는 일도 했다. 일손이 모자라면 입장권을 팔고 입장권 점검도 하는 등 다역(多役)을 해야 했다. 하지만 월급은 한 달에 겨우 1엔씩 올라 석 달을 다녀도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한국 소년을 언젠가 정식 영사기사로 써준다는 보장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반년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1936년, 16세가 된 달수는 다시 넝마주이로 돌아갔다. 집 안팎에 한국인 노동자 출신의 넝마주이가 들끓었다. 요코스카 항만공사가 끝나자 매립 축대 쌓기를 하던 인부들은 생계가 끊겼다. 너도나도 호구지책으로 빈 병, 빈 캔, 쇳조각을 모아 팔러 나섰다. 거리에는 한국사람 넝마주이들이 ‘과당경쟁’이라 할 정도로 넘쳐흘렀다. 달수는 창피했다. 넝마 리어카를 끄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었다. 그래서 우라가쇼(浦賀町)의 한적한 주택가를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리어카를 세워놓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던 참이었다. 오버코트를 입은 중년 사내가 다가와 지나치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달수의 양손을 붙잡자마자 포승을 옭아맸다.
“주재소(파출소)로 가자!”
그 한마디뿐이었다. 이내 사복형사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주재소에 끌려가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시나가와역 앞 파출소에서 순사에게 혼났던 악몽이 떠올랐다.
이름과 주소를 묻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전화를 돌려 어딘가를 부르는 눈치였다. 아마도 상급 경찰서를 부르는 듯했다. 달수는 몸이 떨리는 것을 참아가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십니까. 예. 그럼 알겠습니다.”
어딘가와 통화가 끝나자 형사는 수갑을 풀어주었다.
“응, 이제 가도 좋아. 어린 놈이 넝마주이 같은 걸 하니까 그러지.”
그 뿐이었다. 달수는 뭐가 뭔지 내용을 알 길이 없는 데다 억울해서 멈칫거렸다. 그러나 항의할 용기도 없으려니와, 그런다고 사과할 리도 없었다. 어쨌든 도둑놈으로 오인된 넝마주이. 달수의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릴 뿐이었다. 한 편의 팬터마임 같은 촌극이었다. 달수는 억울함과 분노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넝마주이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넝마 속에서 책을 읽다
넝마주이는 천한 일이지만 헌 신문, 잡지, 책도 취급했다. ‘소년구락부’ ‘킹’ ‘일출’ 같은 소년 잡지는 그에게 좋은 교과서가 됐다. 날이라도 궂어 일을 못나가고 집에 박혀 있으면 다락방에서 책과 잡지를 읽었다. 공부도 되고 한편으로 즐거움도 주었다. 기쿠치칸(菊池寬)이나 구메마사오(久米正雄)의 통속소설을 읽은 것도 이 무렵이다. 한국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일본에 건너와 넝마주이가 된 서진태씨가 달수의 스승이 되어 독서 지도를 해줬다. 향학열에 불타던 달수는 야간중학교에 가고자 하는 꿈을 키워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