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초, 제약회사 세일즈맨으로 승승장구하던 청년이 맨손으로 호주에 왔다. 챙겨주는 이 없는 남의 나라에서 23년 만에 12개 알짜 기업을 일궜다. 한순간도 조국을 잊지 못한 사내는 1992년, ‘반쪽 조국’ 북한에 해외동포로는 처음으로 합영회사를 세웠다. 북한에 자본주의의 씨앗을 뿌린 그는 오늘도 “모국에 기여하는 것이야말로 동포 사업가의 사명”이라 설파한다.
지난 7월30일, 두 달 가까운 해외출장을 마치고 곧장 시드니 차세대 무역아카데미 세미나장으로 달려온 한 기업인이 강연의 대미를 ‘불굴의 의지’로 장식하고 있었다. 여느 강연회에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강연은 특별했다. 초청 강사가 호주 한인동포 사회를 대표하는 기업인이고, 그가 후배 기업인에게 전하는 생생한 체험담이어서 강연장의 분위기는 진지하고 뜨거웠다.
그는 북한이 서방에 문호를 꽁꽁 닫았던 시기에 북한에 진출, 해외동포로선 처음으로 평양시내에 사옥을 짓고 합영회사(북한 정무원과 서방회사의 조인트 벤처기업)를 창립한 사업가다. 북한에서 자본주의 기업이 어떻게 설립되고 운영되는지를 보여준 산 증인이기도 하다.
호주라는 낯선 나라, 그것도 한인동포가 많이 모여 사는 시드니나 멜버른이 아닌 서부호주 퍼스에서 23년 동안 12개의 사업체를 일궈낸 코스트 그룹(KOAST Group)의 천용수(53) 회장이 바로 그다.
7월30일 시드니 차세대 무역아카데미 세미나장에서 잠깐 만난 천용수 회장을 다시 인터뷰한 것은 두 달이 더 지난 10월2일이다. 그가 계속 해외에 머물러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는 해마다 200일 가까이 해외출장을 다닌다. 1996년엔 무려 285일 동안 호주 밖에서 지냈다. 비행기 티켓 요금만 한 해 평균 6만달러 넘게 들어가고, 입국사증 도장을 찍을 데가 없어서 여권을 새로 받아야 한다. 글자 그대로 ‘발로 뛰는 기업인’이다.
특히 그가 최근에 다녀온 해외출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1995년 8월 평양에 설립한 첫 합영회사인 삼흥코스트의 창립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북한 직원들과 함께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산업시찰을 했다.
9월7일부터 닷새간은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World Federation of Overseas Korean Traders Association· 이하 ‘OKTA’)가 주최한 제10차 해외한민족경제공동체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민 100주년을 맞이한 멕시코를 다녀왔다. 그는 OKTA 이사장이다.
그는 2004년 11월 제주도에서 열린 제13차 OKTA 세계총회에서 이사장에 선임돼 33개국, 56지회에 60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OKTA의 발전을 위해 뛰고 있다.
“노동은 휴식의 연장인데…”
해외출장에서 돌아온 천용수 회장의 전화를 받은 건 일요일(10월2일) 오전 10시쯤이었다. 그는 “오전 10시30분에 시작되는 시드니제일교회 예배에 참석할 예정이니 예배 후에 만나자”고 했다. 예배당엔 부인 공영희씨가 함께 있었다.
교회 앞뜰 벤치에 천 회장 부부와 자리를 잡고 앉아 다짜고짜 “휴일 오전에 만나자고 하는 건 결례 아닌가요? 더구나 이번 주는 호주의 노동절(10월3일) 연휴입니다. 휴식은 노동의 연장이라고 하는데…” 하고 따졌다. 천 회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아, 그랬군요. 미안합니다. 나한테는 노동이 휴식의 연장 같은데…”라고 대답했다.
두 남자의 어이없는 대화를 듣고 있던 공영희씨가 끼어들었다.
“저는 평생 일만 하는 남편 덕분에 진작부터 깨달은 진리인데, 윤 시인께선 아직도 그걸 모르셨군요.”
인터뷰를 위한 ‘기 싸움’은 그쯤에서 마무리해야 했다. 몇 달을 기다려 잠깐 만나고, 또다시 두 달을 기다렸다가 얻은 기회인데 입씨름으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그는 언론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한 시사월간지 기자는 서부호주 퍼스까지 그를 찾아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 적도 있다.
북한 ‘삼흥코스트 그룹’의 노동자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천용수 회장.
공연히 기 싸움하자고 그를 자극했다가 판을 깰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일요일 오전의 달콤한 휴식을 빼앗긴 화풀이로 천 회장에게 공격적인 잽을 날리듯 껄끄러운 질문부터 던졌다.
-주변을 탐문해봤더니 일밖에는 하실 줄 아는 게 없다면서요?
“사업하는 사람에게 그걸 흠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렇지만 조금은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내가 이래봬도 대학 시절엔 문학클럽 회장을 2년이나 맡았습니다. 물론 선배들이 내가 글을 못 쓴다고 포기하라면서 봉사나 열심히 하라고 시켜준 회장이지만… 허허.”
천 회장은 미술을 전공하던 아내를 그 문학클럽에서 만났다. 고교시절에 시를 써서 입상한 경력을 믿고 문학클럽의 문을 두드렸는데, 처음엔 시를 고쳐주면서 다그치던 선배들이 그를 이내 포기해버렸단다. 천 회장은 ‘일만 할 줄 안다’는 평가가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 이런 얘기도 덧붙였다.
“나는 노래도 아주 잘합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부르면 호주 친구들이 가수 출신이냐고 물어봅니다. 그건 그렇고, 무일푼으로 남의 나라에 온 사람이 그나마 일이라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어요. 사실 일만 하면서 한평생을 보내는 건 이민 1세대의 공동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청부살인 타깃이 되다
-1980년대 초에는 시드니에도 한국인이 거의 없었으니 퍼스는 말할 것도 없겠죠. 그런데도 그곳에 정착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부모님과 형제들이 먼저 그곳에 정착해 있었습니다. 나는 학사장교(ROTC)로 군복무를 마치고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근무하면서 잘나가는 바람에 이민이 늦어졌지요.”
부인 공영희씨가 말을 가로막았다. “난 그때부터 저이가 일만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구두를 사면 두 달 만에 밑창에 구멍이 났다고 한다. 신입사원 천용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업실적 덕분에 특진을 거듭했고, 입사 6개월 만에 일본으로 포상여행을 가기도 했다.
나중엔 입사동기들에게 미안해서 판매실적을 조정해야 하는 고민에 빠질 정도였다. 거래처에서 받아온 약품 주문서를 판매실적이 합산되는 월말을 피해 제출한 것. 그것도 여의치 않자 담당부장이 주5일 근무를 제안했다. “혹 TV 카메라에 찍힐지 모르니 야구장에만 가지 말고 하루를 쉬라”는 부장의 배려로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세일즈의 귀재’가 된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특별한 비결은 없었습니다. 정교한 판매전략을 수립하고 약속을 확실하게 지켰을 따름입니다. 남들은 내 장점으로 강한 설득력을 꼽는데, 그건 신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무엇보다 세일즈 자체를 즐겼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는 판매처의 신용을 얻기 위해 새로 나온 약품의 임상실험 대상이 되기를 자청했는데, 한번은 신약을 복용하고 나서 부작용이 나타나 큰일을 당할 뻔했다. 그런 저돌성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는지 모른다.
“좋게 말해서 일을 즐기는 거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제가 일만 하는 건 아닙니다. 기타를 연주하고 스킨스쿠버다이빙도 아주 좋아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듯 노래 부르기를 워낙 좋아해서 호주에서는 최초로 레이저 가라오케 기기를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호주로 이민 오니 어떻던가요.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1년 동안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지내던 어느 날 한국에서 근무하던 회사의 부장을 시드니에서 만났습니다. 그분이 회사로 복귀하라고 권유했는데 한순간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건 언제부터입니까.
“1988년 10월에 ‘아시안 십 서플라이(Asian Ship Supply)’란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서부호주의 여러 항구로 입항하는 화물선에 음식물을 공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이 입찰경쟁 방식이라서 내 체질에 딱 맞았습니다. 게다가 한국에서 익힌 세일즈 기법을 활용하니 백전 백승이었지요.”
-경쟁은 한국인끼리 했나요.
“아닙니다. 그 사업은 주로 이탈리아 계 이민자들이 했습니다. 다만 이탈리아 출신 사장 밑에 한국인 영업사원이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이 무척 고전했지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가 이탈리아 출신 갱단에 나를 죽여달라고 청부살인을 부탁할 정도였답니다. 언젠가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병문안을 갔더니 단체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는데 사진마다 내 머리 위에 점을 찍어놓았더군요.”
-선식(船食)사업이 만만치 않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화물선 에이전트들이 정보를 주지 않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항구에 나가서 배가 나타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고향 생각을 참 많이 했지요. 또한 주문받아서 납품하느라 장시간 트럭운전을 했는데, 그때 여러 가지 사업을 구상했습니다.”
-지금도 선식사업을 하고 있습니까.
“1996년에 매각했습니다. 그러나 선식 비즈니스에서 번 돈을 종잣돈 삼아서 오늘의 코스트 그룹을 일으켰으니 잊을 수가 없지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신문용지 수출 및 환경 관련 사업을 벌일 수 있었던 건 ‘아시안 십 서플라이’ 덕분이었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1990년대 초부터 대북(對北) 사업도 시작할 수 있었고요.”
총리 추천서 들고 북한으로
-대북사업을 시작한 동기가 있다면?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정부(이하 ‘서부호주 정부’)로부터 북한 관련 광산업을 하던 센추리 광산회사를 소개받은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1989년에 창업한 ‘그린 리사이클링 코퍼레이션(Green Recycling Co.)’이 서부호주 정부와 계약을 맺어 진행하는 사업이라서 정부 관계자들을 자주 만나야 했거든요.”
센추리 광산회사는 1980년대 초부터 북한에 진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사업 전망은 좋지만 북한이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호주 사람들로선 북한의 정서를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이런 점이 천용수 회장이 대북사업에 뛰어든 동기가 됐다는 대목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대북사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던 1992년 그는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36만 호주달러에 호주 광산회사로부터 모든 자료를 인수하고 북한으로 들어간 것. 그러나 그의 첫 방문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사전 정지작업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매사에 혈혈단신으로 부딪혀야 했다.
로렌스 당시 서부호주 총리가 김일성 주석 앞으로 써준 추천서가 그가 가진 전부였다. 로렌스 총리는 추천서에 “천용수 회장은 서부호주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계 기업인이다. 또한 서부호주정부 관련 사업을 포함한 여러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아주 모범적으로 기업을 경영하고 있어 적극 추천한다”고 썼다.
그런데 천 회장은 무엇보다 신변 안전을 염려했다. 군복무 시절, 누구보다 철저하게 반공교육을 받은 그인지라 북한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게다가 대북정보를 다루던 정보장교 출신인 그를 북한이 선뜻 받아줄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북한으로 떠나던 날, 부인 공씨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친정이 평안북도 벽동인 것도 남편의 외가가 함경남도 함흥인 사실도 왠지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당시 호주는 북한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터였다.
그러나 천 회장은 북한 당국자들에게서 기대 이상의 환대를 받았다. 그가 평양 근교의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북한을 떠나올 때까지 해외동포영접총국 직원들이 모든 일정을 잡아주고 친절하게 안내해줬다.
북한 당국은 “조총련을 제외하면 당신이 북한을 맨 처음 방문한 해외동포 사업가”라면서 “해외에서 기업을 세워 크게 일으킨 경험으로 북한에서도 크게 성공하기를 바란다. 적극 돕겠다”고 했다.
호주 광산회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던 ‘이해하기 힘든 북한 정서’는 없었다. 다만 하루빨리 북한 당국자들에게 신뢰를 심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것. 그는 사업을 빠르게 진척시켰다.
천 회장은 1992년 5월 북한을 첫 방문한 이래 그해 두 차례 더 북한을 방문했다. 6월에는 두 번째로 북한에 들어가서 코스트(KOAST) 평양사무소를 설립했다. 세 번째 방문 때는 북한 출신 지사장을 임명했으며 사옥 신축을 결심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첫 방북 후 1년4개월 만에 코스트 평양사무소 사옥을 완공했다. 북한 당국자들은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옥을 신속하게 완공한 것은 물론, 사옥 옆에 병원과 편의점을 지어서 기증했기 때문이다.
그는 북한에 공장을 지어 제조업에도 진출했다. 남한 기업의 옷을 임가공하는 회사를 만들어 북한의 우수한 노동력을 남한에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대우그룹이 독점하고 있던 북한산 아연괴(塊) 독점수출권을 따냈다.
거기까지는 천 회장에게 ‘북한 정서’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다.
북한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마그네사이트 광산이 있다. 광산을 답사하던 때, 북한 직원들과 호주 출신의 광산 전문가와 함께 찍은 사진.
13년에 걸친 천 회장의 대북사업에서 가장 획기적인 일은 1995년 8월 북한 내 독점사업인 폴리우레탄(스펀지) 제조공장, 삼흥코스트 합영회사를 창립한 것이다. 이 회사는 코스트 그룹과 북한 내각(정무원)이 공동으로 투자해 설립됐으며 1995년 11월 북한 정부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삼흥코스트 합영회사는 자본주의 방식으로 경영되는 북한 최초의 회사다. 또한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해서 생산직과 관리직 사원이 모두 북한 출신으로 채워졌다. 국가 전체를 북한식 공산주의로 이끌어가는, 그들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러다 보니 삼흥코스트 합영회사가 북한 내 자본주의 도입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종이 노릇을 한 셈이다. 북한 당국에선 사업도 사업이지만 자본주의 방식의 회사체제가 과연 북한에서 어떻게 굴러갈 것인지 지켜보는 것도 큰 관심사였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그때까지 북한 당국자들은 천 회장의 활동을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가 북한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큰 금액의 자본을 투자했고, 회사에서 발생하는 이익금도 재투자가 아니면 사원복지를 챙기는 데 썼기 때문이다.
이는 그때껏 북한에서 사업을 벌이던 조총련계 동포들과는 다른 면모였다. 그들은 북한의 상황이 늘 가변적이어서 단기 승부를 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까닭에 삼흥코스트 합영회사는 1996년 이후 계속해서 모범 합영회사로 선정됐고, 회사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조선중앙TV를 통해 네 차례나 방영됐다. 그 또한 북한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사천리로 뻗어나가던 천용수 회장의 대북사업이 덜컹거리기 시작한 것은 북한 진출 4년 만인 1996년. 언필칭 3재(三災)가 끼었는데, 첫 번째는 코스트 평양사무소 지사장이 해고된 사건이었다. 평양 출신의 지사장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인 비리로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는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등 북한 정서에 맞지 않게 처신하고 사치를 일삼았다. 자본주의의 단물을 너무 빨리 맛본 것이다.
일이 한번 꼬이기 시작하자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갔다. 두 번째 재앙은 북한 당국이 천용수 회장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나이에 비해서 너무 큰 사업을 한다는 것. 그때 상황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그는 광산지역을 탐사하기 위해 군용헬기를 전세내어 사용하는가 하면 북한에선 상상하기 힘든 큰 액수의 돈을 투자해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천 회장이 북한 광산업에 거액을 투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북한엔 미국이 눈독을 들일 만큼 세계 최고 수준인 마그네사이트 광산이 있었던 것. 대형 금광이 발견된 멕시코, 호주서부와 지층 구조가 비슷한 북한의 금광은 에너지가 부족해서 개발을 포기한 채 방치돼 있었다.
천 회장이 헬기를 전세낸 것은 막대한 경비를 줄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광산 탐사를 위해 호주에서 데려간 직원과 광산학자가 많을 때는 15명에 달했다. 거기에다 광산학자의 하루 일당을 3000호주달러나 주었다.
남한의 완행열차보다 느린 북한의 기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길 위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엄청난 액수의 보수만 지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만 해도 북한의 기차는 가다가 멈춰 서는 경우가 빈번했다.
사(私)기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북한 당국자들이 이런 사정을 쉽게 이해할 리 없었다. 급기야 “천용수는 남한의 안기부 자금을 갖고 들어와 사업을 하는 프락치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때서야 비로소 ‘북한 정서’를 체험한 천 회장은 일순간 당황했지만 그런 오해는 쉽게 풀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북한 당국자들을 호주로 데려가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했고, 그는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97년 북한의 차관급(부위원장) 인사를 포함한 관료 일행이 일주일 동안 서부호주에 머물면서 코스트 그룹의 사업 현황을 간접적으로 점검했다. 결과는 불문가지. 그들이 더는 코스트 그룹과 천 회장에 대해 의혹을 품지 않은 것은 물론, 그 일을 계기로 천 회장에 대한 북측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그 무렵 천 회장이 맞닥뜨린 세 번재 재앙은 천재지변이었다. 1996년 발생한 북한의 대홍수가 그것. 산사태가 나서 코스트 그룹 소유의 광산은 복구가 힘들 정도로 큰 피해를 당했다.
당시 수해 때문에 발생한 미수금 400만달러는 지금도 미결 상태다. 그러나 천 회장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북측은 “천 회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을 지킨다”며 그에게 강한 신뢰를 내보인다.
“돈보다 소중한 것 벌었다”
올해로 천용수 회장이 대북사업을 시작한 지 13년을 넘기고 있다. 그는 그간의 대북사업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코스트 그룹의 대북사업 13년의 손익계산서는 흑자일까, 적자일까. 그의 말을 들어보자.
“지난 13년간 내 인생의 황금기를 대북사업에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나는 온 지구를 떠돌며 사업하는 사람이라 길에서 생활하는 데 아주 익숙하다. 그런데도 북한에 가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다 합치면 지금까지 2년 정도를 북한에서 생활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곳에 가면 정서적으로 금방 동화된다.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추구한다’는 경제원칙으로 지난 13년의 손익을 따져본다면 분명 마이너스다. 그러나 숫자로 셈할 수 없는 커다란 무형의 재산을 얻었다. 또한 대북사업에서 입은 경제적 손실을 채우라는 하늘의 뜻이었는지, 대북사업 외의 비즈니스는 아주 잘 풀렸다.
대북사업의 선구자로 나서 큰 어려움 없이 오늘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코스트 그룹의 대북사업이 성공했다는 방증이다. 거기에다 코스트 그룹은 남북 경협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행운이 아니다.
나는 내 ‘반쪽 조국’인 북한에 자본주의식 사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낙후된 북한 경제를 살리려면 북한 스스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나서 활발히 교역해야 한다는 것을 실전을 통해 보여줬다. 내가 보기에 북한의 경제성장 잠재력은 상당하다. 다만 물물교환 방식으로 교역해오던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사면초가에 이르렀을 뿐이다. 양질의 지하자원을 갖고 있지만 미국의 경제봉쇄로 수출창구가 막힌 상태고, 국제시장에선 달러를 요구하니 별다른 방도가 없는 실정이다.
북한은 국토의 70% 이상이 산악지대로, 절대농지가 부족해 물물교환 방식으로 식량을 확보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식량을 달러로 사들여야 하는 형편이 되고, 대형 홍수란 천재를 당하면서 심각한 식량난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6자회담이 타결 국면으로 접어들어서 외국 자본이 유입될 가능성이 커졌고, 미결 상태인 대일(對日)청구권 문제가 해결되면 형편이 한결 나아질 것이다. 5~6년 전부터 ‘장마당’이라는 형태의 자본주의식 시장이 형성되는 등 북한 내부에 실용주의 노선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현상이다.
해외동포 기업인이 대북사업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투자 움직임이 감지되는 것도 고무적이다. 북한 당국은 OKTA를 믿을 수 있는 국제무역의 통로로 삼고 해외동포 기업인들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10월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OKTA 평양무역상담회다. 나는 42개국 162명의 해외동포 기업인이 참가한 그 행사의 준비위원장을 맡아 북한과 OKTA의 연결고리 노릇을 했다.
앞으로 6자회담이 완전 타결되고 북한 제품의 수출이 자유로워지면 북한의 노동집약산업 경쟁력이 중국보다 우위에 설 것이다. 현재 중국 노동자의 월급이 간접비를 포함, 200달러에 육박하는데 북한은 50달러를 밑도는 수준이다.
한편 북측은 대북사업과 관련한 내 공로를 인정해서 여러 가지 형태로 배려하고 있다. 일례로 2002년 북한은 설탕공급 독점권을 코스트 그룹에 부여했다. 한 국가가 소비하는 설탕을 한 회사가 모두 공급하는 일이라 당시 입찰에서 경쟁이 매우 심했다.
영통사 복원 참가
대북사업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것은 개성에 있는 사찰 영통사 복원사업에 참여한 일이다. 북한 당국자는 이것이 비영리 사업일 뿐 아니라 내가 평양에 머무는 동안 교회에 나가는 것을 목격하고도 사찰 복원사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만큼 나를 신뢰한다는 증표였다. 영통사 복원위원 자격으로 트럭 25대에 남한산 기왓장을 가득 싣고, 개성공단 가는 길을 최초로 달렸다.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북에 들어갔듯이 나는 트럭을 몰고 들어간 것이다.
코스트 그룹이 호주, 중국, 북한에서만 사업을 펼치는 것은 아니다. 서울 서초동에도 코스트 그룹 사옥이 있고, CI(통신 지능) 등 IT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북한산 ‘대동강 맥주’도 코스트 그룹을 통해 수입된다.”
시드니 한인 차세대 무역사관학교
지난 7월30~31일, 시드니 서부의 호주가톨릭대학에서 ‘제4회 시드니 한인 차세대 무역 아카데미’가 열렸다. 세계한인무역협회(OKTA) 호주지부와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시드니지사가 호주 한인동포 차세대 무역인을 육성하기 위해서 마련한 특별강좌였다. 호주의 경제동향과 산업정책, 무역 관련 실무교육 등 무역에 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지식과 노하우를 전달하는 세미나였다.
차세대 무역 아카데미는 시드니에서만 열린 게 아니다. OKTA 주관으로 세계 20개 도시에서 열린 세미나에 각각 50명씩 참가했다. 그러나 시드니는 신청자가 넘쳐서 70명이 참가했다. 결과적으로 전세계 1000명 이상의 차세대 무역사관생도가 이 교육을 받은 셈이다.
코스트 그룹 평양지사 직원들과 함께.
천용수 회장은 “한국 경제는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 무역전선의 한 축을 해외동포들이 담당하고 있다. 차세대 무역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은 본국은 물론 해외동포 사회에도 중차대한 일이다. 해외에서 성장한 차세대 청년들에게 모국과 무역에 대해 가르쳐 미래를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이제는 해외동포 기업인이 모국에 의지하기보다 모국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OKTA 회원들은 차세대 그룹을 일컬어 ‘Young OKTA’라고 부른다. 천 회장이 그들에게 거는 기대는 크다. OKTA 1세대 그룹이 갖은 시행착오 끝에 세계 각국에 무역 전진기지를 구축했다면, 젊은 OKTA는 그 틀을 맘껏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업을 하다 보면 무엇보다 힘들고 경비도 많이 드는 게 네트워크 구축인데, 젊은 OKTA의 회원이 되는 순간, 33개국 56개 도시 6000여 명의 OKTA 회원과 네트워킹이 완성된다.
엄청나게 신장된 한국과 한국 기업의 위상도 젊은 무역인에겐 막강한 무기다. 한국에 대한 낮은 인지도, 경쟁국가에 비해 형편없이 낙후된 무역 인프라, 경쟁사의 끊임없는 견제와 방해 공작 등으로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던 1세대 OKTA에 비하면 젊은 OKTA야말로 잘 닦아놓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셈이다.
천 회장이 돕고 싶은 그룹은 또 있다. 호주 시장에 진출하려는 한국 중소기업이다. 대기업은 지사를 통해서 호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막연한 정보에 의존해 호주에 진출했다가 낭패를 당한 경우가 부지기수이기 때문. 호주가 미국 시장과 비슷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미국 기준으로 준비했다가 큰 손해를 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KOTRA와 OKTA가 함께 중소기업 대상으로 2박3일짜리 호주 설명회를 열 계획이다.
드러내지 않는 열정
코스트 그룹의 웹 사이트에 접속해보면 그룹의 로고가 녹색 톤으로 꾸며져 있어, 이 회사가 환경 관련 기업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자연과 환경 관련 사업 분야에서 최고를 지향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기업-KOAST 그룹’이라고 씌어 있는 초기화면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울창한 숲이 배경을 이루는 초기화면에서 뜻밖의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PASSION’이 그것이다. 코스트 그룹을 이해하고 소개하는 데 꼭 필요한 패스워드인 것 같아서 취재기간 내내 그 단어를 상기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암호는 아주 쉽게 해독됐다. 천 회장을 만날 때마다 자연스럽게 ‘열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필자가 코스트 그룹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불과 1년 전이다. ‘신동아’ 2004년 8월호에 소개한 평양예술단의 호주 순회공연을 주도적으로 후원한 기업이 코스트 그룹이었다. 열흘 가까이 평양예술단을 취재하면서 천 회장을 먼발치로 몇 차례 보았지만, 그가 코스트 그룹 회장이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가 공연 준비와 진행과정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흔한 환영연설은 고사하고 코스트 그룹의 후원 사실 자체를 전혀 알리지 않았다.
바로 이 대목이 코스트 그룹의 키워드인 ‘열정’을 헤아리는 데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마치 지층 저 아래서만 뜨거울 뿐 지상에선 흔적조차 없는 용암처럼 코스트 그룹의 열정은 깃발만 요란한 구호가 아닌 것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시드니 서부 패러매타에 위치한 코스트 그룹 시드니 지사에 들렀다. 천 회장의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그의 책상 위엔 종이가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달랑 노트북 컴퓨터 하나가 전부였다.
IT 비즈니스 업체를 거느린 그룹답게 12개 계열사를 그룹 웨어(group ware) 인터넷망으로 연결해서 업무회의를 진행하고 결재했다. 그가 해외출장을 가도 모든 업무는 인터넷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했다.
뜻밖(?)에도 헤르만 헤세를 존경하고 좋아한다는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1년에 200일 이상 해외에 머물다 보면 외로울 때가 없느냐고. 그의 답은 명료했다.
“워낙 비행기 타는 시간이 많아 가끔 외로움을 느끼지만 그때마다 일을 하면서 외로움을 참아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외로움조차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