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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의 ‘방랑주먹’ 방배추

“살인 빼고는 안 해본 짓 없고, 북극 빼고는 안 가본 곳 없수다”

파란의 ‘방랑주먹’ 방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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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이라고 하는 방배추(본명·방동규).
  • 황해도 개성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절친한 친구 백기완과 더불어 농촌계몽운동을 하다 5·16군사정변 직후 유럽으로 떠난다. 독일 광부, 파리 낭인, 명동 양장점 사장, 민주투사를 거쳐 노동자로 살아가는 ‘방랑주먹’의 자유를 향한 대장정.
파란의 ‘방랑주먹’ 방배추
그의 직함을 무어라고 붙일까. 협객? 깡패? 혁명가? 노동자? 방랑자? 한창 잎 고운 경기도 의왕시 외곽 오메기 마을을 나오면서 나는 새삼 곤혹스러웠다.

‘방동규’란 원 이름보다 ‘방배추’란 별명으로 세간에 알려진 사람.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1년쯤 전이다.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 ‘백기완의 경호대장’ ‘독일 광부’ ‘파리 낭인’ ‘명동 양장점 사장’ ‘긴급조치 위반 수배자’ 같은 흥미진진한 이력을 들은 후 흥분해서 그에게 전화했다.

“아, 먹고살기도 바쁜데 지나간 이야기 주절거릴 틈이 어디 있소? 나는 상품가치 없는 사람이야. 딴 데 알아보쇼!”

두말도 못 붙이게 거절을 당했다. 1년 후 그는 상당히 유연해져서 “그때 너무 매몰차게 거절했지. 술 할 줄 알거든 우리 한잔 합시다” 했다.

서울로 나올 날짜를 뒤적거릴 여유를 주지 않고 나선 김에 방배추 선생이 산다는 오메기 마을로 달려갔다. 방배추, 그를 뭐라 불러야 할까. 청바지에 운동화, 흰 티셔츠에 야구모자를 쓰고 나타난 그는 낯빛이 희고 콧대가 곧고 치열이 가지런했다. 이목구비가 시원하고 깨끗했다. ‘최고 주먹’은커녕 털털하게 차리고 나선 최고경영자 같았다.



“난 막노동꾼이에요. 공사판을 찾아다니며 등짐을 지지. 그런데 요즘은 나이 많다고 잘 안 써주려고 그래. 며칠 전이 칠순이라고 애들이 그러대. 난 평생 생일을 안 쇠요. 부모한테 생일상을 못 차려드린 놈이 제 생일을 차려먹겠어? 살아계실 때 담배 한 개비라도 노나(나눠) 피고 눈이라도 한번 맞추고 그래야 효도지, 죽은 다음에 무덤을 암만 크게 하면 뭘 해. 다 자기 사치지. 우리 어머닌 산소도 없어요. 그냥 화장해서 산에다 뿌려버렸어. 아, 답답하게 왜 납골당에 가둬놔?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게 풀어드려야지.”

술 한잔 앞에 놓더니 대뜸 어머니 얘기부터 시작한다. “선생도 나중에 그렇게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고 싶으신가 보죠” 묻자 지갑에서 가톨릭대학이 발급한 ‘시신기증 등록증’을 꺼내 보인다.

“내 팔뚝 둘레가 45㎝라고. 남편 있거든 집에 가서 한번 재봐요. 보통 사람은 30㎝가 안 되는데 이걸 그냥 썩혀버리면 아깝잖아. 뭐가 들었나 갈라서 들여다봐야 할 거 아냐. 간 같은 거도 쓸 만하면 남들 떼주고…. 요새는 행려병자도 드물어서 의과대학에서 실습할 시신도 구하기 어렵다더군.”

나는 그와 술 한 병을 앞에 놓고 종일 마주앉아 있었다. ‘지금 마시면 낼 아침까지 쉬지 않고 마시는’ 술 실력이라는데, 그는 주량을 조절할 줄 알아서 내가 대작할 수 있을 만큼만 마셨다.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

이튿날 나는 또다시 오메기에 가서 저물 때까지 이야기했다.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마침 비가 와서 이야기는 끝도 없이 풀려나갔다. 말 잘하기로 소문난 유홍준도 같은 자리에서 방배추가 입을 열면 “지방방송은 고만 끌랍니다” 하고 물러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과연 헛된 이름이 없다 싶다. 비분강개가 있고 찬란한 추억이 있고, 씁쓸한 자성과 통쾌한 액션이 있고, 무엇보다 장면 전환이 빠르고 내용이 드라마틱했다. 아쉽다면 멜로가 없다는 점이랄까.

“나는 평생 연애란 걸 못해봤어. 이상하게 그게 잘 안 되데. 여자 앞에만 가면 쩔쩔매고 손목 한번 못 잡아보는 거야. 소설가 황석영이 내 얘기를 몇 번 쓰려고 했는데 연애사건이 없어서 재미가 없대. 그러면 매상이 잘 안 오른다며?”

그는 떠돌이였다. 일생 한 가지 일에 매달리지도 않았고 한곳에 정착해 살지도 않았다. 천부적으로 주먹이 셌다. 일부러 싸움판을 벌인 적은 없는데 주먹 쓸 일이 가끔 생겼다. 영 마땅찮고 시시껄렁하게 굴면 한 대 패줬더니 방배추의 주먹이 무섭다는 소문이 떠르르해졌고, 나라 안 힘깨나 쓴다는 자들이 그와 겨루기 위해 서울로 찾아왔다. 할 수 없이 싸움이 벌어졌고 그는 번번이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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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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