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고등학생이던 1980년, 김진경 선생님과의 만남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분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았고, ‘역사의 주체는 시민’임을 깨달았다. 민주적 리더십의 소중함을 몸소 실천해보인 선생님은 가장 순수한 스승이자, 시민운동의 선배였다.
행동하는곧은 지성, 시골 아저씨 같은 풋풋한 향기.까까머리 고등학생이던 1980년, 내가 김진경 선생님을 처음 뵈며 떠올린 느낌이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감상은 그대로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 인격을 가다듬는 것, 인생의 목표와 시대정신을 깨우치도록 도와주는 것. 김 선생님께선 스승으로서 가져야 할 세 가지 덕목 중 어느 하나도 간과하지 않았다. 내가 아직도 그분을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더구나 김 선생님은 내게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함께 겪고 헤쳐나간 민주화·시민운동의 동지였다.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 1990년대 시민운동의 태동기, 그리고 지금까지 김 선생님과 나는 현장의 제일선에 서 있었다. 그렇기에 김진경 선생님은 가장 순수한 인생의 스승이자, 가장 열정적으로 지성을 실천한 시민운동의 선배로 내 가슴속 깊이 아로새겨졌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라”
김진경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서울 우신고 2학년 때다. 국어를 가르치시던 김진경 선생님의 첫인상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선생님은 1970~80년대에 흔히 떠올리는 교사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달랐다. 다른 학생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선생님은 권위의식에 젖어 획일적인 학교문화를 강요하기 일쑤였다. 개인차는 있었지만 전체의 질서를 잡기 위해 학생에게 체벌을 하거나 인격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는 꾸지람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군사정권의 영향이었겠지만 이러한 비인격적인 행동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던 시기에, 선생님의 행동은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 자유방임이라 할까? 아니면 자율책임이라 할까? 적응하기 어려운 선생님의 지도 스타일 때문에 당시엔 다소 혼란스럽기도 했다. 시간이 꽤 흘러서야 선생님이 학생을 대하는 모든 언행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자기가 할 일은 스스로 알아서 실행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내심 환호성을 지르다가도, 동시에 그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는 중압감에 눌리곤 했다. 마음대로 행동하고 잘못되면 벌을 받으라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지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것인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나는 학급의 반장이었다. 자율과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선생님의 스타일로 인해 처음에는 ‘수업시간에 학급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지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수업시간만 되면 반장으로서 더욱 긴장했다. 엄숙해야만 할 수업 분위기가 흐트러진다면 반장인 내게 큰 부담이 될 터.
사실 선생님의 수업은 초기에는 그야말로 자유방임 기간이었다. 조는 학생, 자는 학생, 심지어 아예 수업을 듣지 않고 다른 책을 보는 학생까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자율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히려 대부분의 학생이 선생님 시간만 되면 강의를 들으려 귀를 쫑긋 세웠고, 선생님이 해주시는 이야기에 압도당하곤 했다. 수업시간이 더 진지해진 것은 물론이다.
체벌을 하고 큰소리를 쳐서 겨우 진정되던 교실 분위기가 부드러운 말 한 마디에 봄바람처럼 따뜻해졌고,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도 눈에 띄게 줄었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형태의 카리스마에 매혹되면서 몇 달 뒤부터는 학생들 모두 김진경 선생님을 좋아하게 됐다. 점수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아마 다른 선생님들이 지도했을 때보다 학급 분위기가 훨씬 진지하고 열의에 차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