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고 성장한 곳에서 한 생을 살다가 죽는 게 가장 행복하다. 그곳에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1942년, 브라질에서 자살한 오스트리아 출신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

왼쪽부터 김준, 박상규, 장우, 차도균.
시드니 하버의 물결이 해거름의 비낀 햇살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물결에 실려 함께 출렁거리던 마음 하나. 바다 건너 산하를 그리워하는 어느 한국 남자가 ‘해변의 길손’이 되어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시드니의 가을이 속절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정신을 삼켜버린 물질의 시대에 부대끼면서 21세기 들머리의 ‘우울’을 앓고 있는 것일까? 절대고독에 시달리면서도 길모퉁이 선술집에 마주 앉아 술잔 기울일 친구 하나 없는 그 남자가 발길을 시내 쪽으로 돌려 허청허청 걸어갔다.
서울 중심부에 서울시청이 있듯이 시드니 중심부에 시드니 타운홀(시청)이 있다. 시드니의 대소사를 치르는 장소이기도 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2004년 독일월드컵이 열리는 동안 시드니 타운홀은 축제의 중심이었다.
터벅터벅 흐릿한 도회의 빌딩 그림자를 등에 지고 타운홀을 향해 걸어가는 길, 사시사철 녹음이 짙은 시드니지만 조지 스트리트의 숱한 가로수가 갈빛 잎사귀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문득 아득해졌다. 그러나 한 시절 푸르렀다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이 어디 나뭇잎뿐이랴.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가을나무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시구 하나를 읊조리며 당도한 시드니 타운홀, 그곳에서 귀에 익은 노래들이 들려왔다.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다. 시드니의 가을을 닮은 60대 중반의 한국 남자 네 명이 부르는 노래, 그 정겨운 하모니가 시나브로 타운홀 석조계단에 내려앉았다. “그래, 이런 게 바로 우정이야”라고 속삭이듯.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한 공연
김준, 장우, 박상규, 차도균. 네 명이 함께 부르는 게 분명한데 마치 혼자 부르는 것처럼 절대화음이었다. 그들은 가끔씩 허공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 소중한 것을 붙잡아서 다정한 포즈로 친구에게 전해주는 것 같은 동작을 취하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남자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네 사람이 몹시 부러웠다. 남자는 텅 빈 타운홀 객석에 혼자 앉아 그들이 불러주는 노래에 오롯이 젖어들었다. 자기들의 변함없는 우정을 담아낸 듯한 ‘오랜 세월 하나같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들으면서, 남자는 속울음을 울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이어서 영화 ‘모정(慕情)’의 주제가 ‘사랑은 정말 눈부신 것(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을 불렀다. 그러나 그 모정의 대상은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었다. 함께 노래 부르는 친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