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주의를 로마 혹은 러시아
혹은 스페인의 정치에 집중할 수 있을까
그래 여기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여행 경험이 많은 사람이 있고
그리고 저기엔 읽고 생각할 줄 아는
정치가가 있지
곧 전쟁이 일어난다 어쩐다 떠드는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오, 나 다시 젊어져
그녀를 내 팔에 안았으면!
(How can I, that girl standing there
my attention fix
On Roman or on Russian
Or on Spanish politics
Yet here´s a travelled man that knows
What he talks about,
and there´s a politician
That has read and thought,
and maybe what they say is true
of war and war alarms,
But O that I were young again
and held her in my arms!)
‘주간동아’ 최근호를 뒤적거리다가 접한 윌리엄 예이츠의 ‘정치(Politics)’라는 시다. 이 작품을 고른 최영미 시인은 소개글에서 “이처럼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글로 발설하는 용기… 그래서 예이츠가 위대한 인간이며 위대한 시인인 것이다”라고 썼다.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글로 발설하는 용기라…. 그러면 이건 어떤가.
조철봉이 중국에 자주 들르면서 두 가지 습관이 생겼는데 그것은 마사지를 받는 것과 룸살롱 출입이다. 딴 사람들이야 문화유산 답사나 하다못해 골프관광이라도 하겠지만 조철봉의 낙은 딱 이 두 가지뿐이다. 마사지만 해도 발, 등, 머리, 전신으로 나누어졌고 기법이 서로 다르다보니 날마다 새롭다. 또한 분위기까지 천차만별이어서 호화로운 방 안의 침대에 홀랑 벗고 누워 TV를 보면서 역시 알몸의 미녀로부터 마사지를 받는 경우도 있다. 그 미녀가 하나일 때도 있고 셋까지 덤벼드는 경우도 있었으니 가히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 불여일행이라고 할 만하다. 또한 룸살롱은 어떠한가? 초대형의 호화로운 방 안에 버티고 앉아 방 안이 미어터지게 들어온 미녀를 선별할 때의 희열은 말과 글로 표현이 잘 안된다. 그 순간은 그날 부도를 맞은 사장도, 실연을 당한 사내도 잠깐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다. (문화일보 연재소설 ‘강안남자’ 1859회에서 발췌) |
‘은밀한 욕망을 발설하는 용기’로 치면 저 아일랜드의 대(大)시인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지나치게 솔직하고 노골적이라고? 일간신문에 실리기엔 부적절한 글이라고? 하지만 어쩌랴. 전부는 아닐지라도 상당수 직장인이 오후 일과의 시작을 ‘강안남자(强顔男子)’ 읽기로 시작한다는 데야. ‘오늘은 조철봉이 어떤 엽색 행각을 벌일까’ 기대하면서.
‘은밀한 욕망’은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따라 예술도 되고 쓰레기도 된다. 역사적으로는 쓰레기가 예술로 승화한 사례도 많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쓰레기인가. 그리고 누가 그걸 판정하는가. 욕망을 에둘러 표현한 예이츠나 직설적인 ‘강안남자’나 인간의 욕망을 다루기로는 다 마찬가지인데.
일각의 주장처럼 ‘강안남자’가 쓰레기이고, 그 쓰레기가 소통되는 방식이 문제라면(달리 말해, 풍기문란 소설이 남녀노소 대중이 접하는 일간신문에 실리는 것이 문제라면), 섹스를 다루는 대중소설은 도회지의 음침한 뒷골목 외에는 뿌리내릴 곳이 없다는 얘기가 되는가. 인터넷을 열고 몇 번 클릭하면 소설보다 훨씬 생생한 야동(야한 동영상)이 넘쳐나는 이 판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