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백 전 美 벡텔 부사장
10여 년 뒤 그는 현대건설에서 나와 미국으로 갔다. 미국 중소 건설회사의 현장소장으로 일하던 중 설계·건설·토목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벡텔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벡텔은 당시 그가 맡고 있던 공사를 발주한 원청회사였다. 그가 공기(工期)에 맞춰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보고 채용을 결정했다는 것. 벡텔은 종업원 4만6000명, 연매출 180억달러(하도급 제외) 규모다.
그는 부인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부인은 “이 도시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는 “그러면 앞으로 여기서 살자”고 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벡텔의 본사가 있는 곳이다. 입사하자 ‘32억달러 규모의 리야드 국제공항 시공계획을 짜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놓았다고 한다. 이후 세계 각지 공사현장을 지휘했다.
슐츠 전 국무장관 측근
1995~2005년에는 벡텔그룹 한국지사 대표이사로 활동했다. 벡텔은 원자력발전소 영광 1, 2호기와 고리 3, 4호기를 설계했고 원전 제작기술을 한국 측에 제공했다. 또한 이 회사는 고속철도 서울~동대구 구간 감리를 맡으면서 고속철도 시공기술을 한국 철도시설공단에 전수했다. 그는 1984년 벡텔 부사장이 됐고 2000년에는 수석부사장에 올랐다가 2007년 퇴임했다. 한국외국어대 총동문회는 그에게 ‘2005 자랑스런 외대인상’을 수여했다.
그는 벡텔에서 인생의 또 다른 지평을 열었다. 그가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던 조지 슐츠 벡텔 회장이 레이건 정부의 국무장관에 발탁되면서 그 역시 슐츠 장관의 참모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토목 전문가이면서 정치, 외교, 국제협상 분야에서도 깊이 있는 식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 전 부사장은 4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에서 ‘입사 동기’ 이명박 대통령의 현대건설 재직 시절(현대건설의 성공신화) 및 현재의 국정수행(대운하, 미국 쇠고기 협상)에 대해 가감 없이 얘기했다. 그의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명박 평가’는 무척 흥미로웠다. ‘미화(美化)’나 ‘근거 없는 비판’이 배제된 정제된 표현으로 보였고, 그간 알려진 것과는 다른 부분도 있었다. 이 대통령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공인 중 한 명이므로 이 대통령의 과거·현재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용인돼야 한다. 다만 이 전 부사장의 견해 역시 개인의 주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 요즘엔 어떤 일을 하십니까.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캘리포니아국제문화대학(Intercultural Institute of California) 재단이사장에 취임했어요. 이 대학은 미국 정부의 인가를 받은 유일한 한국학 대학원으로 석·박사 과정을 전문으로 합니다. 재학생 대부분은 비한국계 미국인이나 외국인이죠. 한국은 세계 13위 경제대국이고 미국의 교역 파트너로는 5위권 국가입니다. 그러나 미국에 한국 전문가가 많지 않아요. 이 대학을 미국 내 한국학의 메카로 성장시키는 한편 한국을 잘 이해하는 졸업생들을 미국 정부와 기업에 진출시키고자 합니다.”
▼ 현대건설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근무했다고 들었는데, 이 대통령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부지런함은 전세계에서 금메달감이에요. 신입사원 때부터 회사에 가장 일찍 출근하는 것으로 유명했죠. 새벽 5시면 출근해 일했으니까. 이명박 사원에게는 현대가 ‘생명’이고 ‘모든 것’이었어요. 저로서는 그런 헌신을 이해하는 데 좀 시간이 걸렸지만, 기업의 처지에서는 정말 훌륭한 직원이었죠. 그런데 정치라는 세계는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부지런함만 갖고는 잘 안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