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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사랑하고 간 남자 이브 몽탕

아낌없이 사랑하고 간 남자 이브 몽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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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사랑하고 간 남자 이브 몽탕

훤칠한 키와 수려한 용모를 가진 이브 몽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매력적인 프랑스 남자’이자 타고난 예술가였다.

타고난 예술가

마르세유의 한 지방극장에서 바람잡이로 노래를 부르게 될 때까지 이브는 키만 훌쩍 크고 깡마른 데다 수줍음을 타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당시 꽤 인기를 끌었는데,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처럼 춤추며 노래하는 특이한 스타일 때문이었다. 큰 키의 이 소년에게는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있었다. 마르세유에서 인기가수가 되면서 예명도 생겨났다. 당시 흥행업자들이 이브에게 듣기 좋은 예명이 하나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브는 이탈리아어 냄새가 물씬 나는 ‘리비’라는 성 대신 ‘몽탕(Mon-tand)’이라는 성을 지어냈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골목길을 향해서 외치던 “이보, 올라와(Monta)!”라는 말을 예명으로 삼은 것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짙어지던 시기였다.

전쟁이 터지면서 이브 같은 젊은이들은 모두 징집될 위기에 처했다. 형인 줄리앙은 징집 영장을 받고 끌려갔다. 이브는 영장을 피하기 위해 파리로 향했다.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면 큰 도시가 수월했다. 전쟁 중 대도시에서의 생활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카우보이 흉내를 내는 무대 매너 때문에 미국을 찬양한다는 오해를 받는가 하면, ‘리비’라는 본명 때문에 유대인으로 의심받기도 하고 강제노동국의 소환을 받아 끌려가다 열차에서 뛰어내려 아슬아슬하게 탈출하기도 했다. 이브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왜 경찰이 그토록 자신을 추적했는지 알게 되었다. 공산당원인 아버지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남몰래 참가했던 것이다. 이브는 그런 아버지에게 큰 자부심을 느꼈다.

첫사랑, 에디트 피아프

이브가 막 파리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1944년,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1915~63)는 이미 정상에 오른 샹송가수였다. 당시 파리 제1의 카바레였던 물랭루즈에서 오디션 제의를 받은 이브는 그 자리에서 여섯 살 연상의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게 된다. 그를 보기 전까지 ‘미국 사투리로 노래 부르는 시골뜨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피아프는 훤칠한 키의 이브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남성적 매력에 마음을 뺏기고 만다. 그러나 여왕 같은 자리에 있던 에디트가 쉽사리 자신의 마음을 들킬 리 없었다. “당신 억양이 이상하네요, 캐나다 사람인가요?” 에디트가 그에게 건넨 첫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두 사람은 곧 연인이 됐다. 에디트는 미국 팝송을 흉내 내는 데 그치던 이브를 위해 샹송 풍의 노래들을 새로 만들어주었다. 에디트가 작사한 샹송 ‘장밋빛 인생’에 나오는 구절, ‘그이의 입가로 사라지는 흐뭇한 웃음’은 에디트가 이브의 커다란 입을 연상하며 쓴 가사였다. 이브가 본 에디트는 ‘풋풋하고 우아하고 상냥하고 재미있는, 그리고 극도로 잔인한’ 여자였다. 에디트는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리고 사랑을 잃었을 때도 기막히게 노래를 불렀다. 스물네 살의 이브는 에디트의 노래에, 그리고 그녀의 매력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두 사람은 2년 반 동안 동거했고 에디트는 이브에게 약속한 대로 술을 끊었다. 이 2년 반 동안 이브는 가수로 급성장해서 마침내 파리 에투알 극장의 무대에 서게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젊고 잘생긴 이브가 에디트의 사랑을 얻은 후 명성마저 얻자,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에디트를 차버렸다고. 그러나 이브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것은 전설일망정 진실은 아니다. 1946년 봄, 두 사람은 사소한 말다툼을 했고 이 싸움에서 화해하지 않은 채 에디트는 그리스 순회공연을 떠났다. 그리고 그리스에서 돌아온 에디트는 이브를 서먹하게 대했다. 이탈리아인답게 다혈질인 이브는 짐을 싸 집을 나갔고, 3주일 후 다시 돌아온 이브를 에디트는 상냥하게, 그러나 완벽하게 ‘친구’로만 대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해서 끝났다.

이 무렵 이브는 최초의 영화인 ‘밤의 문’-‘고엽’이 등장하는 바로 그 영화다-을 통해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다. 잡지 ‘시네몽드’는 ‘올해 가장 엉망인 연기자는 이브 몽탕’이라는 리뷰를 실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이브는 시인 자크 프레베르를 만나게 된다. ‘고엽’이라는 노래 제목과 가사를 붙인 프레베르는 이브에게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이다. 그는 재미있고 빈틈없고 예리했다. 이브는 이 영화에 등장한 노래인 ‘고엽’을 무척 좋아했지만 이상하게도 이 노래에 대한 뮤직홀 관객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그가 ‘고엽’을 노래할 때마다 관객들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고, 이브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느라 다른 흥겨운 노래들을 연달아 불러야만 했다.

카바레 무대와 영화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기교를 통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진리였다. 노래든 연기든 간에 상대를 사로잡기 위해서는 개성과 카리스마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피아프 같은 사람이 그러했다. 그리고 이브 자신은 잘 못 느끼고 있었지만, 그에게도 예술가다운 개성과 매력이 있었다. 이탈리아인의 피에서 흐르는 본능적 감각이 있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감정을 토로할 용기도 있었다. 그것이 상대 여배우이건, 아니면 이념이건 간에 이브는 언제나 솔직하게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이브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매력적인 프랑스 남자’였다. 늘 우아하고 부드러웠으며, 188㎝의 큰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가 속삭이는 몇 마디의 말에, 또는 무대에서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모습에 정상급 여배우들은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이브는 수없이 많은 여배우와 연애를 했다. 개중에는 연인이나 남편, 심지어 아이를 팽개치고 이브에게 달려온 이들도 있었다.

시몬 시뇨레, 그리고 마릴린

이브에게 평생의 연인이자 반려자가 된 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 1921~85)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브는 명성을 얻은 후에도 파리에 거주하지 않고 고향 마르세유에서 멀지 않은 중세풍의 작은 마을 생 폴 드 방스에서 하숙을 했다. 그의 하숙집 인근에 피카소와 브라크, 프레베르가 살고 있었다. 이브는 친구 사이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그들의 예술세계를 놓고 가끔 충돌하는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곤 했다. 영화감독인 이브 알레그레(Yves Allegret·1905~1987)와 시몬 시뇨레 부부도 이브의 이웃사촌들이었다. 어느 한가로운 점심식사 식탁에서 시몬을 처음 만난 이브는 곧바로 사랑을 느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이브는 자연스럽게 시몬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이 가늘군요.”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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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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