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가족 주변에는 항상 금패엄마의 느낌이 어른거렸다.
- 우리 가족과 함께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고 우리 형제에게 정을 보내던 금패엄마가 아버지의 첫 부인이라는 것을 안 것은 충격이었다.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나는 듯했던 금패엄마가 다녀간 날이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엔 묘한 긴장이 흘렀다.
자녀들에게 온화하고 이지적이었던 필자의 부친
나의 아버지는 손이 귀한 집 삼대독자였다. 이십대 때 한 여인과 결혼했으나 그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해 이혼하고, 두 번째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두 번째 결혼한 여인이 나의 어머니였고 나는 2녀 중 장녀였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아버지의 나이가 40대로 접어든 이후부터 시작된다. 그 이전에 아버지의 생애에 일어났던 많은 일들을 나는 거의 알지 못한다. 어른들의 대화나 상황을 통해 절로 알게 된 일들, 아버지가 신학을 전공했고, 돌아가신 부모님으로부터 제법 많은 토지를 상속받았고, 결혼한 부인이 손을 잇지 못하더라도 헤어질 뜻이 없었으나 부모님의 강권에 못이겨 이혼하고 나서 마음고생이 심했고, 큰 화재를 만나 재산손실을 크게 입었고 등등으로 요약되는 사건들은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관공서의 서류 한 귀퉁이에 몇 마디 활자로만 남아 있었다.
다정다감했던 금패엄마
나의 유년의 기억 한복판에는 한 미지의 여인이 서 있다(물론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금패엄마라고 불렸던 그 여인은 아버지 연배로 어머니보다 십년 이상 연상이었다. 금패엄마는 명절 때면 으레 우리집에 초대되는 손님이었다. 추석이나 정초가 되면, 나는 차례상 준비로 분주한 어머니 주위를 맴돌며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다. 전을 부치던 어머니가 손에 묻은 기름을 행주치마에 슬쩍 훔치다가 말고 생각난 듯이 나에게 일렀다.
“금패엄마한테 가서 내일 아침 우리집에 오시라고 해라.”
기쁜 마음에 곧바로 대문을 향해 내달리노라면 어머니의 책망이 뒤쫓아왔다.
“치마 좀 바로 입고 가거라.”
금패엄마는 쌍꺼풀이 깊은 서글서글한 눈매에 키가 작달막하고 환하게 웃을 때조차도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나는 듯한 여인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듯 적막한 기운이 감도는 마당에 들어서면 나는 항시 나와 내가 가져온 전갈이 금패엄마를 무척 기쁘게 할 거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그 심부름이 기꺼운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를 맞이하는 금패엄마의 얼굴에 웃음이 환하게 번지는 것을 보는 것은 그냥 기분 좋기만 한 일이 아니라, 그녀에게 내가 무척 귀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느낌도 갖게 했다. 방으로 들어와 잠시 놀다 가라는 금패엄마의 권유를 나는 수줍음 때문에 머뭇거리다 그냥 돌아섰다.
이튿날 아침 일찍 성장을 한 금패엄마가 우리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명절에 찾아오는 유일한 친척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등장은 우리 형제들에게 가벼운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일하다 말고도 일어나서 그녀를 반기는 것은 어머니였고 내성적인 아버지는 눈을 내리깔고 비죽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만류하는데도 금패엄마는 부엌으로 나가 차례상 차리는 일을 도왔고 아버지는 방에서 지방을 쓰고 갈아입을 옷을 매만지셨다.
차례를 지낸 뒤 서둘러 조반을 끝내고 우리는 성묘길에 올랐다. 한 시간 남짓 걸어서 도착한 묘지에는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모셔져 있었다. 아버지가 낫으로 풀을 베고 있는 동안 어머니와 금패엄마는 준비해온 음식들을 상석에 차려놓았다.
묘지와 묘지 사이를 S자로 뛰어다니다 문득 바라보면, 저 멀리 두 개의 삿갓처럼 맞붙어 있는 산 능선 사이에 바다가 푸른 쐐기처럼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또다시 뛰어다니다 문득 바라보면 어머니와 금패엄마가 나란히 앉아 자매처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는 벌초를 끝내고 나서도 두 여인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아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분이 아버지의 첫번째 부인이었다니…
산에서 내려와 금패엄마가 자기 집으로 돌아간 뒤에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엔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소한 문제로 말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듯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한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엄마, 금패엄마가 우리하고 뭐가 돼요?”
나의 질문에 어머니가 난처한 기색으로 망설이다 “먼 친척”이라고 대답한 적은 있었다.
우리 형제들은 그네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는 까닭을 알지 못한 채로 정초에는 세뱃돈을 두둑히 받아 챙겼고, 학교에 오가는 길에 우리가 먼 발치로만 보여도 불러서 그녀가 일부러 손에 쥐어주는 돈이나 사탕봉지를 당연한 듯이 받아넣었다. 오빠는 부모님에게 꾸중을 듣고 집을 나가면 금패엄마를 찾아갔다.
내가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사춘기가 훨씬 지난 뒤였다. 금패엄마는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이었고 금패는 입양한 딸인데, 금패마저도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어머니의 고백에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내색할 수는 없었으나 그토록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먼 친척이 아니라 진짜 가까운 관계라는 사실이 기쁘고 후련했다. 사실 우리 쪽에서도 금패엄마한테 가는 정이 깊어지는데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스스로 당혹스러웠던 까닭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엔 부쩍 의견충돌이 많아졌다. 그 충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날씨가 화창한 일요일, 아버지는 아침 일찍부터 낫을 갈아 보자기에 싸놓고 조반상 앞에서 말했다.
“자네 오늘 산소에 갈라는가.”
“아닌 밤에 홍두깨격으로 산소에는 왜 가요?”
“날씨가 좋으니 아이들 데리고 산보삼아 가자는 거지.”
“죽은 사람들한테서 떡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
“이 사람아, 지금 우리가 밥을 굶나 옷을 벗었나, 뭐가 그리 불만인가.”
“세상물정을 저렇게 모르니 늘 이 모양 이 꼴이지.”
면박을 주는 어머니의 음성이 높아졌다. 사실 그것은 부모님 사이에 진작부터 내연(內燃)하고 있었던 갈등의 불씨였다. 12년의 나이 차이, 아버지는 온화한 성품에 이지적 내성적 성격이었고 목회를 직접 하지 않는다뿐이지 신학으로 다져진 가치관이 확고했고, 어머니는 활달하고 급한 성품에 감성적 성격이었고 현세적 욕구가 강했다.
그 즈음 어머니는 자식들이 클 만큼 크자 뒷바라지에서 놓여나 애국부인회 일을 보기 시작했다. 어머니 자신은 여학교 때 전교 우등을 할 정도로 남에게 뒤질 게 없었으나, 부인회 일을 보다 보니 돈 많고 권세 높은 남편을 가진 여인네들 틈에서 말단 공무원 신분인 아버지 때문에 주눅이 들 법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버선을 메다꽂으며 사소한 일로 역정을 냈고 끝내는 아버지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땅을 팔아 번듯한 사업을 해보라는 요지였다.
한번도 언성을 높이는 일 없이 어머니의 타박을 고스란히 감수하고 사는 아버지가 가엾을 만큼 나는 어머니를 미워했다. 아마도 내 성정이 어머니보다 아버지 쪽에 가까운 점도 심리적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 쪽에서도 어머니 성정을 닮은 아들보다 큰딸을 자기편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버지는 불만에 가득찬 어머니가 업신여겨 가까이 하지 않는 당신의 곁에 나를 늘 데리고 다녔다. 나는 아버지가 산지기를 찾아갈 때도 동행했고 소작인이 맡아 경작하고 있는 논을 둘러보러 갈 때도 함께 했고, 우리 땅에 집을 짓고 사는 스물다섯 가구의 세입자들로부터 지세를 받으러 갈 때, 그리고 당신으로부터 점점 마음이 멀어져가는 아내로부터 받은 상처의 외로움을 조상들의 무덤을 찾아가 벌초를 하며 달랠 때도 아버지 곁에 있었다.
그런 중에도 부모님 사이의 불화는 날로 깊어갔다. 어머니의 수완으로 부인회 일이 견고해지고 확장된 것이 계기가 되어 국회의원에 출마한 부인회장의 선거참모로, 다시 야당의 부녀부장으로 사회참여를 넓혀감에 따라 어머니는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살림을 도외시하는 어머니를 나무라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면서 어머니가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고성(高聲)이나 폭력으로 터뜨리기보다는 믿음 깊은 생활로 자기 수신(修身)에 힘썼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리를 맞아주는 이는 아버지였고 우리를 위해 밥상을 차려주는 이도 아버지였다. 외출이 잦은 어머니의 옷차림이 점점 화려해지고 있는 데 반해 아버지의 옷차림은 검소한 도를 넘어 후줄그레한 느낌을 주었다.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던 중학시절
그러던 어느날 이발소에 다녀온 아버지의 머리를 보고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스님처럼 삭발을 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마음의 뿌리로부터 거듭 태어난 신호였다. 우리집에는 남들이 사귀기를 기피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왔고 아버지는 그들의 형님으로 불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머리모양과 친분을 맺고 있는 반푼(?)들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아버지가 일으키고 있는 조용한 변화는 어머니와 어머니가 속한 세계로부터 몰이해될 뿐 아니라 사사건건 구설에 올랐다. 중학교에 들어간 나에게도 그 여파가 미쳤다. 나의 친구들은 내 등 뒤에서 “자아(쟤)네는 아버지가 밥을 한다더라”고 쑤군거렸다. 나는 어느새 어머니가 그랬듯 아버지를 친구들 앞에서 내 아버지라고 내세우기를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나는 하학길에 친구들과 동행하기를 꺼렸다. 아버지가 바가지에 담긴 쌀을 씻고 있는 모습을, 또는 동네에서 반푼으로 취급당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우리 방에서 큰 소리로 웃고 있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임종하시던 날 아침에도 우리를 위해 아침밥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 잠시 눕겠다고 한 뒤 바로 혼수상태에 들었다. 왕진 온 의사는 복수가 차오른 아버지의 배를 꾹꾹 눌러보고 나서 임종이 가깝다고 했다. 어머니는 볼일 때문에 서울에 머물고 있었고 오빠도 집에 없었다. 집에는 동생과 나밖에 없었다. 나는 금패엄마에게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눈을 뜨고 임종하셨고 그 눈을 감긴 것은 금패엄마였다.
책 대여점에서 마분지로 겉장을 싼 소설들을 닥치는 대로 빌려와서 이삼일마다 책 한 권씩 뚝딱 읽어치울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환불해주는 교과서 대금의 일부가 수중에 들어오자 나는 서점으로 갔다. 읽고 싶은 책을 뽑아들고 정가부터 살피기를 여러 차례, 수중의 돈에 맞추어 살 수 있는 책은 문고본밖에 없었다. 서문당 문고판인 발자크의 ‘골짜기에 핀 백합’과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는 내가 처음으로 돈을 주고 산 새 책이었다. 난해해서 그냥 책꽂이에 꽂아두고 있던 ‘아웃사이더’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 3년 전보다 훨씬 잘 이해될 뿐 아니라, 그 탁월한 명저 속에 언급된 저작들-앙리 바르뷔스의 ‘지옥’, 사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이방인’ ‘시지프스의 신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 H·G 웰즈의 ‘맹인의 나라’,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른 병’, 헤밍웨이의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카프카의 ‘심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황야의 이리’ 등등- 을 하나하나 찾아 읽으면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문학수업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아직 삶을 살아보지도 않은 열아홉 살 처녀의 심중에 로캉탱의 정신적 혐오인 구토가 이식되었고, 뫼르소의 비현실감, 베르테르의 불타협의 고뇌, 황야의 이리의 권태, 드미트리의 광적 열정이 관념으로 이식되었다.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믿음을 부끄러워했음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죽음의 원인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며 어머니를 배척했다. 거기다 어머니는 오빠의 말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의 제지로 꼼짝할 수 없었던 토지들을 팔고 서울로 이주했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내 원초적 감정을 대작가들의 깊은 사색의 산물들인 철학적 관념들로 그럴싸하게 도금했다. 그렇게 쓰여진 소설이 데뷔작인 ‘교(橋)’였다.
하지만 생을 앞서갈 수 없는 내 안의 본심은 아버지의 성격과 반대되는 성격, 특히 카리스마가 있는 폭군 같은 남성을 만나 그의 호령에 양처럼 순종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바람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현실에서 내가 만난 남성은 오척 단구에 가식이 없는 소탈한 성품임에도 저절로 추종자들이 모여들어 떠받들게 되는 대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달변은 아니어도 논리정연하고 직관과 통찰력이 넘치는 그의 언변은 제왕에게 주어진 홀과 같았다.
나는 왜 서른 살이나 어린 나이로 그의 여자로 살기로 했을까. 그것은 소금가마니를 짊어지고 타는 듯한 폭염의 사막을 건너려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사이엔 고개를 두고 한쪽은 올라가고, 다른 한쪽은 내려가는 것만큼의 윤회의 격차가 있었다.
검은 숯이 희게 씻길 때까지…
지금 생각하면 생명을 구할 묘약이 있다는 수양산을 찾아 여정에 오른 베리데기가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한테서 길을 가르침 받기 위해, 한 생애에서는 다리 놓는 사람에게 무쇠다리 아흔아홉 칸 다 놓아주고, 또 한 생애에서는 숯 씻는 사람에게 검은 숯 희게 씻어주고, 그 다음 생애에서는 아들 없는 사람에게 아들 구형제 낳아주고… 하는 식으로 수양산에 조금씩 다가가는 것같이, 나도 머나먼 구도(求道)의 여정에서 그와 운명을 엮어 치러내면서 가르침 받아야만 했었다고 깨달아진다. 그를 통한 내 운명의 화두는 순종이었다.
나는 그를 통해 윗질서에 거역 않는 순하디 순한 성품을 내 안에서 실현해내려 애썼다.
그와 사별한 뒤 7년 넘게 오늘날까지 성경을 공부해오면서 나는 깨닫게 되었다. 오만하기가 검은 숯 같은 인간의 자아가 희게 씻기는 데만도 얼마나 많은 생이 필요한가.
이승에서 너무나 짧게 함께했던 세월이었지만 이제서야 구도의 도정에서 몇 생애는 앞서가셨던 아버지의 마음자리에, 나는 언제나 다다르게 될지 그리운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