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에서 가장 좋은 정수기를 판다.” 한우물정수기의 강송식 사장은 자신이 팔고 있는 정수기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다.
- 20년의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1985년 전기분해식 정수기를 개발한 그는 최근 약알칼리수가 몸에 좋다는 인식이 일반인들에게 점차 확대되자 행복한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16부나 되는 고리 사채까지 빌려야 했을 정도로 힘겨운 시절도 있었지만, 좋은 물에 대한 믿음 하나로 굳건히 버텨온 17년 ‘물장사’ 이야기.
서울 성북구 보문동은 전기분해식 정수기인 한우물정수기의 본고장이다. 1985년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여건이 나아질 때마다 공장과 사무실을 넓혀가다 드디어 6개월 전 비록 옥탑방일망정 사장실도 하나 마련하게 된 것이다. 길가의 3층짜리 낡은 벽돌건물 지하에는 공장과 연구실이 자리하고 있고, 10평 남짓한 1층 사무실에는 대여섯 명의 직원들이 주문전화를 받느라 분주하다. 아무래도 ‘폼 나는’ 사업 모양새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강사장은 모양새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좋은 물을 마실 수 있게 하기 위해 사업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물장사’를 하면서 ‘매출이 얼마가 늘었다, 사업제휴가 들어왔다’는 등의 이야기보다는 ‘우리 정수기를 쓰고 아픈 데가 나았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더욱 자랑스러워했다.
당뇨병과 피부병에 효험
강사장에 따르면 한우물정수기로 건강을 되찾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그 중에는 당뇨병과 피부병을 고치고, 허약한 체질을 개선했다는 사람도 많다.
지난 1996년 SBS에 그 사연이 방영된 박모씨는 피부병을 고친 대표적인 케이스. 수의사인 박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전신피부병을 앓았다. 아토피, 알레르기, 피부진균, 세균성피부염 등 복합적인 진단을 받은 그는 비듬과 가려움증, 통증 등을 호소했다. 동물병원을 운영하면서 고객들에게 흉한 얼굴을 숨기려고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일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고등학교 은사인 강사장이 약알칼리수를 만드는 정수기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당장 한우물정수기를 구입했다.
이 정수기 물을 수시로 마시고 밥까지 지어먹은 지 1~2개월 후, 박씨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온몸에 각질이 일더니 가려움증과 발적(發赤) 증세가 없어진 것. 2001년 방영된 SBS ‘아는 것이 힘이다’란 프로그램에 비친 박씨 얼굴은 여느 건강한 남성의 얼굴처럼 윤기가 흐른다. 이후 박씨가 한우물정수기의 자발적 홍보맨이 된 것은 당연한 일.
40대 후반인 이모씨는 당뇨병 합병증을 앓다가 한우물정수기 물을 마신 후 그 증세가 호전된 케이스다. 대기업 임원으로 일하던 이씨는 바쁜 직장생활로 당뇨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실명을 하게 됐다. 또 온몸에 진물이 흐르고 가려움 증세가 나타나는 등 피부가 많이 손상됐다. 병원을 전전하던 중, 이씨는 한우물정수기를 사용하는 동서가 “술 마신 후 자기 전에 물 한 컵 마시면 아침에 숙취가 남지 않는다”고 해 같은 정수기를 구입했다. 그리고 3개월 후, 가려움증이 사라지고 피부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비록 앞을 볼 순 없지만, 23가지나 됐던 합병증도 그 수치가 대부분 정상으로 돌아왔다.
한우물정수기는 역삼투압방식을 사용하는 대기업 제품들과 달리 전기분해식 정수기이다. 전기분해과정을 거쳐 수소이온의 농도(pH)가 서로 다른 세 가지 물을 만들어낸다. pH 7.4~8.5인 약알칼리수와 pH 9~10의 강알칼리수, pH 4~5의 약산성수가 그것(pH 7이 중성으로, 보통 수돗물이 pH 7을 띤다).
이 세 종류의 물은 각각 용도가 다르다. 약알칼리수는 마시는 물이고 강알칼리수는 야채나 과일을 씻거나 세탁을 하는 데 사용하는 물이다. 약산성수는 피부를 씻는 데 쓰인다.
한우물정수기로 건강을 되찾은 사람들은 이 세 종류의 물 중 약알칼리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약알칼리수란 전기분해를 통해 음(-)극에 모인 물로 칼슘, 마그네슘, 나트륨 등 양이온과 수소이온이 풍부하다.
알칼리성과 산성이 만나면 중성이 된다는 것은 기본적인 과학상식이다. 즉 약알칼리수가 우리 몸 속에 들어가 노화의 원인인 활성산소와 결합해 물이 되면서 활성산소를 없애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약알칼리수가 우리 몸 속의 나쁜 노폐물들을 모두 가지고 몸밖으로 나가는 셈이다.
일본의 물 전문가인 의학박사 하야시 히데미쓰는 자신의 저서에서 “물을 전기분해해서 나오는 전해 알칼리수에는 활성수소가 풍부하게 들어 있으며, 이 활성수소가 만병의 근원인 활성산소를 없애준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편 연세대 김현원 교수(생화학과)는 “전해 약알칼리수의 기능성은 활성수소가 많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전기분해 과정에서 생기는 전자 때문일 수 있다”고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아직 의학적으로 명확한 결론이 난 것은 아니지만, 약알칼리수가 활성산소를 제거하고 산성화된 신체를 알칼리성으로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점차 인정되고 있는 추세다.
교직생활 그만두고 ‘물장사’에 투신
이렇듯 몸에 좋은 물을 만드는 법을 개발한 강사장이지만, 그가 처음부터 약알칼리수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세간에는 그가 산속에서 흘러나오는 약알칼리성을 띤 약수를 마신 덕분에 간염과 동맥경화 등이 완치됐고, 그를 계기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알칼리수를 만드는 정수기 개발에 뛰어들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 그는 부황의 효능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교사직을 그만뒀다.
“제가 술을 좋아합니다. 1978년 결국엔 간염과 동맥경화, 고혈압 때문에 분필조차 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됐어요. 병원을 다녀도 차도가 없어서, 집에서 식이요법과 부황으로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20일 만에 완치가 된 거예요. 제가 영어교사였는데, 영어야 누구나 가르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에 미련 없이 20년 교직생활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부황의 효능을 알리는 일에 나섰죠.”
전남 군산의 가난한 집안 출신인 강사장은 어렵사리 교사가 됐다. 군산고교에 입학하고 사흘이 지났을 때, 홀어머니에게 ‘둘째아들 서울 올라갑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줄 아십시오’란 당돌한 내용의 쪽지를 남기고 상경했다. 대한인쇄공사 견습공으로 취직해 낮으론 일하고 밤으론 공부를 하다 배가 고파 기절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경기고등학교에 합격했다. 박찬종 한나라당 상임고문이 그의 동기.
고등학교 3년 내내 입주과외지도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고, 졸업 후엔 건축회사와 미군 PX 등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공부했다. 그리고 2년 후 서울대 사범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그가 교직생활을 정리했던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부황이 지금처럼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그는 교직에 있을 때 폴란드의 노동운동가 바웬사를 본딴 ‘강웬사’란 별명과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치를 본딴 ‘강스탈로치’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좀 부당하다 싶거나 학생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교육청이건 교장실이건 찾아가 시정을 요구하는 등, 고분고분한 교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돌연 사표를 내자 여기저기서 그 이유를 궁금해했고,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황이 고혈압이나 당뇨에 좋다는 것을 경험에 비추어 설명하고 다녔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전기분해식 정수기 개발에 나선 것은 1985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전부터 약알칼리수를 만드는 정수기를 개발하고 있는 한 연구가를 알고 지냈습니다. 저는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물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그와 동업을 시작했지요. 1985년 12월엔 드디어 정수기 개발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정수기 개발 후 사업은 더욱 악화됐다. 모양새부터 촌스러운 정수기를 몇십만원씩 내고 사줄 사람은 없었다.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떠맡기다시피 팔러 다녔지만 사업비는 늘 쪼들렸다. 집도 날릴 뻔하고 16부나 되는 사채를 쓰기도 했고, 이혼 위기도 겪었다. 동업하던 연구가마저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시간제 교사와 학원 강사로 나서면서도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강사장은 “날뛰는 호랑이 꼬리를 잡고 있는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점차 사용자들 사이에 한우물정수기의 탁월한 효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수기 물을 마신 이후 건강해졌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렇게 건강을 찾은 사람은 자발적인 홍보요원이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한우물정수기를 권했다.
“정릉에 가끔 가는 카센터가 있어요. 거기 사장님이 하루는 아내가 3년째 당뇨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길래 우리 정수기를 써보라고 했어요. 비싼 외제정수기를 산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해서, 일단 써본 후 돈을 내라고 했죠. 40일 만에 사장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이제 등산을 할 정도로 건강이 회복됐다며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면서요. 그 후로는 그 카센터를 찾아가지 못합니다. 저한테는 수리비를 받지 않으려 하거든요.”
약알칼리수 효능에 대한 과학적 입증도 점차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2년 한국일보에 ‘마시는 물은 약알칼리성이 좋아’란 제목의 기사가 났다. 이 기사는 한국과학기술원 전무식 박사가 일본 의과대학팀과 공동으로 암세포 배양실험을 했는데, 산성 물에서는 암세포가 12만~320만개로 증식했지만, 알칼리성 물에서는 암세포가 6분의 1 수준인 2만개까지 대폭 감소했다면서 마시는 물은 약알칼리성이, 미용을 위한 씻는 물은 약산성이 바람직하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에도 약알칼리수가 몸에 좋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까지 속속 발표되고 있다.
가격 내릴 궁리하는 엉뚱한 사장
그렇게 입소문이 나면서 한우물정수기를 찾는 사람도 많아지고, 회사 식구도 늘어갔다. 그러나 17년 동안 단 한번도 흑자를 낸 해가 없다고 한다. 강사장은 영업인력을 새로 꾸리거나 홈쇼핑에 정수기를 내놓거나 제조만 하고 판매는 유통업체에 맡기는 등 사업방식의 전환을 아예 생각조차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그렇게 되면 정수기 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현재 한우물정수기 가격은 89만1000원으로, 100만~200만원에 달하는 대기업 제품보다 훨씬 저렴하다. 강사장은 “돈 없는 사람에겐 89만원도 비싸다”며 “좀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정수기를 찾는다면 가격을 더 내릴 수 있을 것”이라며 한우물정수기 소문이 더 많이 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그는 지난해 고객들에게 ‘한우물정수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권해서 구입하게 해주시면 감사의 뜻으로 10만원을 드리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한우물정수기를 구입하려는 사람 10명 중 7명은 주변의 권유를 받아 구입하려는 사람이고, 나머지 3명은 언론보도나 광고를 통해 알고 연락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고객들로부터 거친 항의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 물이 너무 좋아서 혼자만 마실 순 없어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인데, 한우물정수기측에서 판매사례비를 준다면 괜한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이 계획은 결국 취소됐다.
FDA 검사 통과한 유일한 정수기
한우물정수기는 지난해 12월 미국연방식품의약국(FDA) 검사를 통과해 제품의 안전성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7년 전부터 한우물정수기를 사용하는 한 고객이 “이런 제품이라면 검사 통과가 확실하다”며 절차를 밟아준 덕분이다. 우리나라 정수기 제품 중 FDA 검사를 통과한 제품은 한우물정수기가 유일하다.
최근에는 주문량이 지난해에 비해 두 배 가량 늘었다. 언론에서도 점차 주목을 받아, 지난 4월 KBS ‘생로병사의 비밀’이란 프로그램에서 알칼리이온수가 노화와 성인병 예방 등에 효과가 있다는 내용이 방영되면서 나타난 결과다. 강사장은 “올해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할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한우물정수기의 물맛은 또 하나의 매력이다. 한 고객은 미국으로 출장을 갈 때 일정에 맞춰 물을 챙겨갔는데, 일정이 사흘이나 길어지는 바람에 물이 모자라 고생했다고 한다. 김대성 한국차인연합회 수석전문위원은 저서 ‘차문화 유적답사기’에서 한우물 물맛과 관련한 재미난 에피소드를 전한다.
소문난 찻꾼인 최모(57)씨는 내로라하는 석간수를 찾아 전국을 누비는 사람인데, 1993년 우연히 한우물 물맛을 보고는 이 물의 마니아가 됐다고 한다. 최씨는 “성인병에 좋다느니, 전극이 어떻고 이온이 어떻다느니 하는 것은 난 몰라요. 문제는 내가 찾아 헤매던 바로 그 물이라는 거죠”라며 물맛을 극찬했다고. 강사장은 “한우물을 먹는 사람들은 등산할 때 빈 물통을 가져가 약수를 떠오는 게 아니라, 한우물을 챙겨가 마신 다음 빈 물통을 들고 하산한다”고 말한다.
강사장은 “한우물정수기 사업이 안정되면 부황의 효능을 밝히고 알리는 데 주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좋은 것이라면 단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안달하는 천성. 온 국민을 좋은 것을 알려주고 가르쳐야 하는 제자로 여기는 듯한 그는 20년 전 교직생활을 접었음에도 여전히 교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