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고? 재판은 말로 하고 판결은 짧게 해야
- 인사청문회 때 판사들로부터 ‘표정 풀라’는 쪽지 받아
- 그동안의 사법개혁은 모두 법원과 판사를 위한 것
- 대법관의 자질은 전문지식, 합리적 판단력, 인품
- 대법원장 몫 공직 추천 때 사법부 주류 시각 반영할 것
- 사형제 폐지엔 찬성, 간통죄 폐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대법원장은 사법행정의 최고 책임자다. 대(對)국민 서비스의 지휘감독자가 절간의 수도승처럼 처신함이 과연 국민을 위한 봉사라는 민주사법의 요청에 맞는지 검토해볼 때가 됐다.
필자가 기억하기에 대법원장 단독 인터뷰는 사법사상 처음이다. 이용훈(李容勳·64)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오랜 관행을 깨고 ‘신동아’ 인터뷰에 응한 것은 ‘국민을 섬기는 사법부’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사법부’로 탈바꿈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재야에 있을 때 대법원에 설치된 법관인사제도개선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다. 필자는 그 위원회에서 언론계 대표로 위원을 했다. 필자는 ‘신동아’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모아 책을 펴낼 때마다 이 변호사에게 한 권씩 증정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대법원장 물망에 오르내렸기 때문에 필자로서는 그가 대법원장이 될 경우에 대비해 ‘장기 투자’를 한 셈이다. 나중에 대화를 통해 이 변호사가 책을 다 읽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지형 대법관 언급은 의외
이 대법원장의 열린 생각과 필자와의 인연이 2006년 신년호 ‘신동아’ 인터뷰를 성사시켰다. ‘사법사상 처음’이라는 부담 때문에 인터뷰에 응한 이 대법원장이나, 인터뷰 내용을 기록할 필자나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필자가 “대통령 인터뷰보다 따기 힘든 인터뷰를 수락해줘 고맙다”고 감사의 뜻을 표하자 이 대법원장은 “매달 귀찮게 했잖아”라고 받았다. 실제로 이 대법원장 취임 이후 필자는 공보관을 통해 매달 인터뷰 요청을 했다. 이렇게 빨리 이뤄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 대법원장은 “황 위원이 법관인사제도위원 했다고 나한테 반(半)강요한 것이지. 그런데 이번에 새로 임명된 김지형 대법관과 고등학교 동기라지요?”라고 말했다. 필자가 “김 대법관이 자수했습니까?”라고 묻자, 이 대법원장은 “자수 안 했어. 아침에 다른 사람이 말해주더군요”라고 말했다.
가벼운 농담이 이어지는데 속기사가 계속 받아적자 그가 “그런 것까지 적나요?” 하고 물었다. 필자가 “걸러내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
-친구가 일찍 대법관이 돼서 좋긴 하지만,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대법관 후보를 사전에 언급하는 바람에 조금 이상하게 됐어요. 어쨌거나 천 장관이 언급한 3명 중 2명(김지형, 박시환)이 임명됐잖아요.
“천정배 장관이 무슨 까닭으로 언급을 했는지 몰라요. 불가사의한 일인데…. 우리 법원에 비(非)서울대 출신이 36%입니다. 이번에 유지담 대법관(고려대 출신), 배기원 대법관(영남대 출신)이 퇴직하면서 대법원에 비서울대 출신이 한 명도 없게 됐죠. 비서울대 출신 가운데 대법관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비서울대 출신 후보군(群) 중에서 안팎의 여론을 들어보고 판결문을 검토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두 사람이 경합했는데, 그 가운데 김 대법관을 선택한 것이죠. 다만 호남 사람이 둘(김황식, 김지형)이 돼서 마지막까지 어려웠죠.”
-박시환 대법관은 어땠습니까.
“박 대법관이야 하도 유명한 사람이니까. 시민단체에서 여러 차례 대법관 후보로 추천했을 뿐 아니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서도 추천했죠. 그러니까 천 장관이 박 대법관을 언급한 것은 정치적 배경 등으로 봐서 납득이 되는데 김 대법관은 의외였죠.”
이 대법원장은 국회 임명동의 투표에서 212표를 얻었다. 김황식(243표)·김지형(234표)·박시환(159표) 대법관이 얻은 표를 평균 내면 212표. 이는 묘하게도 지난 9월 국회 임명동의안 가결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 후보자가 받았던 찬성표와 정확히 일치한다.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이 이야기를 꺼내자 이 대법원장은 “세 분이 나와는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진보냐 보수냐 하는 정치권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결국 새로 뽑은 대법관 3인의 성향을 평균 내면 이 대법원장과 비슷한 코드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재판은 사회적 질병의 치유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는 법언이 이 시대에도 맞는다고 생각하는지요. 국민이 큰 관심을 갖는 사건 중에서 그것이 법률 문제와 관련 있을 때도 법관이 꼭 침묵하는 것이 옳은가요.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는 규정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그런 말을 만들었을까요. 민사소송의 대원칙이 구술(口述)주의입니다. 말로 하는 것입니다. 판사가 말 안 하면 어떻게 당사자들의 말을 정리하고 재판을 진행합니까. 공판중심주의도 법정에서 얘기 듣고 재판하자는 것 아닙니까. 판사가 재판 진행하는데 의심 나는 대목이 있으면 물어보면서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동안 판사들이 판결로만 당사자들을 설득하려 노력해왔는데 그게 한계에 부닥쳤다는 생각이 들어요. ‘설득은 법정에서 하고 판결은 간결하게 하라’고 동기부여를 하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이 말을 좀 하고 싶은데 법정에서 말을 못하게 하기 때문에 법원과 국민 사이에 소통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도 어지간한 병은 말만 들어줘도 대충 치료가 됩니다. 하물며 사회적 갈등이 생겼는데 그 사람들의 말을 안 들어주면 어떻게 치유가 되겠습니까. 재판은 사회적 질병에 대한 치유입니다. 사회적 질병은 말로부터 생기고 원한으로 생기는 것이니까 말을 들어줘야지요. 판결문이 간단해지는 것이 세계적 추세입니다. 미국에서도 1심 재판은 대부분 주문(主文)만 나갑니다.”
-우리 법원의 판결문이 긴 편인가요.
“판결문을 길게 쓰다 보면 사실이 아닌 것을 판사가 머릿속에서 궁리해 쓸 가능성이 높아지죠. ‘뼈다귀’만 쓰면 됩니다. 앞뒤가 잘 안 맞는다고 말을 만들다 보면 당사자가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판결문에 쓰게 돼요. 판결문으로 당사자를 설득하려 하면 실패할 수 있어요. 판결문은 누구든지 알아볼 수 있게 간결하게 써야 합니다. 지금은 너무 복잡하게 써서 오히려 이해하지 못해요. 법정에선 아무 소리도 안 하다 판결을 ‘꽈당’ 해버리면 당사자들이 납득하지 못합니다. 지금 모든 국민의 바람은 ‘판사 앞에서 말 좀 하게 해달라’는 거예요.”
-대법원에 식당을 만들어 법관, 법원 직원과 돌아가며 점심을 들며 의견을 듣는다지요? 그 중에 국민에게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는가요.
“전국 법원장 훈시를 하면서 ‘판사들을 만나봤더니 자기 고충 토로나 신분 향상 요구는 많은데 법원이 어떻게 국민의 요구를 더 받아줄지에 대한 처방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판사들이 부글부글한대요.
판사가 스스로 재판한 것을 비디오로 찍어 모니터링해보라고 했죠. 어떤 판사가 자기 재판 광경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집에 가서 틀어보니까 도저히 못 봐주겠더라는 거예요. 자기가 봐도 어떻게 판사가 저렇게 재판할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는 논란 속에서도 공직후보 검증 시스템으로 정착돼가고 있다. 인사청문회를 치른 한 고위 공직자는 청문회 전날 밤 걱정돼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일생을 까발리는 질문을 여러 의원으로부터 돌아가며 받는 일은 당사자에게 더없는 고통이다.
-사법 사상 처음으로 인사청문회를 거쳐 대법원장이 됐는데요. 가장 고약한 질문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불쾌했던 질문이 뭐냐 하면, 강남 재개발 아파트 투기를 해 상당히 돈을 남긴 것처럼 몰아붙인 것이었죠. 사실이 아닌 얘기를 들으니 참 견디기 어렵더라고요. 그때 내 표정이 험악했던 모양이에요. 청문회장에 나와 있는 판사들이 ‘표정을 풀라’고 쪽지를 보내더라고요.”
검찰 출신 대법관도 필요
이 대법원장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 대법원장 자리를 놓고 최종영 전임 대법원장과 경합했다. 대통령과 고향이 같은 점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때 대법원장이 못 돼 서운했겠지만 이번에 63세에 취임해 6년 임기를 채우면 정년(70세)이 거의 되니 오히려 더 잘 됐는지 모른다.
“6년 전 대법원장이 됐으면 국민의 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겠죠. 법원 내부의 시각에서만 법원을 바라보다 끝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요. 재판 수요자의 처지에서 법원을 5년 동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판사들에게 바꾸자고 동기 부여하는 모든 것은 밖에서 법원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출발한 것이죠. 6년 전과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판사만 하면 잘 모르거든요.
6년 전 대법원장이 됐으면 국민의 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겠죠. 법원 내부의 시각에서만 법원을 바라보다 끝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내가 판사들에게 바꾸자고 동기 부여하는 모든 것은 밖에서 법원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출발한 것이죠.
나는 판사들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머리 좋은 사람들이고 대한민국 공무원 중에서 제일 청렴한 집단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신뢰지수는 낮습니다. 우리가 생각만 바꾸면 법원을 잘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대법원장은 2000년 윤영철 변호사와 함께 헌법재판소장 물망에 오르내렸으나 그때도 비켜갔다. 김 전 대통령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었을 법도 한데 그는 2005년 12월8일 DJ의 노벨상 수상 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건배사를 했다. 전직 대통령이라고는 하지만 대법원장이 이런 행사에 참석해 6·15 정상회담을 평가하는 건배사를 한 것도 이례적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갈 때 저도 우려했습니다. 그런데 6·15 정상회담의 결과로 이산가족이 만나고 금강산이 열렸습니다. 개성공단에 한국 기업이 진출했고 백두산도 곧 열리게 됩니다. 김 대통령과 6·15 정상회담은 국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박시환 대법관의 경우 한나라당이 당론으로 반대하는 바람에 다른 두 대법관에 비해 어렵게 임명동의안이 통과됐습니다. 강재섭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2006년 7월 새로 임명될 대법관의 ‘코드 인사’를 막기 위해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더군요. 대법관 제청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대법원은 지역, 출신학교, 연령이 다양해야 합니다. 40대, 50대, 60대가 사회를 보는 시각이 다 다르거든요.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법리 원칙을 제시하려면 최소한 그런 세대를 다 포괄할 수 있어야 하지요. 김영란 대법관이 갓 쉰이 됐다던가요? 그래서 40대인 김지형 대법관을 제청했지요. 2006년에도 똑같은 원칙에 의해서 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40대만 너무 많아도 곤란하지요. 일부는 학계에서도 들어와야지요. 어떤 사람들은 검찰 출신은 필요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법 해석의 최고 원리를 국민에게 제시하려면 검찰의 생각도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다 포괄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법원 내부의 몫이 얼마가 될지는 잘 생각해봐야죠.
지금까지는 기수 순으로 내려가는 식으로 대법관을 선발했죠. 대법원이 고등법원 판결에 대한 사후 심사적 기능만 한다면 그런 방식이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대법원이 정책법원이 돼서 법리해석의 원칙을 국민 앞에 세우는 기관이 되려면 시니어 법관들만 선발해선 안 되겠지요.
대법관에게 필요한 자질은 첫째 전문적인 법률지식, 둘째 합리적 판단력, 셋째 인품입니다. 청렴하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 선발돼야겠죠. 덧붙여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법원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탄핵사건 대리인은 공부의 기회
이용훈 대법원장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 위원 3명(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박보영·오진환 변호사)을 지명했다.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임명 사례에 견주어 비교적 균형감각을 갖춘 인물을 선정했다는 평이 나온다. 대법원장은 중앙선거관리위, 국가인권위, 국가청렴위, 친일진상규명위 위원을 각 3명씩 추천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우리 사회 일각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법치주의라는 헌법적 가치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작금의 현실과 관련해 어떤 원칙을 갖고 위원을 추천할 생각입니까.
“사법부를 대표하는 대법원장에게 지명권을 준 이유는 법치주의 근간인 사법부의 시각을 대변해달라는 뜻 아니겠어요? 원칙적으로는 법원의 주류적 생각을 반영할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법원장한테 추천권을 줄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대법원장 6년 임기 중 2년5개월은 노무현 대통령과, 3년7개월은 후임 대통령과 보내게 됐습니다. 헌법으로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의 임기를 보장한 것에는 임명권자로부터 독립을 보장하려는 뜻이 담겨 있는데요.
“법원이 정치의 영향을 받는 시대는 지난 것 같아요. 대통령과 대법원장의 관계에선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대법원장이 된 지 두 달이 훨씬 넘었는데 재판에 관해 정치 쪽으로부터 한번도 얘기 들어본 적이 없어요. 대법관 제청 과정에서는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대법원장의 할 일이라고 봅니다.”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대법원장 인사청문회에서 사자성어 질문을 즐겨 하더군요. 이 대법원장의 임명을 탄핵심판 대리인을 맡은 데 대한 ‘보은인사(報恩人事)’가 아니라면 ‘무임승차(無賃乘車)’가 아니냐는 질문을 했던데요.
“탄핵 대리인은 그쪽에서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아 한 것입니다. 법률가로서 일생에 한번 맡기 어려운 사건이므로 대리인을 맡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전까지 노무현 대통령을 한번도 만난 일이 없어요. 변호사로서 그 사건을 맡았다는 것과 대법원장이 되는 것과는 전혀 별개라고 생각해요. 그것 때문에 대법원장으로서의 직무수행에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 자체로 대법원장 자질이 없는 겁니다. 수많은 사건을 변호했는데 당사자들로부터 독립이 안 된다고 하면 대법원장을 어떻게 하겠습니다. 내가 국회에서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독재정권의 시녀 노릇을 했던 부처마다 과거사위원회가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습니다. 취임한 이후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있었던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사건의 기록을 수집, 분석해보라고 지시했다던데요. 행정부처럼 과거사위원회는 만들지 않을 건가요.
“우리 법원이 1972년(유신 선포)부터 시작해 1987년(6월 민주항쟁)까지 15년 동안 여러 가지 아픔을 겪었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법정에 나오는 국민이 법원에 대해 존경심을 가졌습니다. 법정에서 노래를 부른다든지, 판사한테 대드는 일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1972년 이후 어느 시기부터인가 법정에서 애국가를 합창하고, 재판장의 말도 안 듣고 몇 시간씩 최후 진술을 하는 어려운 시절을 겪었습니다. 그 시절에 재판을 받던 사람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 진입해 정치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국회에 가서 보니까 여야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분들이 그 시절 재판을 받으면서 법원을 존경하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지 않습니까. 법원 못 믿겠다는 현상은 거기서부터 비롯됐습니다. 우리가 국민을 설득해 다시 존경받는 사법부를 만들어야 합니다.
15년 동안 우리가 국민한테 어떤 일을 했는지도 최소한 알아봐야지요. 국민한테 사과할 것이 나오면 사과해야지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했어요. 그렇다고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어 해결할 일이 아닙니다. 대법원장인 내가 그 시절에 형사재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정한 처지에서 그것을 살펴보고 방책을 만들어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법원, 그것을 넘어서서 존경받는 법원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사법부의 오너는 국민
-형사재판에서 배제된 경위가 궁금하네요.
“내가 왜 형사재판을 안 하게 됐는지 그걸 잘 몰라요. 1972년 10월17일 유신을 위한 계엄령이 선포됐죠. ‘계엄사범’이라는 게 있었어요. 별것도 아녜요. 대마초, 폭력, 그리고 사회 민생에 관한 범죄죠. 엊그제까지 징역 6월~1년에 집행유예 판결하던 사건들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검사 구형대로 징역 3~4년씩 선고하라고 계엄당국에서 법원에 압박을 가했습니다.
의정부 지원에 있을 때였죠. 5∼6개월씩 재판이 밀려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계엄사범을 20일 이내에 재판하라고 하니까 기한을 지키기 위해 먼저 구속된 사람들의 재판을 미뤄놓았죠. 그 사람들이 미결수로 4∼5개월 살았는데 계엄사범도 그만큼은 살아야 된다는 생각에서 징역 4월, 5월 선고하고 말았어요. 그 일로 검찰하고 다툼이 많았지요. 무죄판결을 못하게 하는데 무죄도 선고했어요. 그 일 때문에 내가 형사재판을 못하게 된 것인지 어쩐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그 다음에 정말 형사재판을 거의 못했어요.”
-5공화국 때는 특정지역(호남) 출신 판사들이 성향 분석에 걸려 중요 시국사건 재판이 몰려드는 서울형사지법에 거의 없던 시기도 있었죠.
“꼭 그런 거는 아녜요.”
-필자가 법조 출입을 하던 A원장 때죠.
“아, 그것은 황 위원이 더 잘 알겠죠.”
전수안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가 참여연대에서 내는 ‘사법감시’에 쓴 글에서 “대법원장이 잘못된 과거의 판결들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시환 대법관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인혁당 사건 등 사법부의 어두운 과거사에 대해 반드시 되짚어봐야 하고 법관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구체적인 사건의 판결만 갖고는 얘기할 수 없어요. 판결의 흐름을 보면 우리가 어떤 세월을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구체적인 개개의 사건을 잘됐느니, 잘못됐느니 하고 말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그러려면 새로 심리해봐야죠. 전체적 흐름을 보면 그 시대 재판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으니까 우리 법원이 어떤 식으로 접근할 것인지를 생각해봐야죠. 그 시대의 잘못이 밝혀진다면 사과할 수도 있지요. 지금 분석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죠.”
그는 젊은 시절에 연수를 다녀온 독일의 사법사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법원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말한다.
사법부의 과거를 뒤돌아보고 독립된 사법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독일 헌법재판소가 생겼어요. 독일 법원이 국민의 신뢰를 얻어가는 과정에서 법정도 전부 평면으로 했어요. 법대가 방청석보다 높지 않아요. 앉아서 얘기하는 식으로 재판합니다.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법원이 낮아진 겁니다.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우리도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국민은 법원이 낮아지기를 원해요. 국민을 섬기지 않으면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법원으로 다시 태어나기 어렵습니다. 우리 법원은 독자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아닙니다. 국민에게서 위임을 받아 재판하는 겁니다. 회사에 오너가 있는 것처럼 사법부의 오너는 국민이죠.”
양형 편차는 줄여나가야
-인사정책은 법관들이 무척 예민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2005년 11월21일자로 고등부장 승진자 3명 가운데 11기가 1명, 12기가 2명이더군요. 2005년 봄엔 13기에서 9명이 승진했죠. 과거 같으면 13기나 14기에서 승진하는 것이 관행인데 ‘탈락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구제해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법원에 고등부장이 되지 못하고 남은 지방법원 부장판사가 30여 명 있었습니다. 그들도 퇴직을 안 하고 법원에 남아 있으면 끌어안고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재판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해야지요. 후배 지도와 재판에 임하는 성실성이 남다르고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기회를 줘야 법관 단일호봉제 취지에 맞다고 생각했어요.”
소위 권력층, 유력층에 대한 유전무죄(有錢無罪)의 판결 경향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다. 돈이 있어야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선 판사의 고무줄 양형(量刑)에 대한 비판 의견도 종종 나온다.
-사법제도개혁추진위(사개추위)에서 양형 기준법안을 만들고 양형 기준을 벗어난 판결을 할 때는 그 사유를 판결문에 적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한다고 하는데요.
“사실 사건마다 양형의 인자(因子)가 다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똑같은 사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똑같이 5000만원 뇌물 받았다고 해서 양형이 같아야 하는 건 아니죠. 사람마다 출생과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5000만원의 사용처도 다르죠. 양형은 숙명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다만 비슷한 인자를 가지고 있는데 판사마다 양형이 달라지는 것은 곤란하지요. 양형 기준을 만들어도 양형의 편차는 있을 수밖에 없어요. 심한 편차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제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만능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판사들한테 ‘우리 사회가 청렴한 사회로 되지 못한 데는 판사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어요. 남의 집에 들어가 1억원어치 물건을 절도한 사람에게 실형을 선고하지 않는 판사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래놓고 200억원, 300억원씩 횡령한 기업 임직원을 집행유예하는 판결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국민이 법원의 양형을 신뢰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부패가 줄어들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선거재판에는 아직도 ‘80만원짜리 판결’이 많다. 예를 들면 열린우리당 한병도 의원(전북 익산 갑) 같은 경우 검찰 구형이 벌금 300만원이었는데 군산지원에서는 1심이 검찰 구형보다 많은 1000만원으로 올라갔다가 광주고법으로 가서는 80만원으로 내려갔고 대법원의 상고 기각으로 의원직을 지켰다.
-사법부가 선거재판에서 엄정한 재판을 누차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80만원짜리 판결이 많이 나오는 데 대해 비판 여론이 높습니다.
“선거법 위반으로 100만원 이상 양형이 선고되면 의원직을 상실하니까 80만원짜리 판결은 국회의원직을 지켜주기 위한 판결일 거예요. 그 판결의 주안점은 국회의원직을 유지함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판단입니다. 양형 자체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요.”
-인사청문회에서 어떤 국회의원이 전관예우를 받은 것 아니냐고 물으니까 ‘나는 전관박대(薄待)를 받은 거 같다’고 말했던데요. 법원의 전관예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는 건지요. 청문회에서 전관박대라는 표현을 쓴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나도 대법관을 해봤으니까 승소할 만한 사건이라고 판단해 사건을 맡았는데 생각과 다른 판결이 나오는 경우가 꽤 많아 그런 말을 한 거죠. 우리 판사들이 원고승소냐 피고패소냐 하는 결론을 내는 면에서는 전관예우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절차를 진행하는 데 편의를 봐주는 측면이 아직도 남아 있고, 국민은 법정의 모습만 보고 판결의 결론을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의해야지요. 실제로 법원 출신 중에서 전관예우 안 해준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사개추위 안(案)대로 고등법원 상고부가 만들어지면 대법원은 정책법원으로 가고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늘어날 듯합니다. 고등법원 상고부의 재판부는 어떻게 구성됩니까.
“대법관에 준하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들로 구성된 재판부를 구성해야 되겠죠. 3명의 법관이 재판장을 돌아가며 맡고요. 지금 대법원 재판은 법률해석의 원칙을 제시하기보다 사실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고등법원 상고부가 생기면 진짜 법률해석에 관한 사건만 대법원에서 하게 되겠죠.”
사회적 분쟁은 신속 처리가 관건
-천성산 터널 공사중지신청 같은 사건이 전원합의체 판결로 넘어갈 수 있다는 예상 기사가 나왔던데요.
“그 사건은, 내가 기록을 검토해보니까 전원합의를 하기엔 적절하지 않습니다. 지금 고등법원에 있지만 새만금 사건 같은 것이 대법원에 올라오면 전원합의로 할 수 있겠죠.”
-새만금 방조제와 갑문공사 등 외곽시설이 92% 완공됐습니다. 법원 판결이 뒷북치는 것 아닙니까.
“법원 판결을 ‘하수처리장’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잘못하다가는 ‘장의사’ 노릇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판사들에게 했어요. 다 죽은 사건 뒤치다꺼리해서야 되겠습니까. 최소한 사건이 마무리되기 전에 법원이 처리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판사들한테 사회적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분쟁을 신속히 처리해야 법원이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에서 부시와 고어가 대통령 자리를 놓고 다퉜을 때 연방대법원까지 네 번 재판했습니다. 11월7일 투표하고 2, 3일 동안 개표하다가 문제가 생겨 소송으로 번졌고 12월12일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달 남짓 걸린 거죠. 플로리다주 법원에서 세 번, 연방대법원에서 한 번 재판했는데 그 기간밖에 안 걸렸단 말이죠. 그래서 헌정(憲政) 중단 없이 대통령이 선출됐습니다. 그 소송이 한 2년 걸렸다고 생각해보세요. 대통령이 없는 나라가 2년 계속되는 거지요. 우리도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신속히 대응해 법원이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체제로 바꿔가야 합니다.”
이용훈 대법관 밑에서 재판연구관을 하던 법관이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바깥사람도 만나야 사회경험이 풍부해져서 재판을 잘할 수 있다. 매일 기록만 봐야 하니까 도무지 그럴 시간이 없다”고 불평을 했다. 이 대법관은 “세상 경험이 재판기록에 다 들어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넘겼다고 한다. 지금도 같은 생각일까.
“수천 갈래의 다양한 사회경험을 어떻게 판사가 다 할 수 있겠습니까. 폭넓은 경험을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비행기 운항이나 수술 같은 일까지 어떻게 다 경험해볼 수 있습니까. 교양인으로서 건전한 판단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회경험은 해보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을 벗어난 다양한 경험이란 것은 판사가 할 시간도 없고 능력도 없는 것이에요. 음악이나 그림에만 빠져 있는 판사도 균형감각을 상실하기 딱 좋죠.”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군법무관 할 때 26세의 나이에 사형 판결을 한번 해봤어요. 자기 집에 함께 살고 있는 처제와 간통해 장모가 나무라니까 처제와 장모를 카빈 소총으로 쏘아 죽인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했죠. 사형판결을 해놓고 그 사람이 있는 군대 영창에 가봤죠. 크리스마스 무렵의 추운 겨울에 이 사람이 팬티만 입고 있는데, 시뻘건 눈에서 광채가 나오고 몸 전체가 벌개져 있더라고요.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일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사형을 선고할 중대 사건은 대부분 끔찍한 범행이고 피고인이 부인하는 경우가 많죠. 그렇기 때문에 0.1%의 오판(誤判) 가능성이 있어도 사형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 법원에서도 오판 사례가 몇 번 있었거든요.
사형은 결국 국가가 제도로 새로운 살인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신형 제도로 대체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는 지금 종신형 제도가 없어요. 무기징역도 한 20년 살면 감형돼 나오죠.”
판사는 구속 남발 말아야
그는 1970년대부터 어머니와 누나에 이끌려 교회에 다녔다. 그때까지 다른 사람에게는 교회 다닌다는 말은 해도 예수 믿는다는 말은 안 했다. 예수를 제대로 믿은 것은 1978년 독일에 가서였다.
“서울중앙지법 뒤편 지하의 조그마한 교회에 다닙니다. 우리 교회는 장로교 계통 군소 교파죠.”
-우리 사회가 국가보안법 개폐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요.
“국가보안법의 입법 목적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 장치는 어떤 입법 형식으로든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년에 구속사건이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변호사들이 사건 수임이 안 된다고 농반진반으로 불평을 할 정도다.
판사가 외부로부터 독립해 공정한 재판을 하려면 판사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아무런 흠이 없어야 해요.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하지요. 그래야 정말 판사가 사회의 거센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재미삼아 여쭙겠습니다. 대법원장 인터뷰라 독자들이 딱딱하게 생각할지 몰라서요. 간통죄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사회에서 간통죄가 폐지되려면 결혼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야 될 거 같아요. 서양에서는 부부가 결혼하고 있는 동안 다른 성적 관계를 갖는 것을 생각지도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나라 일각에서는 결혼한 사람 중에도 ‘애인이 없으면 바보’라는 이상한 풍조가 있다지요. 과연 간통죄를 폐지해야 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결혼한 후에는 남편과 아내가 결혼의 순결성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혼인의 순결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악용할 소지가 있으니까 폐지했으면 좋겠다는 견해도 있고….”
간통행위 처벌은 헌법상 보장된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관점도 있다.
전문가 참여제도는 시대적 요청
-대법원 전원합의체 심리에 특정분야 전문가가 참여하는 제도를 만든다면서요.
“해양, 특허, 선진금융기법, 의료, 건축 같은 전문분야는 판사들도 잘 모르고 잠깐 공부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관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데 전문가의 조력을 받는 제도를 검토하고 있어요. 어느 신문이 사설에 포퓰리즘이라고 썼더군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 재판의 전문성 강화는 필요한 거예요.
가령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에 관한 연구가 특허 내는 과정에서 특허의 권리범위가 문제가 돼 법원으로 넘어온다면 판사가 줄기세포를 처음부터 공부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면 줄기세포 공부한 사람들한테 물어봐서 재판해야 하는 거죠.
판사의 경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습니다. 내가 고등법원 부장판사 할 때 전기회로에 관한 특허분쟁을 다뤄본 적이 있죠. 양쪽 회사의 전문가들을 불러다 3시간가량 얘기를 듣고 나니까 판단을 할 수 있었어요.
알래스카에서 비행기가 떨어져 미국과 일본 간에 소송이 벌어졌는데, 미국에서는 전원 비행사 출신 변호사가 대리인으로 나왔고 일본은 비행기는 모르고 법률만 아는 생짜 변호사들이 가서 재판했는데 백전백패였죠. 사회가 다양해졌기 때문에 우리 법원도 그런 다양한 경험을 가진 전문인의 조력을 받아야 재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시대가 됐습니다.”
-법원에서 일반직원들은 소외감과 이질감을 갖고 있고 때로는 법관들한테 적대감을 갖기도 한다더군요.
“법관과 직원은 서로 기능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일반직원은 처음부터 기능이 다른 직종을 택했기 때문에 판사한테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판사도 법원 직원에 대해 우리보다 열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죠. 기능이 다를 뿐입니다. 인체에서도 발과 손이 모두 손이 되겠다고 하면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서로 다른 역할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해야 해요.”
-법원행정처장을 대법관에서 장관급으로 바꿨는데요.
“법원행정처장의 대법관 겸임은 5공 때 생긴 제도입니다. 원상복귀한 것이지요. 대법관은 외부 영향을 받지 않고 재판해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법원행정처장은 행정부와 접촉해서 예산을 따내고 국회에서 답변도 해야 합니다. 정치권 접촉이 빈번하지요. 행정부나 정치권과 자주 접촉하는 사람이 재판도 했다가 행정도 맡았다가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 말을 해놓고 필자에게 “동의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필자는 “질문만 할 뿐 답변에 대한 동의 여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부(副)대법원장이라고 불리던 법원행정처장 힘 빼기’라는 내부의 시각도 있다.
‘벙커부장’
-헌법재판소가 사법부 판결에 대해 한정 위헌(違憲)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헌법이 구체적 사건에 관해서는 대법원이 재판권을 행사하는 최고법원이라고 규정하고 있어요. 법률의 위헌 여부에 대해 헌재가 재판하지만 사건의 분쟁을 해결해주는 최고법원은 대법원이에요. 법률을 합헌적으로 해석하는 책임은 대법원에 있지, 헌법재판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법원이 헌재와 다른 견해를 피력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대법원의 견해가 위헌적이라고 헌재가 생각한다면 그 법률에 대해 위헌결정을 하면 되는 거죠.”
그는 설명이 어렵다고 생각했던지 “이해하기 어렵나요?”라고 물었다. 필자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법률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 이해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법원 하급 법관들 사이에는 ‘벙커부장’이라는 은어가 통용되고 있다. 벙커는 골퍼들이 싫어하는 모래 구덩이다. 아마추어는 공이 벙커에 들어가면 보통 한 타를 더 먹기 쉽다. 벙커부장은 배석판사들이 벙커처럼 싫어하는 부장판사를 의미한다.
-‘벙커부장’이라는 말 아시는지요.
“내가 벙커부장이라는 말이 있었다더군요.”
벙커부장의 특징은 자신이 벙커부장인 줄 모르고 배석판사들에게 “요즘 누가 벙커지?”라고 묻는다고 한다. 이 대법원장은 배석판사들이 써온 판결문을 읽다가 법률이론이 틀렸거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표현이 발견되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용훈 벙커부장 밑에서 일은 힘들었지만 배우는 것은 많았다는 이야기를 배석판사들이 했다고 한다.
기왕 골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필자는 법관인사제도위원회 시절 이 대법원장과 함께 라운드를 해본 적이 있다. 이 위원장은 헤드업(머리 들기)이 심해 스코어는 좋지 않았다. 미리 고개를 들고 앞을 내다보는 습관은 골프에서 금기이지만 사법부 운영이나 삶에서는 도움이 될 것이다.
-젊은 법관들에게 인생의 선배이자 법관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시죠.
“판사가 외부로부터 독립해 공정한 재판을 하려면 판사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아무런 흠이 없어야 해요.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하지요. 그래야 정말 판사가 사회의 거센 압력으로부터 독립해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뿐 아니라 가정도 염결(廉潔)한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판사들이 국민의 존경을 받고 사법권 독립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대법원장 취임 직후 ‘우리법연구회’ 같은 조직이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적인 언급을 했는데요. 대법원에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사조직 형태의 연구회가 우리법연구회뿐 아니라 민사판례연구회도 있죠.
“판사와 대학교수들이 학문적 논의를 하는 모임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다만 변호사와 교분을 쌓는 모임이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였죠. 그 모임이 연구만 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들과 술도 같이 먹고 환담도 하다 보면 교분을 쌓게 되고 그 변호사가 맡은 사건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못 가는 곳 많아져 불편
요즘은 시험 봐서 들어가는 분야에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다른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남성은 뇌구조가 책상에 몇 시간씩 묶여 공부하는 분야에서는 여성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시험과목에 게임이나 당구처럼 남성이 잘하는 것도 넣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법관 2144명 가운데 여성 법관이 15%인 317명이다. 여성 법관의 수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
“우리 사회가 21세기에도 살아남으려면 우수한 여성인력이 근로 현장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어느 분야든지 우수한 여성인력을 일선에 투입해야 경쟁력이 생깁니다.”
-속설에 따르면 여성 판사의 양형이 세다고 합니다. 통계적으로도 검증된 건가요.
“여성 법관들이 아직 주도적으로 양형을 할 만한 위치에 오지는 않았죠.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여성 법관들이 재판에 더 엄정한가 보죠.”
-여성 법관과 여성 직원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인사에서는 아직도 소외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더군요.
“여성 법관이 몇 사람 안 됐을 때는 시골에 안 보냈는데…. 아마 전수안, 전효숙, 이영애 같은 시니어 법관은 지법판사 시절에는 시골에도 안 갔을 거예요. 김영란 대법관이 지법판사로서 연고지인 부산지방법원에 근무한 것이 아마 최초일 겁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법원행정처에 여성이 왔어요. 윤승은 사법정책심의관(고법 판사)이죠.”
-법원 하면 고리타분하고 권위주의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국민이 많거든요. 법원 내부에서는 법관들이 열심히 일하고, 아까 말한 대로 공무원 중에서 사생활이 가장 깨끗함에도 정당한 평가를 못 받는 이유가 뭘까요.
“국민과 우리 법원이 접촉하는 창구는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민원부서죠. 그러니까 등기 창구나 일반 접수 창구에 국민이 와서 서류를 접수하고 물어봅니다. 그것은 심판 기능이 아니라 민원 기능이기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국민이 정말 법원이 바뀌었다고 느끼게 해주어야 하지요.
심판 기능은 공정성이 그 생명입니다. 법정에서 당사자들이 공정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절차가 진행돼야 합니다. 이 두 군데의 내용물이 바뀌면 국민으로부터 달라졌다는 얘기를 들을 것입니다.”
이 대법원장은 취임 후 법원 사무국장들에게 은행이나 동사무소를 돌아다니며 배울 것은 배우라고 지시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원실이 완전히 바뀌었죠. 황 위원이 한번 들러 직접 확인해보세요. 민원인을 위해서 의자도 배치해놓고 병원 창구처럼 번호표 받아서 접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발상만 바꾸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현직 대법원장으로는 처음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
“○○법원에 가면 남자보다 훨씬 폭탄주 잘 마시는 여성 법관도 있다던데…. 개인차가 있겠죠.”
-대법원장이 돼서 불편한 점은 없습니까.
“마음대로 못 돌아다니겠어요. 내가 가고 싶어도 옆에서 ‘거기 가면 안 됩니다’ ‘의전에 문제가 있습니다’고 해서 못 가는 곳이 많아요.”
정의로운 재판으로 믿어달라
이 대법원장은 본가와 처가가 모두 독립운동 가계(家系)다. 장인 고영완(高永完)씨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함흥교도소에서 3년간 복역했다. 광복 후에는 2, 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부친 이태래(李泰來)씨는 일본에서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했다가 징역 6월을 살았다. 부친은 이 대법원장의 할아버지가 일본인 순사에게 맞고 돌아오자 형제가 합세해 순사를 두들겨팼다. 당시 순사 폭행은 중죄였다. 다른 사람의 여행증을 빌려 일본으로 밀항했다. 1941년 초 부친이 한국에 몰래 들어와 고향 집에 와서 이틀가량 묵고 갔다. 그해 이 대법원장이 태어났다. 이 대법원장은 1941년 12월26일생이다. 호적이 두 달 늦다.
이 대법원장은 며칠 전 고향인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강골마을에 다녀왔다. 강골마을은 1000여 년 전부터 전주 이씨, 광주 이씨, 양천 허씨가 모여 살았다. 민속문화재 4건과 전통 기와가옥 30여 채가 잘 보존돼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 할 때 시골 초가집을 모두 없앴는데, 강골마을 집들이 잘 보존된 것은 기와집이 많아서 그랬던 모양이죠.
“거기는 개량할 게 없는 동네죠. 보존할 가치가 있는 좋은 한옥이 8채 있어요.”
-강골마을에 생가가 남아 있습니까.
“집은 허물어져서 집터만 남아있어요.”
슬하에 2남1녀를 뒀다. 큰아들은 조흥은행에 다니고 둘째아들과 며느리가 ‘조선일보’ 기자다. 셋째는 딸이고 사위는 검사로 있다.
-청문회에서 가인 김병로 선생과 박대균 변호사를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지요.
“의원들이 보낸 질문서에 강경지원에서 함께 근무했던 박 변호사만 썼더니 판사들이 한 명은 더 있어야 한다면서 김병로 선생을 써넣었어요. 가인이 훌륭한 법조인인 줄은 알지만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이 없어서요. 서울대의 곽윤직 교수도 존경해요. 우리나라 법률가 중에서 그렇게 후학을 많이 길러낸 분이 없거든요.”
-2006년 신년을 맞아 법관들과 국민에게 덕담을 해주세요.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 때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백악관에서 근무하던 찰스 콜슨 변호사가 재판을 받게 됐어요. 워터게이트 사건을 재판한 판사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양형이 높고 한 사람은 낮았던 모양입니다. 양형이 높은 쪽에 배당돼 변호사들이 법관기피신청을 하자고 하니까 콜슨은 ‘미국 국민은 판사들이 한 재판을 정의로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는데 변호사인 내가 이 약속을 깬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며 기피신청을 하지 않았답니다. 징역 4년을 받고 복역했지요.
성경과 목민심서
판사들이 재판을 공정하게 하려고 노력하니까 국민 여러분도 약속을 깨지 말고 판사들이 한 재판을 정의로운 재판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그는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을 꼽아보라고 하자 주저 없이 성경이라고 말했다.
“성경은 20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어도 우리 생활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살아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법원장은 성경을 열네 번째 읽고 있다.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대보라고 하자 “너무 많아 대기 어렵다”면서 재판과 관련된 레위기 19장 15절을 인용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斗護)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대법원장 접견실에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글귀가 벽을 장식하고 있다.
聽訟之本在於誠意誠意之本在於愼獨(송사를 살피는 근본은 성의에 있고 성의의 근본은 스스로 양심에 부끄럼이 없도록 신중히 하는 것이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한승 대법원장 비서실장 대행(부장판사)이 배석했다. 이 인터뷰를 위해 김영란·김지형 대법관, 김종훈 변호사, 인천지법 김영혜 부장판사, 대법원 이정석 공보관(판사)으로부터 도움말을 들었다. 지면을 통해 감사드린다. 송구영신(送舊迎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