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베풀고, 또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성숙해지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성장한다. 국경을 뛰어넘어 30년 우정을 이어온 두 원로의 이야기는 상생의 원리를 새삼 일깨워준다.
박유재 회장은 오늘의 에넥스가 있기까지 니시다 야스마루 회장(오른쪽 사진)의 도움이 컸다고 말한다.
주방가구 전문기업 에넥스(ENEX)의 박유재(朴有載·72) 회장은 우리나라 부엌을 현대적으로 바꾼 일등 공신이다. 1971년 ‘오리표싱크’를 설립해 입식부엌 도입에 앞장선 그는 1992년 회사명을 에넥스로 바꾸고 신세대 주부의 감각에 맞는 주방가구를 속속 내놓고 있다. 박유재 회장은 국경을 초월해 자신에게 큰 도움을 베푼 소중한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박 회장의 꿈은 과학자였다고 한다. 세월 따라 꿈도 변하게 마련이지만 박 회장은 꿈을 바꾸기 전에 이미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대학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운 그는 삼중물산 박진권 사장이 주는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이어갔다. 당시 무역회사이던 삼중물산의 박 사장은 동향(同鄕)의 고학생들에게 월 5000원씩을 지원했다. 고향이 같다지만 일면식도 없는 풋내기에게 흔쾌히 장학금을 지원해준 게 고마워 박 회장은 일주일에 한 번씩 삼중물산에 나가 일을 도왔다. 무역은 박 회장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매주 한 번 경험하는 무역 업무에 흠뻑 빠져든 박 회장을 눈여겨본 삼중물산 박 사장은 그에게 졸업 후에도 계속 회사에 나오라고 권했다. 정식 입사를 제안받은 것이다.
그렇게 삼중물산에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박 회장은 1963년에 회사를 나와 독립했다. 그때 나이 겨우 스물아홉. 제일도기라는 상호를 내걸고 외국에서 도기를 수입해 국내 도기상에 파는 일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외국의 선진 부엌가구를 접하고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다.
선사하고픈 부엌
“외국인 친구의 집에 초대받아 가보면, 부엌이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어머니는 물론 모든 한국 여성에게 외국의 부엌을 통째로 들고 가 선사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196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중상류층을 중심으로 재래식 부엌을 개량하고 싶어하는 수요가 늘었다. 1962년 6월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누구나 꾸며놓고 싶은 합리적인 시범부엌’ 기사에는 당시 연세대 건축사무소장 유관우씨가 설계한 2평 크기의 ‘시범 부엌’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화덕 2개에, 연탄가스와 음식냄새를 빼내는 환기 장치, 그리고 싱크를 설치했다. 싱크 아래에 만든 수납장은 바닥을 시멘트로 해서 김치항아리를 넣게 하고, 싱크 위 왼쪽엔 주걱걸이용 못을 댓 개, 그 아래엔 행주걸이 막대기를 서너 개, 오른쪽엔 긴 나무에 길쭉한 구멍을 뚫어 칼꽂이를 만들었다. 옆으로 꺾여선 꽤 큼직한 ‘카운터(조리대)’를 꾸미고 그 아래에 쌀뒤주를 장모양 함께 붙여서 짰는데, 속엔 함석을 사용하여 습기를 방지하게 되었다. 천장은 ‘텍스’, 부엌바닥은 ‘타일’을 깔았다.”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다
박 회장은 이런 시류를 읽고서 직접 부엌가구를 생산하기로 마음먹는다. 일단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우리나라보다 10년은 앞서 있던 일본의 부엌가구 시장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 3개월을 머물다 돌아와 공장설계 및 기계발주를 거쳐 1971년, 서울 신정동에 오리표싱크의 전신인 서일공업사를 열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부엌가구 생산 공정이 영세해 표면이 매우 거친 제품이 만들어졌다. 표면을 사포로 갈았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거금 5000만엔을 들여 일본 와코사(和光製作所)의 연마기를 수입했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 연마기 생산업체 1위인 와코사의 니시다 야스마루(西田泰丸·81) 회장을 처음 만났다.
박유재 회장(오른쪽)과 박진호 사장. 박 회장의 둘째아들인 박진호 사장은 2002년 에넥스 상무로 입사해 지난해 말 대표를 맡았다.
고가의 연마기는 기대만큼 값어치가 있었다. 품질이 급격하게 향상되고 생산성도 높아졌다. 때마침 여의도에 아파트를 대량으로 짓는 건설 붐이 일어났다. 박 회장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내게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행운은 미리 준비하는 자에게만 옵니다. 일본에서 연마기를 수입해놓았기에 건설 붐에 자신있게 동참할 수 있었던 거죠. 건설 붐을 타고 부엌가구를 대량 생산하고 품질도 높아지니 회사가 쭉쭉 성장했어요. 얼마나 기뻤던지 니시다 회장에게 인사하러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와코사 덕분에 우리 회사가 잘되고 있다고, 정말 고맙다고 했죠. 나중에 니시다 회장이 회상하길, 그때 팔짝팔짝 뛰며 기뻐하던 제 모습이 가까운 동생을 보는 듯했다고 하더군요. 그 뒤로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습니다.”
1960년에 니시다 야스마루 회장이 설립한 일본 와코사는 프레스와 싱크 등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일본 싱크공장에서 사용하는 연마기의 90% 이상을 납품하고 있으며, 스테인리스 욕조 생산판매는 내수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박 회장과 니시다 회장의 국경을 초월한 우정은 몇 해 전 국내 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소개된 적이 있다. 당시 니시다 회장은 박 회장을 가리켜 “만나면 만날수록 좋아지는 사람이다. 학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닌데 여러 분야의 전문지식을 두루 갖추고 늘 노력하는 진지한 사람”이라며 “서로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구별이 안 되는 인간적인 친구”라고 표현했다.
사업상 인연을 맺은 니시다 회장은 박 회장이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인생의 선배로서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다. 박 회장은 30여 년 전 새벽의 일을 잊지 못한다.
“40대 초반일 때일 겁니다. 사는 게 도무지 재미가 없었어요. 당시 대기업 축에 들던 국제상사가 ‘거북표싱크’를 만들어 부엌가구 시장에 진입했기 때문이죠. ‘이제 우리 오리표싱크는 죽었구나, 무슨 수로 대기업의 자본 공세를 감당하나’ 걱정이 태산이었어요. 정신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지다시피 했죠. 머리 싸매고 앉아 먹어대기만 하니 체중이 팍팍 늘어 85kg을 넘어섰고요. 고민 끝에 마침 한국에 머물고 있던 니시다 회장을 찾아가 새벽 2시에 사우나실에서 알몸으로 고백했어요. ‘세상 살기가 싫다’고.”
그런데 눈을 감은 채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니시다 회장의 입에선 뜻밖에도 “사랑하라”는 말이 새어나왔다.
“니시다 회장 자신도 그런 생각을 종종 한 적이 있다면서,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라고 하더군요. 저한테 가장 가까운 사람은 가족이고, 다음은 회사 직원들과 대리점 사장들이죠. 우선 체중을 석 달 만에 11kg 줄이고, 가족한테 마음을 쏟았어요. 사업한다고 밖으로 뛰어다니느라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거든요. 가족에게 마음을 쓰니까 가족들이 기뻐하고, 그 모습을 보니 저도 기뻐졌어요. 회사에선 회의 때면 재떨이를 내던지곤 하던 버릇을 없애고, 직원들에게 부드럽고 상냥하게 대했죠. 금세 회사 분위기가 환해졌어요.”
중소기업은 지프, 대기업은 세단
가족과 직원들에게 베푼 사랑이 부메랑처럼 박 회장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다. 박 회장은 그 뒤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며 손을 잡고 식사를 함께하자고 권했다.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전까지는 바쁘다는 핑계로, 또 좀 성공했다는 이유로 종종 친구를 그냥 지나치곤 한 게 사실이었다. 마음을 고쳐 먹으니 거리에서 아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사랑은 눈이 밝아지게도 하나 봐요. 거리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다음에 또 만날 약속을 잡고, 정을 주면서 친하게 지냈죠. 나중에는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지더군요.”
니시다 회장은 대기업과의 경쟁에 대한 박 회장의 염려도 말끔히 씻어냈다. 니시다 회장의 조언이 걸작이다.
한국의 부엌을 현대식으로 바꾸는 데 앞장서온 박유재 회장.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박 회장은 주변의 권유로 정계에 진출했다. 1981년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11대 국회에 입성했다. 회사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겼다. 당시 오리표싱크는 스테인리스 싱크만 직접 제작하고, 목재 캐비닛은 납품을 받아 완제품 싱크를 판매하고 있었다. 전문경영인 체제에 들어서면서 오리표싱크는 캐비닛도 직접 생산했다.
그러나 박 회장이 4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오리표싱크의 기술력이 경쟁사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그는 40일에 걸쳐 일본과 유럽의 부엌가구 공장 30여 곳을 둘러보았다. 캐비닛 생산라인 교체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귀국한 뒤 캐비닛을 만드는 자동화 설비에 상당한 자본을 투자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 막대한 자본이 투자된 생산라인 가동이 중단됐다.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자본금이 100% 잠식당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는 생각다 못해 일본으로 떠났다. 니시다 회장에게 급박한 사정을 알렸다. 그러자 니시다 회장은 기꺼이 1억엔을 빌려줬고, 박 회장은 이를 토대로 회사채를 발행해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박 회장은 “그때 니시다 회장에게서 돈을 빌리지 못했다면, 오늘의 에넥스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음새 없는 싱크 상판
오리표싱크로 출발한 에넥스는 ‘친환경·고품격 인테리어’를 모토로 1992년, UV 도장제품을 출시해 컬러 부엌시대를 열었다. 2003년에는 가구업계 최초로 우수산업디자인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올해는 ‘워터본(Water Borne)’이라는 신소재를 개발해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워터본은 수성도료를 적용한 소재. 쉽게 말해 싱크 표면을 도장할 때 시너가 아닌 물로 희석한 도료를 사용하는 것이다. 소재 자체에 항균기능도 있다.
에넥스가 이처럼 앞선 기술을 개발하는 데도 니시다 회장이 기여한 바가 크다. 오리표싱크는 1987년 국내 최초로 이음새 없는 싱크 상판을 내놓았는데, 니시다 회장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니시다 회장이 기억하는 당시 상황은 이렇다.
“박 회장이 나를 찾아와 평소 성격대로 다짜고짜 이음새 없는 싱크 상판 설계도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것도 공짜로. 당시 일본에서는 해충과 위생 문제로 이음새 없는 싱크 상판의 인기가 절정이었지만 한국에는 그 기술이 전무했다. 내가 박 회장의 요구를 받아들여 설계도면을 한국에 보낼 때 회사 간부들이 전부 들고 일어나 반대를 했다. 설계도가 일본의 경쟁업체로 유출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박 회장에게 내준 최신 기술은 일본에서도 와코사만이 가진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설계도가 와코사에 얼마나 귀중한 자산인지를 박 회장이 잘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다루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람을 인간적으로 사귀면 국경이 없어진다’며 간부들을 설득했다.”
니시다 회장은 설계도뿐만 아니라 기술자까지 함께 보내주었다. 설계도만 덜렁 던져주면 박 회장이 한국 부엌가구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우수한 기술력 없이는 대기업의 자본력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리표싱크는 와코사에서 파견한 기술자로부터 하이테크를 전수해 최신식 부엌가구를 출시했다. 위생과 해충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이음새 없는 싱크는 주부들로부터 호응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오리표싱크는 난립하던 부엌가구 중소업체들 틈에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했다.
꼭 감은 두 눈, 굳게 다문 입술
사업이 성장함에 따라 박 회장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성격이 괄괄한 편인 그는 위에서 큰소리를 치면 일의 진행이 빨라진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의 급한 성격이 업무 진행 속도를 높이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을 다치는 이들이 생겨났다. 급한 성격 탓에 비즈니스 협상에서 손해를 보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박 회장은 우연한 기회에 니시다 회장의 중요한 회의에 동석했다가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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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다 회장이 일본인 사업가들과의 만찬을 끝내고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기 전, ‘동생처럼 생각하는 박유재 회장이 멀리서 왔으니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회의에 들어가겠다’며 시간을 벌더군요. 그런데 막상 단 둘이 있게 되자 제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눈을 꼭 감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다시 회의장으로 향했어요. 회의가 시작되자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분위기를 주도해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더군요.”
박 회장은 그뒤부터 협상에 임할 때마다 니시다 회장의 꼭 감은 두 눈과 굳게 다문 입술을 떠올리며 만반의 준비를 다 한다. 박 회장은 혈기방장하던 젊은 시절을 뒤로하고 어느덧 칠순을 넘겼다. 니시다 회장은 81세에 이르렀다. 박 회장은 나이와 국경을 뛰어넘어 우정을 이어온 니시다 회장이 오래오래 건강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