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호

조지 스타인브레너 전 뉴욕 양키스 구단주

돈보다 승리를 사랑한 ‘보스’ 새로운 사업 모델 구축한 CEO

  • 하정민│동아일보 DBR 기자 dew@donga.com

    입력2011-04-20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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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와 기업 경영은 공통점이 많다. 성공을 위해서는 뛰어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스포츠계 리더들이 최고의 자리에 오른 비결은 무엇일까?
    • 또 그들의 리더십에서 배울 수 있는 경영 원칙은 무엇일까? 동아일보가 만드는 고품격 경영 저널 ‘DBR(동아비즈니스리뷰)’의 하정민 기자가 스포츠계 리더들의 리더십을 본격 탐구하는 ‘Leadership in Sports’를 연재한다.
    • 첫 번째 대상자는 미국 메이저리그(MLB) 최고 구단인 뉴욕 양키스의 고(故)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다. <편집자 주>
    조지 스타인브레너 전 뉴욕 양키스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표지들.

    “내게 승리는 숨 쉬는 것 다음으로 중요하다. 숨 쉬고 있다면 승리해야 한다(Winning is the most important thing in my life, after breathing. Breathing first, winning next).”

    승리에 대한 갈망을 이보다 더 강렬하고 생생하게 표현하기도 힘들다. 이 말의 주인공은 오직 승리만을 위해 살다 2010년 7월 타계한 조지 스타인브레너 전 뉴욕 양키스 구단주다. ‘보스(The boss)’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양키스를 35년간 통치하며 양키스를 메이저리그(MLB)의 최고 구단이 아닌 현대 스포츠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스타인브레너는 원래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선박 재벌이었다. 그는 1973년 성적 부진과 관중 감소로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양키스를 CBS 방송국으로부터 1000만달러라는 헐값에 사들였다. 당시 구단과 함께 사들인 주차 창고를 CBS에 120만달러에 되팔았으니 그가 실제 양키스를 매입하는 데 들인 돈은 880만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재 양키스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2011년 3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양키스의 구단 가치가 17억달러에 달한다고 밝혔다. 스타인브레너가 인수할 당시보다 180배 이상 불어난 수치다. 양키스는 이 조사가 시작된 1998년 이후 14년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있다. 2위와의 격차도 엄청나다. 2위인 보스턴 레드삭스의 가치는 9억1200만달러로 양키스의 절반 수준이다.

    이는 스타인브레너의 과감한 투자와 공격적인 경영 덕분이다. 사업 수완이 대단했던 그는 케이블TV에 엄청난 금액으로 중계권을 팔고, 스포츠용품업체와 거액의 후원 계약을 맺은 최초의 구단주다. 중계권 재협상시 중계권 판매회사가 양키스를 매입하려 하자 곧바로 자체 방송국 예스 네트워크(YES Network)를 설립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도 개척했다.



    그가 구단주로 재직하는 동안 양키스의 성적 또한 눈부셨다. 1973년 이후 양키스는 7번의 월드시리즈 우승(2009년 우승은 아들 할 스타인브레너에게 구단주 직위를 양도한 후 이뤄짐)과 11번의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일궜다. 양키스는 메이저리그에 속한 30개 구단 중 월드시리즈 우승(27회)과 리그 우승(40회)을 가장 많이 한 팀이다. 양키스의 우승 기록은 미국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도 단일팀 최다 우승이다.

    양키스 다음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많이 한 팀은 10차례 우승을 차지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다. 메이저리그 역사 상 두 자릿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은 오직 양키스와 카디널스뿐이지만 카디널스의 우승 횟수도 양키스에 비교하면 초라하다. 양키스 못지않은 명문 팀으로 자부하는 보스턴 레드삭스와 LA 다저스도 각각 7회, 5회밖에 우승하지 못했다.

    오점 많은 리더? 능력 있는 리더!

    이처럼 훌륭한 성과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스타인브레너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보스’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독선적이고 제왕적인 성격 때문에 악명을 떨쳤다. 일단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단장과 감독을 밥 먹듯 해고하는 일로 유명했다. 그는 재임 기간 무려 20번이 넘는 감독 교체, 10번이 넘는 단장 교체를 단행했다.

    그는 특히 1970~80년대 양키스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빌리 마틴 감독을 5번이나 해고했다가(1번은 마틴 스스로 사임)다시 데려왔다. 1982년에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한 시즌에 무려 3명의 감독에게 팀을 맡겼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플레이를 할 때는 아무리 스타 선수라 해도 공개적으로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부적절한 발언으로 벌금을 낸 횟수도 헤아릴 수 없다. 닉슨 대통령 시절에는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로, 1990년에는 선수의 사생활을 들추다 2번이나 구단주 자격도 박탈당했다.

    스타인브레너는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다른 팀의 스타플레이어들도 싹쓸이했다. 그는 이미 검증된 자유계약선수(FA·Free Agent)를 영입하는 것이 관중 동원의 비결이라고 강하게 믿었다. 그런 믿음으로 관중 유치와 팀 성적 향상을 위해 몸값 비싼 자유계약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하지만 이는 선수들의 몸값을 치솟게 해 다른 팀들의 엄청난 원성을 낳았다.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는 스타인브레너 휘하의 양키스를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다. 실제 양키스는 선수단 전체 연봉(페이롤·payroll)이 2억달러에 달하는 유일한 구단이기도 하다.

    이처럼 많은 논란이 있지만 미국 야구계는 스타인브레너를 최고의 구단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2003년 1월 미국의 유명 스포츠주간지 ‘스포팅 뉴스’는 그를 미국 스포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했다. 프로팀 구단주가 야구, 농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 등 미국 4대 프로 스포츠 종목의 커미셔너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한 건 그가 최초였다.

    그의 성격에 대한 논란은 있을지언정, 그가 미국 스포츠계에 끼친 영향력과 업적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다. 그는 중계권 사업, 후원 계약 등을 통해 메이저리그 구단의 비즈니스 모델을 새로 마련했다. 미국인의 전유물이었던 야구와 메이저리그를 세계인의 오락으로 만드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1986년부터 1996년까지는 미국 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유치 및 개최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스타인브레너는 분명 오점이 많은 리더다. 그는 모든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어했고 잦은 실수와 오판, 심지어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일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도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 있다. 승리에 대한 갈망이 그 어떤 선수, 감독, 단장보다 강했던 인물이 바로 스타인브레너라는 점이다. 과거의 영화에만 젖어 있던 양키스는 그가 구단주로 재직하던 시절에 와서야 메이저리그 최대, 최고, 최강의 명문 팀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성적과 돈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프로 스포츠 세계에서 선과 악을 따지는 일 자체가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능력과 무능력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스타인브레너는 철저히 능력으로 자신의 엄청난 존재 가치를 입증한 구단주였다. 그 어떤 스타 선수보다 더 스타였던 구단주, 단지 양키스 팀이 아닌 메이저리그 전체를 상징하는 구단주가 바로 스타인브레너다.

    양키스 인수와 제국의 재건

    스타인브레너의 본명은 조지 마이클 스타인브레너 3세다. 독일계 후손인 그는 1930년 미국 오하이오 주 로키 리버에서 아버지 헨리 스타인브레너 2세와 어머니 리타 사이에 1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8년 인디애나 주 북부의 쿨버 밀리터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 주의 윌리엄스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미 매사추세츠 공대(MIT)를 졸업한 수재였던 그의 아버지는 자신만큼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 못한 아들에게 칭찬을 해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또 매우 엄격하게 아들을 훈육했다. 이런 성장 환경이 그의 폭군 기질을 부추겼다는 분석도 많다.

    윌리엄스 칼리지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55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체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부터 육상팀의 장애물 경기 스타, 풋볼팀 러닝백으로 활약하며 스포츠에 재능을 보인 그는 학교 신문의 스포츠 편집장을 맡은 적도 있다. 스타인브레너는 오하이오 주립대에 재학할 때 유명 풋볼 코치인 우디 헤이스를 도와 일했다. 1955년에는 노스웨스턴대, 1956~57년에는 퍼듀대에서 풋볼 부코치로 활약했다.

    그는 1956년 엘리자베스 조안 자이그와 결혼해 행크, 할, 제시카, 제니퍼의 2남2녀를 뒀다. 결혼 후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 그는 1957년 집안에서 운영하던 킨즈먼 해운회사에 합류해 어려움에 처한 회사를 정상화시켰다. 1963년 그 회사를 사들였고, 1967년 아메리칸 해운을 인수하며 본격적인 선박 재벌로 이름을 알렸다.

    스타인브레너는 1960년 클리블랜드 파이퍼스라는 농구팀에 투자하면서 스포츠 사업에 발을 들였다. 클리블랜드 파이퍼스는 미국 프로농구 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인 존 매클랜던이 이끌던 팀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2년 만인 1962년 12월 미국 농구리그(ABL)가 파산으로 해체되면서 그의 첫 스포츠 투자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 와중에 그는 브로드웨이의 연극 무대에도 투자했다. 그가 투자한 뮤지컬 ‘시소(Seesaw)’는 1974년 토니상을 받았다. 그의 연극 투자는 198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1973년 스타인브레너는 색다른 모험을 시도했다. 미국 3대 공중파 네트워크인 CBS가 소유하고 있던 양키스를 몇몇 투자자와 함께 1000만달러에 인수한 것이다. 1970년대 초 양키스는 과거의 영화와는 무관한 팀이었다. 양키스는 1960년대 초까지 무려 20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쥐며 메이저리그를 평정했지만 CBS가 인수한 후 연이은 성적 부진으로 관중으로부터 외면당했다. 1966년에는 56년 만에 아메리칸리그 꼴찌까지 기록했다. 전설적인 스타 미키 맨틀이 1968년 은퇴한 뒤에는 내로라할 만한 스타 선수도 없어 관중 동원이 더 어려웠다.

    이 때문에 스타인브레너가 인수하기 직전인 1972년, 양키스는 1945년 이후 처음으로 100만명 관중 동원에 실패하는 수모도 겪었다. 월드시리즈 단골 우승 구단, 메이저리그 최고 인기 구단이라는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었다. 이런 팀을 인수한다는 건 상당한 모험이었다.

    조지 스타인브레너 전 뉴욕 양키스 구단주
    스타인브레너의 양키스 인수는 당시 양키스 사장이던 마이클 버키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그는 스타인브레너와의 불화로 4개월 만에 양키스를 떠났다. 구단주가 되자마자 해고를 단행하며 악질 고용주의 위용을 드러낸 셈이다. 실제로 그가 양키스를 인수한 후 구단 내에는 온갖 논쟁과 의견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인사는 가차 없이 숙청했다.

    하지만 양키스의 영광을 재건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마침 메이저리그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973년 시즌 도중 자유계약선수(FA) 제도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스타인브레너는 애초에는 이 제도를 달갑지 않아 했지만 변화의 바람에 맞춰 공격적으로 유명 선수를 사들였다. 그는 1975년 FA가 된 사이영상 수상자 캣 피시 헌터를 사상 최고액인 5년간 375만달러에 데려왔다. 한 해 뒤에는 당시 FA 최대어였던 홈런왕 레지 잭슨을 5년간 350만달러에 영입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그가 양키스를 인수한 지 4년 만인 1977년 양키스는 드디어 월드시리즈 우승 챔피언을 손에 쥐었다. 바로 다음해인 1978년 2년 연속 월드시리즈를 제패했다. 이때 레지 잭슨이 한 경기에서 3홈런을 몰아치는 등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구 제명에서 부활까지

    2연속 월드시리즈 제패로 한껏 기세를 올린 스타인브레너는 비싼 FA를 사들이는 데 열을 올렸다. 1981년에는 강타자 데이브 윈필드와 전대미문의 10년 2300만달러 계약도 체결했다. 하지만 윈필드는 부상 등의 이유로 돈 값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중요한 고비마다 부진을 거듭하는 윈필드처럼 양키스에는 실패한 FA 선수가 쌓여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막대한 돈을 들여 영입한 FA가 ‘먹튀’가 되자 그렇지 않아도 성정이 격한 스타인브레너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특히 데이브 윈필드를 가장 싫어했다. 포스트시즌에 유독 강해 ‘10월의 사나이(Mr. October)’로 불렸던 레지 잭슨을 기대하고 윈필드를 데려왔건만 시즌 초에만 반짝 잘한다며 ‘5월의 사나이(Mr. May)’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윈필드가 마음에 차지 않았던 스타인브레너는 윈필드가 입단할 당시 그의 재단에 30만달러를 기부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했다. 스타인브레너는 1989년 사설탐정을 고용해 윈필드의 약점을 캐내려 했으나 그의 계략은 곧 들통 났다.

    당시 MLB 커미셔너였던 페이 빈센트는 1990년 스타인브레너를 야구계에서 쫓아냈다. 1974년 당시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에게 불법 헌금을 한 이유로 2년간 구단주 자격을 박탈당한 후 두 번째 퇴출이었다. 1974년과 달리 빈센트 커미셔너는 스타인브레너에게 영구 제명의 철퇴를 내렸다. 하지만 스타인브레너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빈센트가 커미셔너 직에서 물러난 1993년, 그는 복권에 성공했다.

    스타인브레너가 떠나 있던 3년은 그에게는 암울한 시간이었을지 몰라도 양키스 구단으로 보면 썩 나쁘지 않았다. 구단의 모든 사람을 다그치며, 이기지 못하면 즉시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벗으라고 윽박지르던 구단주가 없는 동안 평화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양키스는 성적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유망주를 차근차근 성장시켰다. 버니 윌리엄스, 데릭 지터, 호르헤 포사다, 앤디 페티트, 마리아노 리베라, 폴 오닐 등이 성장하면서 양키스는 또 부활했다.

    영구제명까지 당했다 돌아온 스타인브레너였지만 독선적 기질은 여전했다. 1995년 스타인브레너는 당시 팬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던 벅 쇼월터 감독을 해고했다. 그는 해설가로 일하던 세인트루이스 감독 출신의 조 토레를 영입한다. 양키스에 오기 전 토레는 10여 년 동안 여러 팀을 전전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 때문에 토레의 영입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많았다.

    보스의 퇴장

    하지만 토레 감독은 1996년 부임 첫해 곧바로 18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변덕스러운 구단주를 흡족하게 해줬다. 이후에도 양키스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차례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며 메이저리그 최강 팀의 면모를 되찾았다.

    2000년대 들어 스타인브레너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특히 2006년 손녀의 공연을 보다가 쓰러진 그는 더 이상 걷지 못하고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다. 불같은 호통도 잦아들었고 팀 운영의 상당 부분도 단장에게 양도했다. 결국 2008 시즌 후 공식적인 구단주 자리도 둘째아들 할에게 물려줬다.

    2009년은 스타인브레너에게 특별한 해였다. 우선 양키스 구단주가 된 순간부터 꾸었던 꿈, 새 구장을 완성했다. 비록 건강은 나빠졌지만 그의 사업 수완은 여전했다. 루돌프 줄리아니가 뉴욕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새 구장 건축 계획을 밝힌 그는 줄리아니 전 시장이 ‘구장 건설비 중 절반을 뉴욕 시가 부담할 테니 입장 수입의 4%를 매년 납부하라’고 한 조건을 거절했다. 야구장 건설비, 운영비, 유지비를 전액 부담하더라도 입장 수입을 독점하겠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는 뉴욕 시와 협상한 끝에 신축 구장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받고, 재산세도 면제받는 데 성공했다. 양키스가 인근의 뉴저지 주로 빠져나가면 손해가 막심하다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새 구장에서 치러진 개장 경기에서 관중은 그의 이름 ‘조지’를 연호했다. 천하의 독불장군 스타인브레너도 이때는 눈물을 흘렸다.

    2009년 시즌 양키스는 2000년 이후 9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에도 성공했다. 2010년 4월 건강이 많이 악화된 스타인브레너는 마지막으로 양키스 구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양키스의 캡틴인 데릭 지터와 조 지라디 감독이 2009년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직접 전달했다. 그가 양키스를 인수한 뒤 7번째 우승 반지였다.

    반지를 받고 3개월이 지난 후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사망이 알려진 날 미국 언론은 일제히 헤드라인 뉴스로 이 소식을 전달했다.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은 “지난 40여 년 동안 스타인브레너만큼 뉴욕에 영향을 끼친 인물은 드물다. 그는 뉴요커에게 자긍심을 심어줬다”고 애도했다.

    세계적 CEO에 견주는 이유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스타인브레너가 뛰어난 리더였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그는 웬만한 세계적 기업의 CEO를 능가하는 사업 수완으로 뛰어난 재정적 성과를 올렸고, 마케팅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그렇다면 그와 세계적인 CEO의 유사점은 무엇일까.



    1) 지칠 줄 모르는 투자

    양키스의 과다 지출에 관해서는 아직도 말이 많지만 스타인브레너의 선수 욕심과 거액의 연봉 지불은 확실히 다른 팀 구단주와 차이가 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일시적인 게 아니라 연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1973년 1000만달러에 양키스를 인수한 후 각각 300만달러가 넘는 연봉을 주고 캣 피시 헌터와 레지 잭슨을 영입한 일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회사 가치의 3분의 2에 달하는 돈을 주고 2명의 선수를 사온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후에도 스타인브레너는 데이브 윈필드, 에드 휫슨, 도일 알렉산더, 마이크 암스트롱, 존 메이베리 등을 줄줄이 영입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그의 욕심은 그칠 줄 몰랐다. 알렉스 로드리게스, 자니 데이먼, 마크 텍세이라, CC 사바시아, AJ 버넷, 로저 클레멘스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메이저리그의 별들이 적게는 수백만달러, 많게는 수천만달러를 받고 양키스 유니폼을 입었다.

    그는 스타 영입 후 단순히 팀 성적을 올린 후 해당 선수의 몸값이 비쌀 때 팔아치우는 ‘장사치’로만 행동하지 않았다. 그와 다른 구단주들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많은 메이저리그 구단주는 어렵게 좋은 성적을 낸 후 그 성적의 주춧돌이 된 핵심 선수를 팔아 오랫동안 좋은 성적을 내는 데 실패했다. 대표적 예가 플로리다 말린스의 구단주 웨인 후이젱가다. 1993년 창단한 플로리다 말린스는 창단 4년 만인 1997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케빈 브라운, 개리 셰필드, 롭 넨, 리반 에르난데스 등 거액 연봉의 스타 선수들을 대거 영입한 결과였다.

    하지만 후이젱가 구단주는 우승 직후부터 스타 선수들을 비싼 값으로 다른 팀에 팔고, 자산 가치가 최고조에 달할 때 구단도 매각했다. 스타 선수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선수 영입에도 실패한 플로리다 말린스는 이후 계속 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스타인브레너가 후이젱가처럼 선수들을 팔아치웠다면 어땠을까. 결코 지금의 양키스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조지 스타인브레너 전 뉴욕 양키스 구단주
    종목은 다르지만 축구계에는 구단 운영을 통해 얻은 수입으로 자기 빚을 갚은 구단주도 있다.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말콤 글레이저다. 엄청난 돈을 빌려 맨유를 인수한 글레이저는 수천만달러에 달하는 이자를 갚기 위해 입장료 인상을 단행하고 스타 선수들을 타 구단에 팔아치워 맨유 팬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일부 팬들은 구단주 퇴출 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스타인브레너와의 결정적 차이점이다.

    혹자는 비싼 선수들을 모으면 누가 우승을 못하냐며 양키스의 우수한 성적을 돈의 힘으로만 치부하기도 한다.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양키스 못지않은 돈을 써도 성적은 정반대인 구단도 있다. 1998년 텍사스 레인저스를 2억5000만달러에 사들인 톰 힉스 구단주는 2000년 대형 유격수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10년간 2억5200만달러에 영입했다. 선수 한 명에게 구단 매입에 맞먹는 돈을 지불한 셈이다. 팀이 우승은 못해도 로드리게스라는 스타 선수가 팬들을 불러 모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3년간 텍사스는 우승은커녕 디비전 꼴찌를 면치 못했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힉스는 결국 구단을 매각했다.

    미국 최대 도시인 뉴욕이라는 빅 마켓을 연고지로 지닌 양키스가 다른 구단보다 유리한 조건을 지닌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제국의 위용은 결코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양키스는 1980년대 미국 경제가 안 좋을 때도 유일하게 페이롤이 늘어난 구단이다. 최고의 선수를 볼 줄 아는 안목, 그들을 꾸준히 영입하고 유지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스타인브레너의 강력한 신념과 일관된 행동이 있었기에 나타난 결과다.



    2)새 비즈니스 모델 마련

    그는 스포츠 구단 최초로 자체 방송국을 설립해 메이저리그 구단 운용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케이블TV에 최초로 단독 중계권을 거액에 판매한 구단주였던 스타인브레너는 재계약에 문제가 발생하자 곧바로 양키스 경기만 전담 중계하는 채널인 예스 네트워크를 설립했다. 포브스 평가에 따르면 예스 네트워크의 자체 가치는 양키스 구단 가치보다 훨씬 높은 30억달러에 달한다. 양키스는 이 예스 네트워크의 지분 35%를 가지고 있다.

    예스 네트워크의 설립은 스타인브레너의 선수 욕심이 수입 증가와 직결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패배를 질색하던 그는 흔히 말하는 효율성을 따지지 않고 선수에게 투자했다. 언뜻 무지막지하게 비싼 돈을 주고 FA를 영입하는 일이 매우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이는 양키스라는 구단의 가치를 엄청나게 키웠다. 스타 플레이어들을 모아 더 많은 팬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이는 예스 네트워크의 시청률 증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스타인브레너의 투자는 단순히 우승을 많이 하겠다는 게 아니라 양키스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유지하는 성격이 짙다. 성적이 우수하기 때문에 최고의 브랜드가 되는 게 아니다. 최고의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유지하면 구단 재정이 튼튼해지고, 더 많은 우수 선수를 모을 수 있으며, 좋은 성적도 자연히 뒤따라온다는 논리다.

    만성 적자에 빠졌을 당시에 양키스를 인수한 그는 제국을 다시 일으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 스타 선수를 통해 관중석을 꽉꽉 메우는 거라고 생각했다. 스타인브레너가 선수를 평가하는 기준은 단 한 가지였다. 바로 ‘저 선수가 관중석을 얼마나 채울 수 있을 것인가’였다. 실제 비싼 몸값을 주고 영입한 스타 선수는 설사 성적이 좀 부진해도 야구단의 재정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프로 야구팀의 수익은 크게 중계권료, 입장 수익, 기타 수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중계권료다. 중계권 가격은 당연히 시청률로 결정된다. 스타 선수의 높은 연봉이 제값을 하는 이유다. 특급 FA에 대한 투자가 구단의 성적 향상과 중계권료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구단의 재정이 두둑해지면 더 많은 대형 스타를 영입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많이 쓰면 쓸수록 더 많이 버는 사업 모델을 만든 사람이 바로 스타인브레너다.

    그의 선수 수집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마케팅 수단이었다. 야구계는 물론 팬들마저 시즌이 끝나면 양키스가 올해 스토브리그에서는 어떤 FA 대어를 낚을지 관심을 집중했다. 본의든 아니든 양키스는 메이저리그 전체의 ‘공공의 적’이 됐다. ‘악의 제국’이 등장하면서 양키스를 꺾으려는 상대 팀의 의지도 더욱 불타올랐다. 이 도전과 응전이 메이저리그의 흥행을 더한 셈이다.

    3)긍지와 강력한 동기 부여

    스타인브레너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 열정적인 양키스의 팬이었다. 그는 양키스라는 최고 구단에 몸담은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최고의 자세, 태도, 예절을 지녀야 한다며 선수들의 외모와 복장까지 세세하게 간섭했다.

    그는 구단주가 되자마자 긴 머리와 콧수염 외의 수염을 금지했다. ‘교도소도 이보다는 자유로울 것’이라며 일부 선수들이 반항했지만 ‘머리를 기를 테면 구단에서 나가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경기 때마다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는 ‘장발자’ 명단을 적어 감독에게 전했다. 바로 조치하라는 뜻이었다.

    스타인브레너는 양키스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물론 팬들까지 최고의 역사와 성적을 지닌 구단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년 새롭게 영입하는 선수들을 불러놓고 “당신은 최고의 팀에서 뛰는 선수”라고 치하했다. 설사 특급 선수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말했다. 최고가 아니라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결코 최고의 성적을 거둘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구단에 대한 사랑도 대단했다. 스타인브레너는 거의 모든 공식석상에 양키스 로고가 새겨진 폴라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시민이 양키스를 비판하자 그 자리에서 욕설과 주먹을 날렸다는 일화도 있다.

    4)인간미 넘치는 카리스마

    스타인브레너는 걸핏하면 해고를 남발하는 악질 보스였지만 감독, 단장, 선수들의 노고를 잊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빌리 마틴과 요기 베라에 관한 일화다.

    스타인브레너에게 무려 5번 기용되고 해임됐던 빌리 마틴 감독은 첫 해임 때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는 “이 엿 같은 팀에는 타고난 거짓말쟁이와 범죄자가 있다”는 독설을 퍼부었다. 전자는 경기 도중 자신과 멱살잡이를 했던 홈런왕 레지 잭슨, 후자는 말할 것도 없이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에 연루된 스타인브레너였다. 하지만 1989년 마틴 감독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스타인브레너는 직접 나서 베이브 루스가 묻혀 있는 묘소 근처에 마틴의 묏자리를 구입했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란 말로 더 유명한 전설적 포수 출신 감독 요기 베라도 마찬가지다. 1985년 시즌 때 스타인브레너는 겨우 16경기를 치른 베라 감독을 전화로, 그것도 제3자를 시켜 전격 경질했다. 베라는 스타인브레너가 있는 한 결코 양키스 스타디움에 오지 않겠다고 분을 토했다. 1999년 스타인브레너는 직접 베라를 찾아가 사과하며 그의 분을 달래줬다.

    선수들에게도 따뜻한 면모를 잊지 않았다. 그는 많은 연봉은 기본이요, 그에 합당한 대접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0년 뉴욕 메츠와 경기를 한 월드시리즈에서 메츠의 셰이 스타디움을 방문한 스타인브레너는 양키스 선수들이 사용하는 셰이 스타디움 의자가 불편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곧바로 양키스 스타디움의 고급 의자를 공수해왔다. 선수들이 최고의 환경에 있어야 승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좌익수로 활약했던 데이비드 저스티스는 “언뜻 보면 별거 아니지만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스타인브레너만의 행동이었다”며 감격했다. 양키스는 뉴욕 메츠를 꺾고 2000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스타인브레너는 유머도 풍부했다. 둘 다 다혈질로 유명했던 스타인브레너와 마틴의 사이에는 수많은 일화가 있다. 한 번은 감독 영입 후 스타인브레너가 마틴을 소개하는 기자회견에서 “트레이드는 내 관할”이라고 했다. 마틴이 “그건 아니다”라고 받자 그는 “내 방식대로 못하면 당신은 해고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대한 마틴의 대답이 더 걸작이다. “아직 날 고용하지도 않았잖소”라고 응수해 기자회견장에 폭소가 터졌다.

    스타인브레너는 1990년 미국의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했고, 인기 시트콤 ‘사인펠드’에도 악덕 고용주로 출연했다. 농담조의 밀러 라이트 비어 광고를 빌리 마틴과 함께 찍었고, 비자카드 광고에서는 조 토레 감독과 데릭 지터와 함께 출연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양키스는 왜 강한가’(이종률, 2003, 한국능률협회)

    양키스 구단 웹사이트 newyork.yankees.ml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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