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호

“무른 쇠와 강한 쇠가 만나야 좋은 칼 나옵니다”

복합강으로 칼 만드는 단조장 주용부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입력2012-10-19 14:1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주용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무른 쇠와 강한 쇠를 붙인 복합강으로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다. 복합강으로 만든 칼은 예리하면서도 튼튼하고 잘 무뎌지지 않는다. 그래서 회칼처럼 신선한 재료를 다루는 칼은 복합강으로 만든다. 이런 기술은 쇠를 다루는 우리 전통 단조(鍛造)기법에서 나온 것이지만 오히려 일본에서 계승·발전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맥이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용부 대장장이가 되살려낸 단조기술로 만든 회칼은 독일제나 일제에 뒤지지 않으면서도 가격은 매우 낮은 편이다.
    “무른 쇠와 강한 쇠가 만나야 좋은 칼 나옵니다”

    칼의 마무리는 날 세우기다. 날이 잘 섰는지 비춰보는 주용부 명장.

    쇠는 단단해서 좀처럼 변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오행에서 변형이 가능한 요소가 바로 쇠(金)다. 물(水)은 유연하나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기 어렵고, 나무(木)로는 갖가지 기물을 만들 수 있지만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며 끝내 뒤틀리곤 한다. 흙(土)은 구워 그릇을 만들 수 있지만 흙의 으뜸 기능은 어디까지나 곡식을 기르는 것이다. 불(火)은 말할 것도 없다. 불은 다른 물질을 변형시킬 수는 있어도 불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자(箕子)가 주나라 무왕에게 가르쳐주었다는 홍범구주(洪範九疇)에서 오행을 말할 때 쇠를 종혁(從革), 즉 조작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장장이 주용부(74)가 쇠를 좋아하는 것도 그 변화하는 성질 때문이다.

    “무른 쇠도 단련하면 강해지고, 또 쇠로 기구나 식기, 칼 등 무엇이든 만들 수 있잖습니까. 세상 어떤 것도 그렇게 변신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쇠가 좋습니다.”

    쇠로 농기구도 만들고 무기도 만들 수 있다. 예전에는 전쟁이 끝나면 무기를 거둬들여 녹여서 농기구를 만듦으로써 평화가 도래했음을 알리기도 했다. 농기구는 무기에 비해 확실히 건설적인 기구지만, 쇠 자체의 예리함과 차가움, 단단함과 유연성 등 모든 속성을 응축해 보여주는 것은 역시 칼이다. 그래서 칼은 쇠가 가장 아름답게 완성된 모양이라고도 한다. 천하의 대장장이들이 만들었다는 보검이 전설로 남은 것도 아마 이 때문이리라. 대장장이의 솜씨는 결국 칼 만드는 솜씨에 달려 있으니까.

    그런데 대장장이에게 칼 만드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가. 칼 모양은 단순한데, 왜 복잡한 농기구나 바퀴를 만드는 것보다 어렵다고 할까?



    “칼은 강한 쇠로 만들면 날을 날카롭게 벼릴 수는 있으나 잘 부러지고, 또 연한 쇠로 만들면 부러지지는 않지만 칼날을 예리하게 세울 수가 없습니다. 좋은 칼이 되려면 강도와 연성을 다 갖춰야 하는데, 이게 정말 쉽지 않거든요.”

    결국 해결책은 무른 쇠와 강한 쇠를 붙여 만드는 것일 텐데, 녹는 온도가 다른 무른 쇠와 강한 쇠를 붙이는 것은 이론상 불가능하다.

    “제가 명장 심사를 3년여에 걸쳐 받았는데, 대학 금속학과 교수가 와서 어떻게 연철과 강철이 서로 붙느냐며 믿으려들지를 않더군요.”

    그는 이 말을 하면서 화난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 싱글거렸다. 비법을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랄까, 자부심이 가득 담긴 웃음이다. 그 웃음 속에는 대장장이로 살아온 그의 60년 세월도 녹아 있다.

    주용부의 운명은 전쟁과 함께 급변했다. 그가 대장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6·25전쟁 때인 열서너 살 무렵이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무엇이든 만들기 좋아하는 소년은 아마 뛰어난 기계공학도가 되었을 것이다. 청주에서 단란하게 보냈던 그의 어린 시절은 전쟁이 터지면서 끝이 났다. 전쟁 통에 아버지가 실종되면서 장남인 그는 어머니와 네 동생을 부양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전쟁이 한창인 때 졸지에 가장이 된 열서너 살 소년이 선택할 수 있는 일로 무엇이 있었을까. 그래도 그에겐 몇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처음에는 외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2000평 땅에 농사를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농사를 지어본 적 없는 그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목수는 깎는 일을 주로 하니 깎아먹어 못살게 되지만 대장장이는 잘산다’는 말들을 했어요. 괜히 하는 말이었지만 어린 마음에 대장장이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전쟁 때문에 대장장이 된 소년

    “무른 쇠와 강한 쇠가 만나야 좋은 칼 나옵니다”

    무른 쇠와 강한 쇠를 이어붙여 칼 모양을 잡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칼들(위).아직 완성되지 않은 칼들. 칼을 완성하기 위해선 메질, 담금질부터 갈기, 날세우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무엇이든 잘 만드는 솜씨를 지녔으니 그는 목수가 되었어도 성공했으리라. 그렇지만 그는 목수보다 왠지 대장장이에 마음이 갔다.

    “어릴 때 읽은 오성과 한음 이야기 중에 대장간에 놀러간 오성이 장난으로 궁둥이에 정을 끼워오다 대장장이가 일부러 놓아둔 달군 정에 궁둥이를 데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읽은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다 동무들과 전쟁놀이할 때도 총이니 칼이니 여러 가지 모양을 곧잘 만드니 어른들이 ‘너는 커서 대장장이가 되려고 하느냐’는 말씀을 많이 하셨고요.”

    말이 씨가 되었는지, 아니면 어차피 대장장이가 될 운명이었는지 그는 대장간을 찾아갔다. 그러나 너무 어린데다 덩치도 작아 퇴짜를 맞았다.

    “어릴 때 씨름을 하면 열 명 중 일곱 명 이상은 이길 정도로 힘이 좋았지만 키도 작고 덩치도 크지 않으니 일을 안 시켜주더군요. 그래서 우마차공장에 들어가 느티나무로 바퀴를 만들고 쟁기 같은 농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톱질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마침 대장간에서 일해달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대장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밑의 사람에게 손찌검하는 대장장이의 버릇 때문에 일꾼들이 다 나가버린 ‘덕택’이었다. 어쨌든 그는 부지런히 대장간 일을 배웠다. 새벽 3시면 대장간에 나가 소나 말에 박는 징이나 편자 등 간단한 것을 먼저 만든 다음 아침을 먹은 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아침부터 먹고 일하면 금방 배고파지니까 우선 일을 시킨 다음 먹이고 또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지요. 대장간 집 딸이 풀무를 불어주고, 키가 작은 저는 일할 때 디딤대를 두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무른 쇠와 강한 쇠가 만나야 좋은 칼 나옵니다”

    오늘날 칼은 모두 조리용이므로 주 명장은 온갖 식칼에 관심이 많다. 중국 채소요리용 식칼을 들고.

    비록 디딤대가 필요한 꼬마 대장장이였지만 남들은 3년 걸려야 배운다는 대장간 일을 그는 석 달 만에 배우는 재능을 발휘했다. 그 덕택에 ‘천재 났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가 천재 소리까지 듣게 된 것은, 남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아주 능률적으로 일했기 때문인 듯하다. 평생 발명에 몰두해 특허도 여럿 갖고 있는 그는 처음 대장간 일을 시작할 때부터 더 편리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생각해내는 데 천재였던 것이다. 주인 대장장이보다 일을 더 빨리, 많이 해내 인정을 받았지만 그는 청주 대장간에 만족하지 않고 서울 대장간에서 일할 결심을 하게 된다.

    “청주 까치네 피난민 수용소에서 살았는데, 그 수용소에서 만난 사람이 서대문구청 부근 대장간 옆에 살다 왔다면서 그곳 대장간의 칼이 잘 팔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서울로 올라왔죠.”

    휴전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그는 소개받은 서대문 대장간을 찾아갔다. 이미 대장간 기술은 웬만큼 익혀 자신이 있었지만 여기서도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해 청주로 되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써보아도 그의 솜씨를 따라가지 못하니 결국 이 대장간에서는 그에게 와서 일해달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 대장간의 대장장이 홍순명 씨는 배뱅잇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씨와 함께 소리를 배우다 외삼촌에게 대장간을 물려받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이였어요. 칼은 본래 만들 줄 알았지만 그분에게 칼 만드는 기술을 많이 배웠습니다. 전쟁 직후라 그런지 칼이 정말 잘 팔렸습니다. 당시 서대문구청이 아현동 부근에 있었는데, 구청 건너편에 어시장인 중앙시장이 있었으니 더욱 칼이 잘 나갔지요.”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그는 서대문 대장간에서 칼을 많이 만들었지만 힘은 들고 보수는 적은 대장간 일 외에도 공사판에서 리어카를 끌기도 하고, 원효로의 기계공장에 선반 일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군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는 공장에서 수도관과 수도꼭지, 발동기, 등대 반사경이 들어가는 몸체까지 쇠로 된 것은 안 만들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를 만들었다.

    “큰 원형 등대 반사경은 한번에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일곱 조각으로 나누어 만들어요. 이것을 조립해서 유리까지 끼웠다가 분해한 다음 등대까지 갖고 가서 다시 조립합니다. 워낙 무거워 보통 사람은 들지도 못했는데, 그때 제가 힘이 좋아서 도맡아 했지요.”

    그뿐만이 아니다. 당시 자동차 타이어를 못 만들던 우리나라는 헌 타이어를 찢거나 생고무를 녹여 재생타이어를 만들었는데, 그가 그 금형을 만들어주니 타이어공장에서 와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또 당시 유명 와이셔츠 공장에서는 직조한 천을 찌고 건조하는 과정에서 습기와 바람을 내는 바람통 쉰 개에서 바람이 골고루 나오지 않는 결함으로 고민했는데, 그가 이를 해결하자 공장장으로 특채하려고도 했었다. 적성에도 맞고 보수도 좋은 안정된 직장이었을 텐데 거절했단다.

    “제가 기술을 배우고 익힌 작은 기계공장에 대한 의리라고 할까요….”

    의리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한 장소, 한 가지 일에 정착하기보다 여러 가지 기계와 기구를 섭렵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발명하고 만들어보고자 하는 숨은 욕구 때문인지도 모른다. 입대 직전에는 염천교의 국수기계 공장에서 일했는데, 같은 건물에 세든 자전거포를 드나들며 바퀴살을 개선해주는 솜씨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장간에서 부르면 또 대장간에 나가 일을 보았다. 주인 대장장이보다 두 배 이상 일을 해내는 그인지라 대장간에서도 그를 절실히 원했다.

    “그때만 해도 고된 대장장이 일보다는 제 아이디어를 살려 새로운 기계를 만드는 설비, 발명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똑같이 쇠를 다루는 일이지만, 훨씬 다양한 자극을 받게 되니 재미도 났고요.”

    장남으로서 가족 부양이라는 책임을 한 번도 외면한 적 없이, 가족과 주변사람들(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봉사하는 삶을 추구해왔다)에게 헌신한 그였지만, 그의 영혼은 끝없는 호기심과 실험정신에 이끌렸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안정된 자리를 외면하면서 이렇게 고생스레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할 필요가 없었다. 한마디로 이 시기는 오늘날 명장이 되기 위한 ‘주용부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였던 셈이다. 이 시기 그는 쇠와 기계를 점점 더 잘 이해하고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되었으며, 훗날 그가 생각해낸 복합강 기법 역시 이때의 다양한 경험이 바탕이 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가 만든 회칼 사준 메리야스 공장

    “무른 쇠와 강한 쇠가 만나야 좋은 칼 나옵니다”

    그의 대장간에서는 회칼 말고도 일반 식칼 등 여러 가지 칼을 만들고 있다. 그의 뒤를 이을 아들 영식씨와 함께.



    스물두 살에 입대한 그는 뛰어난 기술로 수송부에서 정비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부대의 자동차란 자동차는 죄다 범퍼가 찌그러지고 정비도 제대로 안 돼 있었지요. 고장 난 것은 고치고 찌그러진 것은 수리해서 반짝거리게 닦아놓으면 새것 같아서 상관들이 무척 좋아했습니다.”

    1962년 봄, 제대한 젊은 기술자 주용부는 기계공장 아니면 자동차 정비센터를 열 기대에 차 있었다. 하지만 젊은 기술자는 기술만 있었지 돈이 없었다. 기계공장을 차리려면 설비하는 데 돈이 많이 드니 엄두도 못 내고 자동차 정비를 해야겠는데 이것도 터가 필요하고 시설도 어느 정도 갖추어야 했다.

    “노량진에서 외사촌 친구와 동업을 했어요. 저는 자동차를 수리하면서 따로 칼을 만들어 납품했는데, 그만 물건 값을 떼이고 말았습니다.”

    그는 빚만 안고 동업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매제가 하는 칼 공장 한편에 작은 작업실을 짓고 칼을 만들었다. 이것이 그가 처음 만든 자신의 대장간이다. 설비를 많이 갖춰야 하는 기계공장이나 자동차 수리점과 달리 대장간은 도가니와 망치 하나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었다.

    “모래내 산꼭대기 소나무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말뚝을 박고 차린 작업실이었습니다. 낮에는 다른 공장에 가서 일해주고 밤에 혼자 칼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빚을 갚아나갔지요.”

    그때 매제는 서양 식칼을 제작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종류를 달리해서 일부러 가정에서 쓰는 일반 식칼과 회칼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변변한 철을 생산해내지 못했던 우리나라에서 재료인 철을 구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일반 가정용 칼은 스테인리스 철을 쓰면 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만들기 전이어서, 미군부대에서 나온 고철을 주워와 석탄불 도가니에 녹여 흙에다 금형을 떠서 주물 제작한 다음 칼 모양으로 깎았지요.”

    재료도 금형도 제대로인 게 하나 없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철로(rail)나 자동차 스프링 같은 좋은 쇠를 얻는 날이면 회칼도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청주에서 처음 대장간 일을 배울 때부터 갖가지 쇠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행기 파편이나 폭탄 조각을 모아 낫이나 칼을 만들었고, 철로는 두꺼운 윗부분은 열처리해서 도끼를 만들고, 아랫부분으로는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곤 했지요.”

    당시 회칼은 공무원 월급과 맞먹을 만큼 비쌌다. 그러나 일제 회칼만 좋은 줄 아는 요리사들은 그의 칼을 외면했다. 그의 회칼을 사준 곳은 의외로 메리야스 공장이었다.

    “평화시장에 옷 만드는 공장이 많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목이나 팔 부분을 재단하는 기계가 없어서 회칼을 많이 썼어요. 일제는 워낙 비싸고 보통 강철로 만든 칼은 잘 부러지니 메리야스 공장에서 저의 회칼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게 평화시장에 회칼을 납품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호주머니에는 차비조차 없을 때가 많았다. 걸어서 염천교쯤 와서 울컥 눈물이 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처럼 질 좋은 복합강이 일찌감치 생산되었다면, 이 기술 좋은 젊은이가 그렇게 서러워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무른 쇠와 강한 쇠 이어주는 황토

    비록 서러움은 느꼈지만, 그의 샘솟는 아이디어는 그칠 줄 몰랐다. 그는 더 좋은 회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마침내 무른 쇠와 강한 쇠를 합치는 복합강 기법을 발견해냈다.

    “시골 대장간에서 일할 때 농기구나 문고리, 쇠바퀴 등 쇠가 닳은 부분에 다른 쇠를 녹여 붙이곤 했거든요. 우리 선조들은 서로 다른 성질의 쇠를 한데 붙이는 방법을 알았던 겁니다.”

    중국보다 철기가 더 일찍 발달했다는 우리나라의 제련법과 단조기법은 매우 앞섰다고 보는데, 전통 대장간에서 녹는점이 다른 두 가지 종류의 쇠를 이어줄 때 쓴 매개체는 황토다. 쇠는 탄소 함유량이 적은 순수 철에 가까울수록 부드러워지고 녹는점이 높다. 순수 철은 1535℃에 녹지만 주용부 명장이 사용하는 무른 쇠는 1000℃, 강한 쇠는 700~800℃에서 녹는다.

    “녹는점이 높은 무른 쇠를 먼저 달구고 황토를 뿌린 다음 강한 쇠를 붙여 불에 달구면 신기하게도 황토가 녹아내리면서 두 쇠가 이어집니다. 그때 망치로 두드리면 불순물이 제거되면서 서로 붙게 되지요.”

    온도계도 사용할 수 없는 화덕의 불을 그는 색깔로 판별한다. 불꽃놀이하듯 불꽃이 튀어오르면 그때 쇠를 꺼내 때려야 한다. 그러나 황토를 써서 성공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은 20%. 요즘은 붕사와 쇳가루를 섞은 가루를 대신 써서 성공률을 배 이상 높였다. 워낙 성공하기가 어려워 한창때도 하루 서너 개, 요즘 같아서는 두세 개밖에 못 만든다고 한다.

    일단 붙은 쇠는 화덕에 달구었다 뺐다 하면서 쇠를 메질해서 칼 모양을 잡아나가며 강도를 조절한다. 그는 이 메질을 떡을 치는 떡메와 비교한다. 자꾸 칠수록 차지는 떡처럼 쇠도 메질을 많이 할수록 강해진다. 그가 만드는 칼은 45~50도의 강도를 유지하는데, 이 역시 경험으로 측정해낸다.

    “달군 쇠를 물에 집어넣었을 때 하얗게 되면 80도, 식혔을 때 도라지꽃처럼 발갛게 되면 45~50도 강도라고 보면 됩니다.”

    장인의 감(感)으로 이루어지는 온도와 강도 측정은 정확하다. 그래서 이렇게 열처리와 메질로 완성된 칼은 보통 기계에서 찍어낸 칼과는 완전히 다른, 단단하면서도 미끄럽지 않고, 잘 무디어지지 않는 멋진 칼이 된다. 물론 칼로 완성되기까지 일단 연마기에서 어느 정도 두께로 갈아내야 하고, 마지막으로 섬세하게 날을 세우는 과정도 남아 있다.

    “일본은 이미 복합강을 생산해내니 이를 사다 쓰면 열처리 과정도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좋은 칼이 되는 관건은 연마와 날 세우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날 세우기에 특히 뛰어난데, 그가 특별히 만든 기계 덕택이다. 고운 사포를 잘라 둥근 고리에 붙여 1분에 1700회 회전시키는 이 기계에다 그가 날을 가는 모습을 보면 앞에서 한 번, 뒤집어서 한 번, 사선으로 한 번, 그 반대로 한 번, 다시 앞에서, 뒤에서, 일고여덟 번의 동작으로 끝나므로 매우 쉬워 보이지만, 이 기계로 날을 제대로 세울 줄 아는 사람은 그 말고 없다.

    “제가 처음 이 기계를 고안해서 주문제작한 이후 많은 사람이 똑같이 만들어 쓰고 있는데 녹이 난 것을 떨어내는 용도로 쓸 뿐, 이걸로 날을 세우지는 못해요. 평생 곁에서 저를 도와준 동생도 잘 못하는걸요.”

    칼은 많이 갈면 빨리 닳고 그만큼 빨리 무디어진다. 그나마 숫돌로 날을 세우는 것이 제일 낫지만 그래도 이 기계보다 쇠가 훨씬 더 많이 마모된다. 그리고 일일이 손으로 갈면 모든 칼이 일정하게 잘 갈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일본의 칼 장인들은 그가 칼 가는 솜씨를 보고 감탄하며 “칼은 얼마든지 만들어 보낼 테니 당신이 갈아서 팔아달라”는 부탁을 하곤 한다. 이미 열처리된 복합강이 대량 생산되는 마당에 이제 장인의 솜씨는 칼 가는 솜씨에 달려 있는 셈이다.

    요리사가 좋아하는 칼, 싸게 공급하고 싶어

    “무른 쇠와 강한 쇠가 만나야 좋은 칼 나옵니다”

    고운 사포로 만든 날세우는 기계. 그의 발명품이다.

    그는 한때 자석을 만들어 돈도 꽤 벌었지만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돈을 모으지는 못했다. 대신 갖가지 조리 기구를 많이 만들어내 특허를 받았는데, 개중에는 달걀 자르는 도구, 마늘 다지는 도구, 고무주걱, 날을 물결처럼 만든 묵 써는 칼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히트작도 많다. 그가 조리기구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요리학원에 칼을 납품하면서인데, 과거 요리학원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학생과 교사 모두 조리기구가 변변치 않아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좋은 칼과 조리 기구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어요. 외제는 있었지만 워낙 비싸 학생과 학원에 다 부담이 되었죠. 그래서 좋은 칼과 조리 기구를 많이 만들어 싸게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그 덕택에 그는 유명한 요리학원 원장과 요리사들과 매우 친해졌다. 지금도 그는 일제 칼과 똑같은 재료를 써서 더 훌륭하게 연마하고 날을 세운 그의 전문가용 칼을 학원이나 교육기관, 복지회관 등에 시중가보다 싸게 내보낸다. 같은 종류의 회칼일 경우 일제가 150만 원이라면 그의 칼은 시중가가 겨우 35만 원, 학생들에게는 절미도(생선 지느러미 등을 잘라내는 칼)까지 끼워서 15만~20만 원에 판다. 성능에 비해 놀랄 만큼 싼 그의 칼을 구입한 사람들은 “한국 명장의 명품이 이렇게 싸다니 눈물이 난다”고 말할 정도다.

    “전문가들은 저의 칼을 잘 아니까 많이 쓰는데, 오히려 학생이나 초보 요리사들은 외제 칼에 혹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우리 칼을 애용해야지 우리 칼이 더욱 발전할 수 있어요.”

    아마도 사람들은 일제 칼의 명성과 독일제의 세련된 디자인에 먼저 끌리는 모양이다. 일반 가정용 칼도 독일제가 무조건 더 좋은 줄 아는데, 쓰다보면 불편함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음식과 요리법이 달라서 독일제가 우리 음식 조리에는 맞지 않는 면이 많아요. 독일제 칼은 철이 워낙 우수해서 튼튼한 게 장점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잘 드는 칼과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고기를 통째로 조리하는 서양 요리와 무엇이든 잘게 썰어 조리하는 우리 음식을 만드는 데 필요한 칼은 다르다. 식재료를 잘게 썰면 아무래도 영양소가 파괴될 확률이 높은데, 무딘 칼일수록 세포가 많이 파괴되고 영양소가 흘러나와 신선도가 떨어진다. 잘 드는 칼에 베었을 때는 피도 잘 나지 않지만 무딘 칼에 베이면 피가 많이 나는 원리와 같다.

    “저는 식중독의 원인 중 하나도 잘 안 드는 칼로 조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딘 칼로 재료를 다루면 재료가 빨리 상하고 그때 균이 들어오면 쉽게 번식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그는 일반 가정용 부엌칼도 매우 정성 들여 제작한다. 예전에는 열처리되지 않은 스테인리스 스틸을 포항제철에서 수입해서 얇은 판으로 만들어낸 것을 사다가 숯가루를 뿌려 가마에 달궈내 탄소강으로 바꿔 튼튼한 칼을 만들었다. 지금은 이 과정을 전문적으로 처리해주는 공장도 있고 또 좋은 재료가 보급되므로 우수한 가정용 칼을 더욱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그의 가정용 칼 가운데 끝을 붕어입처럼 만든 것과 칼 표면에 돌기가 돋아 있는 것 등 특별한 모양의 칼이 눈길을 끈다.

    “칼끝을 붕어입 모양으로 만들면 칼이 깊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예전에는 강도사건이 많아서 안전을 위해 만든 겁니다. 표면에 돌기를 넣은 것은 채 썰 때 채가 칼에 달라붙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서고요.”

    붕어입 칼은 실제로 사람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다. 그가 잘 아는 가구회사 사장에게 붕어입 칼을 선물한 적이 있는데, 이 집에 강도가 든 것이다. 강도는 부엌에서 칼을 빼들고 안방에 들어왔다고 한다.

    “사장은 너무나 놀랐지만, 저의 칼로 찔려봤자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정신을 차려 ‘돈은 호주머니에 있으니 갖고 가라’고 침착하게 말해 강도는 돈만 가지고 도망갔다는군요. 나중에 그 사장이 제게 아주 고마워했지요.”

    아들까지 4대째 대장간 집안

    특허를 무려 70여 차례 받았을 만큼 발명왕이기도 한 그는 아직도 만들고 싶은 것이 많고, 매일 그의 대장간 ‘용호공업사’에서 칼날을 세우고 있지만 이제 그의 나이도 70대 중반이다. 다행히 대를 이을 아들 영식(52) 씨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고, 평생 함께 해온 아내 김광자(70) 씨 역시 공업사에서 일한다. 김광자 씨 집안은 외할아버지가 대장장이였고, 친정아버지 역시 대장장이였다. 남편인 주용부 명장과 아들 영식 씨까지 치면 4대로 이어지는 대장간 집안인 셈이다. 천하의 명검을 만들었던 오나라 대장장이 간장(干將)에게 아내 막야(莫邪)가 있었듯이 주용부 명장 곁에는 늘 김광자 씨가 있다. 이들 부부는 이제 칼 박물관을 만들 꿈을 같이 꾸고 있다.

    “부지는 마련했는데, 이제 건물 지을 일만 남았어요. 정부나 시에서 도와주면 정말 좋고요. 칼 박물관이 서면 우리 전통 단조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리고 이 기술이 이어지도록 힘을 모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임진왜란 때 우리 대장장이들의 뛰어난 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가 발전해서 오늘날 일본이 세계적 경지를 이룬 것을 생각하면 저의 작은 기술이나마 후세에 물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조선시대 대장장이들은 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은 제련법을 개발했는데,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대신 일본에서 수용해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큰 부를 축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이나 독일은 칼 장인을 매우 존경한다는군요. 제가 존경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술을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그들의 풍토가 참 부러워요.”

    평생 쇠와 함께해온 늙은 대장장이의 소박한 바람이 이루어질 날은 언제일까.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