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호

“관대한 사회라야 개인도 행복하다”

‘행복도상국 일본’ 저자 메자키 마사아키의 행복론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3-11-21 1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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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규모로 보면 일본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하지만 ‘국민행복’이란 측면에서 보면 여전히 도상국 수준이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한국은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률로 신음하고 있다. ‘행복도상국 일본’의 저자 메자키 마사아키는 세계 100개국을 돌며 부유한 국가에 사는 국민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파헤쳤다.
    • 그의 얘기는 일본의 얘기인 동시에 한국의 얘기다.
    “관대한 사회라야 개인도 행복하다”

    서울의 한 서점에 진열된 자신의 저서 한국어 번역본을 들고 있는 메자키 마사아키 씨.

    한남자가 있다. 일본 게이오대 상학부 졸업 후 세계적 금융투자회사 메릴린치에 입사해 파생금융상품 트레이더로 일하며 도쿄, 런던, 뉴욕 등 국제 금융의 최전선을 누볐다. 한때 회사를 통틀어 세계 최고의 수익을 올리며 잘 나가던 그는 ‘합법적 도박판’과도 같은 금융계에 회의를 느껴 돌연 사표를 던진다.

    이후 10년간 인도, 동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100개국을 돌아다녔다. 세계 구석구석을 떠도는 동안 그는 ‘개인이 행복한 사회’는 일관된 경향과 특성을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하면서 체험한 것을 체계적인 ‘행복론’으로 정립하기 위해 영국 런던대에서 사회인류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사회가 관대할수록 개인의 행복감이 커진다”며 이른바 ‘사회개인주의’를 정립해야 개인의 행복도가 높아진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세계 여행을 마친 그는 직접 보고 들은 경험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행복도상국 일본’이다. 일본이 경제 규모에서 세계 수위를 달리면서도 정작 국민 개개인은 그리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파헤친 보고서다. ‘국가는 부유한데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제목의 한국어 번역본(페이퍼로드, 신창훈 역)도 출간됐다.

    일본처럼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로 고민하는 한국 사회는 일본과 유사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국민은 행복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감이 더 커진 게 현실이다. 우리보다 앞서 경제 발전을 이룬 일본이 여전히 ‘행복도상국’에 머물러 있는 원인을 살펴보는 것은 한국이 직면한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행복도상국 일본’의 저자 메자키 마사아키(45) 씨를 만났다. ‘신동아’의 인터뷰 제의에 메자키 씨는 바쁜 일정을 쪼개 한달음에 도쿄에서 서울로 날아왔다. 그는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일을 실행하는 데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 고액 연봉이 곧 성공으로 통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큰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을 그만두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돈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돈만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금융 트레이더의 세계는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합법화한 도박판’에서 10년, 20년 영혼을 팔며 인생을 소비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 가장 먼저 어느 나라를 여행했나.

    “인도를 1차 목적지로 삼았다. 가는 도중에 아시아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 왜 인도인가.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내가 모르는 그 무언가가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금융의 세계는 논리로 미래를 예측하고 모든 것을 숫자로 해석한다. 그런데 인도에서 접한 명상의 세계에서 숫자와 논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명상은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찾는 내면 여행이었다. 힌두교 승원 아슈람에서 1년 넘게 명상에 빠졌다.”

    처음엔 2~3년 안에 세계 여행을 마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3년 안에 여행을 마치려 한 것은 3년을 ‘사회 복귀의 한계’로 여기는 일본 사회의 암묵적 상식 때문. 그러나 여행을 떠난 지 3년이 지나도록 인도에 머무르던 그는 이 ‘상식’을 깨고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여행을 계속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여행 기간이 길어질수록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진 않았는지.

    “불안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호기심도 그만큼 컸다. 미지의 세계를 좀 더 보고 싶다는 행복한 열망에 힘입어 불안감을 다스리며 여행을 계속했다.”

    인도를 떠난 메자키 씨는 파키스탄을 경유해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란으로 넘어갈 때쯤 9·11 테러 사건이 터졌다.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레바논 등 중동 국가를 여행하려던 그의 계획은 테러 이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의 공습이 예상됐기 때문. 결국 터키를 경유해 동유럽으로 향했고, 이후 아프리카와 중남미를 여행했다.

    유교문화권의 집단주의

    ▼ 어느 나라 국민이 가장 행복해 보였나.

    “행복국가의 모델은 라틴아메리카형과 북서유럽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중남미 국가의 실업률이나 범죄발생률은 상대적으로 높다. 빈부격차도 크고 부패도 심하다. 이처럼 객관적 조건은 나쁘지만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인생을 즐긴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행복지수가 높다. 반면 북서유럽형은 1인당 국민소득, 평균수명, 교육지수 등이 높은 대신 부패 정도나 범죄율은 낮아 객관적 행복지수가 높다.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사회적 관대함’도 인상적이다.

    라틴아메리카 사례가 국가나 사회가 처한 조건이 개인의 행복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북서유럽 모델은 객관적 행복조건이 충족되고 여기에 사회적 관대함까지 더해지면 국민 개개인의 행복감이 더 커질 수 있음을 말한다.”

    ▼ 일본은 어느 모델에 해당하나.

    “어느 행복국가 모델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선진국이 아니라 행복도상국이라고 한 것이다. 경제 규모나 객관적 행복 조건은 북서유럽에 가깝다. 하지만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에서 보듯 국민이 느끼는 행복감은 낮다. 행복지수가 반드시 경제 규모에 비례해 함께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1958년에서 2000년 사이에 1인당 실질 GDP가 6배 이상 늘었지만, 같은 기간 일본인의 생활만족도엔 변화가 거의 없었다.”

    ▼ 그래도 최소한의 삶의 질을 영위할 만한 경제력은 갖춰야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기본적인 경제 수준은 필수다. 몇몇 예외적인 나라를 빼면 1인당 GDP 1만 달러 이하 국가 국민의 행복지수는 대체로 높지 않다.”

    ▼ 먹고살 만해진 이후에도 개인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

    “여러 요인이 있다. 객관적인 행복지표가 아무리 좋게 나와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사회적 제약이 많은 나라의 국민은 인생을 즐기지 못한다. 집단주의에 사로잡힌 개인도 마찬가지다. 한국, 일본과 같은 유교문화권 국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유교문화권 특유의 집단주의와 서열을 중시하는 풍조가 개인의 행복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다. 개인의 내면이나 실력이 아니라 나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서열을 가르고, 집단의 입장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관습이 개인의 행복 추구를 방해한다는 것. 메자키 씨는 “집단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개인주의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 최적화한 사회를 만든다”며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행복지수가 더 이상 높아지지 않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과연 개인의 행복 추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회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관대함

    ▼ 개개인이 행복한 사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인가.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사회다. 그런 곳에서는 타인의 권리도 침해하지 않는다. 즉 사회적 관대함이 있다.”

    ▼ 사회적 관대함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예를 들어 동성애자와 같은 성 소수자를 얼마나 동등하게 대우하는지, 여성 국회의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등이 사회적 관대함의 척도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는 관대한 사회다. 그런 사회는 개인을 존중하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다. 개인의 자유보다 전통이나 문화를 고수하려는 집단성을 더 중시하는 사회에는 관대함이 없다. 나와 다른 개인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에는 개성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회적 약자도 자존감을 유지하고, 모두가 사회 구성원이라는 일체감도 형성된다. 약자가 피해의식 대신 일체감을 가질 수 있어야 진정 행복한 사회다.”

    ▼ 사회를 유지하려면 집단의식도 어느 정도 필요한 것 아닌가.

    “물론이다. 다양한 개인이 협력해야 사회가 유지된다. 개인 역시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혜택을 받는다. 단기간에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에도 집단성이 효과를 발휘한다. 문제는 집단의 질서와 개인의 자유가 충돌할 때다. 집단성을 강조하는 사회는 언제나 개인의 자유보다 집단의 질서를 우선시한다. 그런 사회에선 개인이 행복하기 어렵다.”

    메자키 씨는 ‘행복도상국 일본’에서 “좋고 싫음을 확실히 구분하고 ‘개인적 선호’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 풍조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빼앗는다”고 지적했다. 개인의 행복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집단주의에 파묻힌 개인 △‘예스맨’을 선호하는 몰개성 사회 △반대 의견을 두려워하는 문화를 꼽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스스로 행복을 찾지 않으면 행복은 없다”고 덧붙였다.

    일본에서는 부모나 선생님의 말을 잘 듣고 반항 없이 잘 따르는 아이가 ‘훌륭한 아이’로 칭찬받는다. 하지만 이런 아이가 어른이 되면 규범에서 벗어난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항상 주위 사람과 같은 길만 선택하게 된다.

    먹는 것, 옷, 취미, 공부, 친구, 심지어 여가를 보내는 일까지도 자기 선호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 한다. 이런 식으로 ‘어른이 좋아하는 아이’가 바로 몰개성의 상징 아닌가. 이렇게 수동적으로 산다면 인생에서 심장을 뛰게 하는 그 무언가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로 포장돼 별탈없이 고만고만한 사람과 사귀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떤 이야기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나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유대는 기대하기 어렵다. ‘선호’라는 개성의 근간을 빼앗기는 순간 혼이 없는 인생이 되고 만다.

    -‘국가는 부유한데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중에서

    메자키 씨는 개인의 행복을 가로막는 일본의 몰개성한 사회 분위기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너나없이 사교육과 입시전쟁에 내몰리는 청소년, 취업 스펙을 쌓느라 교양이나 폭넓은 지식과는 담을 쌓고 지내야 하는 대학생의 처지가 그렇다. ‘집 한 채는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 때문에 억대가 넘는 부채를 떠안고 전전긍긍하는 중년 가장들의 신세 또한 몰개성한 한국 사회가 낳은 병폐다.

    ‘사회개인주의’

    ▼ 개인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자신이 언제 행복을 느끼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 메자키 씨는 언제 행복을 느끼나.

    “내가 경험한 것을 책으로 펴내고, 내가 쓴 책을 읽고 공감하는 사람을 만날 때 행복하다. 스스로 존재감을 느낄 때 행복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도 행복하다.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조금씩 알아갈 때도 늘 행복했다.”

    독일 저널리스트 슈테판 클라인은 저서 ‘행복의 공식’에서 “행복은 행위의 결과”라고 규정했다. 행복은 우연히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공식대로 하면 고액 연봉을 내던지고 10년간 세계 각국을 떠돌며 스스로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한 메자키 씨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 개인이 행복한 사회를 위해 ‘사회개인주의’를 제안했는데.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일체감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령 내 책을 읽고 공감한 사람들을 만나 내가 큰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자신의 행동이 사회에 공헌했을 때 큰 행복감이 찾아온다. 사회개인주의는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 사회 공헌을 권장한다.”

    그는 사회개인주의 실현을 위해 △지방분권 강화 △소수자, 이민자에게 관대한 사회 실현 △여성 국회의원 확대 △대화와 토론 중심 사회 등을 선행과제로 제시했다. 일본을 염두에 둔 과제이지만 ‘일본’을 ‘한국’으로 바꾸기만 하면 그대로 적용할 만한 제안들이다.

    지금 일본(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행복한 인생을 살 가치가 있다’는 걸 스스로 실감하는 일이다. 타인에 의해 강요된 요구가 아니라 ‘자신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먼저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특히 집단성에서 벗어난 행동을 존중해야 한다. 타인과 다르다는 것은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집단이 요구하는 ‘상식’도 좋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의 소리다.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지 못하면 ‘나의 인생’이라 할 수 없다.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행복을 느낄 수 있겠는가.

    -‘국가는 부유한데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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