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적 영향력 원천은 한인 사회 ‘응집된 표’
- 미국 의회 작동 원리와 소수계가 살아남는 법
- 독일, 일본 비교 말고 이스라엘 방식 벤치마킹해야
- 사진 찍으러 미국 온 꼴불견 한국 정치인
“오늘이 우리 단체 생일입니다. 1991년 4월 29일 LA 흑인 폭동 때 한인이 본 피해가 컸어요. 힘을 모아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LA),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뉴욕·뉴저지에서 한인 유권자 운동을 함께 시작했는데, 뉴욕·뉴저지만 유지되고 있어요. 현재는 뉴욕·뉴저지를 발판 삼아 LA, 샌프란시스코 등에 지역 조직을 꾸리려 합니다.”
그는 1996년 뉴욕 플러싱에서 한인유권자센터를 설립했다. 2007년 미국 하원을 만장일치로 통과한 일본군 강제 위안부 결의안에 그의 손때가 묻어 있다. 2008년에는 독도를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변경하려던 미국 지명위원회 결정을 되돌리는 데도 기여했다. 버지니아의 동해 병기 법안 통과도 이끌어냈다. 뉴욕, 뉴저지에서도 동해 관련 법안 통과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0년엔 뉴저지 버겐카운티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를 세웠다.
“일본이 우리의 활동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아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간 일본은 고용한 로비스트만 이용해 의회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일본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젠 전략적으로 움직입니다. 버지니아 주의회에서 우리의 노력으로 동해 병기 법안이 통과될 때도 일본이 막으려고 시도했습니다. 뉴욕, 뉴저지에선 동해 병기 법안을 교육 관련 법안으로 상정해 통과를 추진 중인데, 굉장히 어렵습니다.”
위안부 결의안 ‘승리’
그는 뉴욕, 뉴저지 같은 대도시권에서는 일본의 간접 로비가 무섭다고 했다.
“일본이 합법적 로비스트를 통해 하는 일에 맞서는 것은 우리가 자신 있습니다. 우리는 풀뿌리 운동이니까요. 다른 나라 정부를 위해 일하는 로비스트와 시민의 힘의 경쟁에선 후자가 더 강하지만, 일본 기업의 로비에 맞서기는 버겁습니다. 일본 기업은 일본의 국익에 불리한 사안이 나타나면 알아서 움직입니다. 뉴욕에는 미쓰비시, 도요타 등 다수의 일본 기업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을 통해 큰 기업이죠. 기업의 영향력을 이용해 간접 로비를 하는 겁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4월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끔찍하고 지독한(terrible, egregious) 인권침해”라는 발언을 내놓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강경하게 말한 것은 하원을 만장일치로 통과한 위안부 결의안 덕분입니다. 미국에서 의회 결의는 역사적으로 사실이 입증됐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거리낄 게 없는 거예요.”
미국 하원이 위안부 결의안을 의결한 데는 한인유권자센터가 가랑비에 옷 젖는 방식으로 의원들을 접촉, 설득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주도한 마이클 혼다 하원의원이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면서 그는 안쓰러워했다.
“혼다 의원은 7선 중진입니다. 그런데 일본계가 지지하는 후보 탓에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패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미국 선거는 누가 돈을 많이 모았느냐가 중요합니다. 혼다는 훌륭한 분입니다. 역사의 진실, 인권, 평화를 위해 정치적인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혼다와 맞서는 인물은 연방 상무부에서 일했어요. 산업계 출신이어서 돈을 잘 모읍니다. 실리콘밸리 경기가 어려운데,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리라는 기대도 받고 있고요. 역사 인식에서는 일본에 비판적인데, 혼다 정도는 아니죠. 캘리포니아의 일본계가 보기에 아주 예쁜 것은 아니지만, 혼다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혼다의 지역구인 캘리포니아의 한인 사회가 의리를 지키면 좋겠습니다. 한인들이 혼다 의원 지키기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는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시립대 헌터칼리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앞서 언급했듯 1991년 LA 흑인 폭동 때 한인들이 일궈온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한인 사회의 정치력 신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한인 유권자 운동 선구자
“미국에서 소수계 민족이 안정된 삶을 영위하려면 정치적인 힘을 갖추거나 정치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적 영향력의 원천은 선거 때 행사하는 ‘표’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유대인 로비단체 미국·이스라엘공공정책위원회(AIPAC)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로비 방식을 들여다봤다. 그들의 로비를 벤치마킹해 조직을 꾸리면서 표와 돈으로 움직이는 미국 의회의 작동 원리를 체득했다.
“가장 먼저 한인 유권자를 상대로 투표 참여 캠페인에 나섰습니다. 사전 등록을 해야 하는 등 절차가 까다로워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 한인 1세대의 투표율이 매우 낮았습니다. 특정 선거구에 특정 언어를 사용하는 유권자가 1만 명이 넘으면 그 언어로도 투표 안내를 실시해야 한다는 규정을 발견한 후 당국에 요청해 관철시켰어요. 그 덕분에 1세대 어르신들이 투표자 등록을 하기가 수월해졌습니다. 2012년 총선 때 뉴저지의 한인 유권자 등록률은 53%, 투표율은 40% 수준입니다. 유대계의 등록률, 투표율은 각각 90%, 96%에 달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대만계만 해도 등록률 81%, 투표율 91%이거든요.”
그는 AIPAC의 활동에 철학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한인 사회가 배워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AIPAC은 이스라엘 보호를 위해 미국이 아랍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IPAC은 협상, 공조보다는 대결을 오히려 부추겨요. AIPAC의 목표는 600만 명이 넘는 미국의 유대인이 미국의 힘을 이용해 전 세계의 유대인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있고요. 미국 대통령선거 때마다 AIPAC의 막강한 영향력을 실감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인종과 관련한 로비가 비판받는 분위기인데도, 정치인은 돈과 표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AIPAC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힘은 ‘관계’에서 나오는 것”
그는 미국의 힘을 이용해 일본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독일이 반성, 사죄 쪽으로 움직인 데는 유대인의 힘이 컸습니다. 우경화하는 일본과 독일을 비교하지 말고 유대인과 한국인을 비교하면 좋겠습니다. 유대인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홀로코스트와 관련해 독일을 엄청나게 쪼아댔습니다. 일본이 동서 냉전을 틈타 전범 국가에서 서방의 우방으로 안착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뭘 했습니까. AIPAC은 전쟁을 말하지만, 우리는 인권, 공존, 평화만 얘기해도 얻을 게 많습니다. 보편적 가치, 역사적 진실을 무기로 삼으면 미국의 힘을 이용해 일본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는 한국 정치인이 위안부 문제 등과 관련해 미국에서 허튼 일을 할 때가 많다고 꼬집었다.
“미국의 일본계 커뮤니티가 약합니다. 진주만 공격 후 일본계가 미국에서 핍박당했습니다. 일본이 미국의 적국이었던 터라 일본계는 조직을 만들어 대응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습니다만, 일본계가 조직적으로 움직이면 시민과 시민의 대결이 돼버립니다. 표 대(對) 표로 가면 우리가 불리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다툼이 아니라 역사 진실, 보편적 인권의 틀로 문제를 다뤄야 경쟁력이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인이 미국에 와서 기림비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하는 짓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안 오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한국의 한 광역자치단체장이 미국의 한 지역에서 위안부 기림비를 세울 때 자치단체 돈을 댔습니다. 비석에 그 단체장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그렇게 하면 시민이 자발적으로 세운 기림비까지 타격을 받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대결이 되면 미국은 어느 쪽 편을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서울의 정치인들이 개입하면 보편적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대결이 돼버려요. 연전연패하는 길입니다. 위안부나 동해 병기가 한일 간의 분쟁 이슈로 가면 안 됩니다. 앞서 말했듯 역사 진실,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야 해요. 국가 대 국가의 싸움이 되면 일본계가 뭉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움직임이 나타나고요.”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시민의 서명을 받아 시가 운영하는 도서관 옆에 기림비를 세웠습니다. 공공의 재산으로 기림비를 세운 겁니다. 일본 외교관이 컴퓨터 등 도서관 시설을 확충해줄 테니 기림비를 철거해달라고 로비하다 들켜 우리 쪽이 대박이 났습니다. 미국이 괜찮은 나라입니다. 인권 같은 보편적 이슈를 가지고 제안하면 우리가 반드시 이깁니다. 미국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 중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지역 현안에 앞서는 당론은 없다는 겁니다. 지역 주민이 원하면 뭐든지 합니다. 풀뿌리 유권자 운동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국 국민이, 미국에 사는 한인이 한국을 위해 일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과거와 다르게 한국과 미국의 국익이 충돌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미국 시민입니다. 국익 충돌 상황에서는 미국 편을 들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미국에 사는 한인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갖는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에 도움이 됩니다. 한국인이 미국에 사는 한국계를 존중하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외교관이나 주재원이 재미 한인을 무시하곤 하죠. 굉장히 화가 나고 섭섭할 때가 많습니다. 미국 국민인 한인이 200만 명이 넘습니다. 한인의 실력이 높아졌어요. 위안부 결의안, 기림비 같은 것을 보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힘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겁니다. 재미동포를 업신여겨서 한국이 얻는 게 뭐가 있을까요.”
美 의원 18명 한국 데려와
김동석 씨는 한국인의 전문직 미국 비자 쿼터를 늘리는 일에도 앞장선다.
그는 미국 대선 때 오바마 캠프에 참여했다. 한인 밀집 지역 출신 의원들의 펀드레이징 행사 때도 빼놓지 않고 참석한다. 미국 의원을 한국으로 초청해 지한파로 만드는 일도 하고 있다. 미국 연방 상·하원 의원 20여 명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미국 의회에 명실상부한 ‘코리아 코커스(Korea Caucus)’를 꾸리는 게 목표다. 현재는 의원 60여 명을 확보했는데, 그 수를 ‘이스라엘 코커스’처럼 키워보고자 한다.
“뉴욕 일원 한인 밀집 지역에서 3만 표를 모았습니다. ‘한인에게 도움이 되는 후보가 A이니 위에서 두 번째에 투표하십시오’ 하면 몰표가 되는 거죠. 한인 유권자가 뭉치면 캐스팅 보트 구실을 할 수 있어요. 특정인을 당선하게는 못하더라도 해코지는 가능합니다.”
그는 미국 의원의 한국 방문도 적극적으로 주선한다.
“매년 연방 상·하원 의원 70명가량이 이스라엘 민간 펀드로 텔아비브,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의원이 타국의 정부 펀드로는 외유를 가기 어려워요. AIPAC의 방식을 벤치마킹해 미 의원을 한국으로 보냅니다. 일례로 일레나 로스-레티넨 전 하원 외교위원장이 한국의 한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습니다. 중간에서 다리를 놓은 게 우리입니다. 외국에서 명예학위를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오면 의회 윤리위원회에서 문제가 없는지 살펴본 후 외유를 갈 수 있습니다. 가족도 함께 초청하는 형식이어서 의원이 좋아하죠. 인사동, 남대문시장 데려가면 얼굴이 환하게 변합니다. 지금까지 의원 18명을 한국에 데려왔습니다.”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데는 한인 사회가 의원들에게 제공한 정치자금도 한몫했다.
“정치자금법이 바뀌는 바람에 덕도 봅니다. 미국 의원들이 2003년 이전엔 돈 많은 기업, 돈 많은 사람으로부터 무제한 정치자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존 매케인 의원 주도로 소프트머니 금지법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원의 경우 한 사람이 2년에 2600달러 넘게 기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처럼 풀뿌리 유권자를 확보한 사람의 영향력이 더 확대된 겁니다.”
그는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 의원과 미국 의원을 연결해주는 구실도 한다.
“여성 의원 A씨가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려고 워싱턴에 온 적이 있습니다. A 의원이 대사관에 취임식 초청장을 구해달라고 요청했나봐요. 대사관이 저한테 티켓을 확보해달라고 부탁해와 3장을 구해줬습니다. A 의원은 영어를 곧잘 하더군요. 애니 팔레오마베가 의원과 면담을 주선했는데, 팔레오마베가 의원이 면담 중 A 의원에게 화를 내더군요. A 의원이 전략적 측면을 고려할 때 인권 문제보다 한일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자 발끈한 겁니다.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한국에 올 때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거주하는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에 꼭 들르는 사람입니다. ‘인권보다 더 중요한 전략이 세상에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고 A 의원을 몰아세우더군요. 미국 의원과의 10분 면담 동안 할 말을 못 찾아 힘들어하는 의원도 여럿 있었습니다. 10분이 너무나 긴 거죠. 면담을 끝내고 미국 의원이 ‘미스터 김, 저 사람 왜 나를 만나자고 한 거예요?’라고 물어서 난처한 적도 있었습니다. 사진 찍으러 온 거죠, 뭐. 미국에 오는 한국 정치인의 역량이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아직도 의원 외교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