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6년 2회에 걸쳐 진행된 미소공동위원회 양국 대표들. 앞줄 왼쪽 4번째가 미 대표 하지 중장이고, 다음이 소련 대표 스티코프 중장이다.
북한의 정치지형도 좌우합작에서 우익타도 방향으로 빠르게 선회했다.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은 모스크바결정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 또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소군정은 모스크바결정에 찬성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대한 사소한 반대도 용납하지 않았다.
북한의 좌익은 모스크바결정에 반대하는 것은 민족통일을 방해하는 모략적 행동이라고 비난하고, 이 결정을 지지하는 정당사회단체들을 망라해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북한의 좌익은 연소용공(聯蘇容共)을 표방해온 민주당과의 합작을 포기했다. 1946년 1월5일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공산당은 조만식의 위원장직 사임을 전격 수리했다. 조만식은 이 날로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2월5일 소집된 민주당 열성자협의회도 조만식과의 분리를 공식 선언했다.
이처럼 남북한에서 좌우대립이 격렬해지는 상황에서 모스크바결정 4항에 따라 1946년 1월16일부터 2월5일까지 미소양군사령부대표회의(이하 ‘대표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대표회의는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으로 초래된 행정·경제 영역에서 남북분단 상태를 조정할 목적으로 소집되어, 모스크바결정 실천을 위한 미소의 협조 가능성을 시험하는 최초의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행정·경제의 ‘상설적 조정’에 대한 양측의 접근방식 차이만을 선명히 드러냄으로써 한국 문제의 해결 전망은 어두워졌다.
소련측은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공위를 소집하는 문제와 행정·경제 영역에서 남북한에 관련된 긴급한 조치를 마련하기 위해 대표회의를 소집하는 문제를 두 개의 서로 다른 안건으로 간주했다. 즉 임시정부 수립 문제는 ‘현재의 문제가 아니며’ 미소 양군 사령관을 수반으로 하는 통일적 행정기관 수립 문제도 양국 정부의 소관사항이므로 대표회의에서 논의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서울에 중앙집권적 관리기구 설치 제안
소련측은 북한에서 남한으로 석탄과 전력을 공급하거나 남한에서 북한으로 양곡과 공업원료를 공급하는 문제와 같이 남북한에 관련된 긴급한 행정·경제 문제만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대표회의의 성격을 이 문제들에 대해 심의하고 결정을 채택하는 것으로 기능이 종료되는 일회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향후 행정·경제에 대한 상설적인 조정을 위해 필요할 경우 대표회의를 별도로 소집할 것을 주장했다.
미국측은 대표회의를 통해 남북한간 자유왕래를 제한하는 모든 장애를 신속히 철폐하고 단일한 행정·경제 단위로 정상적인 관리체계를 확립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미군정장관 아널드는 30일 이내에 행정·경제 영역에서 분단 상태를 완전히 극복하고 ‘전 한국의 통일원칙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널드는 행정·경제의 통일 방안을 준비하는 것은 임시정부 수립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며 모스크바결정을 이행하는 하나의 단계라고 간주했다.
미국측은 남북한 경제의 통합 방안으로 한국의 수도 서울에 중앙집중적인 관리기구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이 기구의 통제 아래 단일한 재정금융, 전력공급, 우편, 전신전화, 라디오방송, 교통운수 체계를 복구하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중앙기구의 관리 책임을 한국인에게 위임할 것을 주장했다. 미국측은 향후 조정을 위해 남북한 전역을 자유롭게 통행할 권한을 갖는 전문가들로 연락그룹을 조직하여 교환할 것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