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림팀 출신 6~7명 현재도 국정원에 재직 중”
- “미림팀 훨씬 이전인 중앙정보부 창설 때부터 도청 시작”
- “국정원 직원들에게 도청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
- “DJ 정권 초기 호남 출신 득세하고 ‘살생부’ 나돌아 반출 결심”
- 274개 미공개 테이프, 쓸 만한 건 적다?
공운영 전 안기부 미림팀장.
2004년 재미교포 박인회씨가 MBC 이상호 기자에게 옛 국가안전기획부 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을 제공했다. 그 안에는 1997년 이학수 삼성전자 부회장(당시 삼성기업구조조정 본부장)과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의 대화 내용이 들어 있었다.
MBC가 수개월째 보도를 미루고 있던 상황에서 2005년 7월21일 ‘조선일보’는 국가정보원이 미림팀을 구성해 주요 인사들을 조직적으로 불법 도청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러자 다음날 MBC는 이른바 X-파일 내용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이후 검찰은 공운영 전 안기부 미림팀장에게서 공개되지 않은 도청 테이프 274개 등을 압수했다. 검찰은 김대중 정부 때도 국정원이 주요 인사들을 도청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신건 전 원장 등 당시 국정원 관계자들을 기소했다.
X-파일 제공자인 박인회씨는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공갈미수 혐의로 구속돼 징역 1년2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됐다. 공운영씨도 1년6개월형이 확정됐다. 이상호 기자는 통신비밀보호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됐으나 2006년 8월11일 서울지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휴일 없는 근무 탓에 기피 부서”
공운영(孔運永·58) 전 안기부 미림팀장은 ‘X-파일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검찰이 압수한 274개의 미공개 도청 테이프와 13권의 녹취록을 제작한 당사자다. 검찰과 국정원은 X-파일 수사 결과를 지난해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로 국정원 도청의 실태가 모두 밝혀졌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공 전 팀장의 검찰 진술 내용을 살펴보기로 했다.
공 전 팀장은 검찰에서 안기부의 불법 도청과정을 생생히 밝혔다. 그의 진술은, 그의 발언을 정제해서 전달한 사정기관의 발표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같은 내용이라도 도청을 수행한 사람이 직접 말하는 경험담이 더 믿음을 줄 수 있다. 국정원측 처지를 고려해 ‘뺄 건 뺀 것’이 아니라서 도청조직 운영실태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공 전 팀장은 국가기관에 소속된 직원이면서도 ‘거물급 인사 불법도청’이라는 매우 특별한 업무를 수행했다. 그런 업무를 하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알아봤다. 공 전 팀장이 불법 도청 자료를 몰래 복사해 국정원을 나온 순간 이미 X-파일 사건은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그가 느낀 격정과 인간적 고뇌는 특히 눈길을 끈다.
미림팀은 2차에 걸쳐 운영됐다. 1991년 9월부터 1993년 7월까지가 1차, 1994년 6월부터 1997년 11월까지가 2차다.
1차 미림팀은 노태우 대통령 재임 때인 1991년 9월 안기부 국내수집 담당국장의 지시로 공운영씨 주도하에 4명으로 편성됐다. 1992년 초부터 도청활동이 본격화됐다. 공씨는 안가에서 녹음테이프를 풀어 보고서를 작성한 뒤 담당 과장에게 보고했다. 대상은 주요 정치인과 주변 인사였다. 그러나 대선 정국이던 1992년 12월 활동중단 지시가 내려졌다. 대선이 끝난 뒤 녹음테이프 40여 개는 청사내 소각장에서 소각했으며 미림팀은 1993년 7월 해체됐다.
2005년 8월19일 X-파일 사건과 관련, 검찰직원들이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마친 뒤 차량으로 국정원을 나서고 있다.
한 주에 1~2개 생산된 도청 테이프 라벨엔 도청 일시, 장소, 대화자 이름이 명기되어 있었다. 2차 미림팀은 1998년 4월 해체됐다.
서류상 없는 부서, 지원은 펑펑
검찰 진술에 따르면 공씨는 서울 S상고를 졸업한 뒤 1975년 3월 중앙정보부에 공채로 합격, 과학정보국 등에서 12년 내근을 하다 안기부로 개칭된 뒤엔 대공정책실 노동운동권 팀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1991년 9월 상부의 지시로 미림팀장에 임명된 것이다.
공씨는 검찰에서 미림팀 조직 구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내가 팀장이고 6급이 1명, 7급이 2명이었다. 젊은 직원들은 업무에 서툴 뿐만 아니라 야간, 휴일 작업이 자주 있다보니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 6개월 주기로 직원 교체가 이뤄졌다”고 진술했다. 이어 공씨는 “나와 함께 근무한 직원은 10여 명 미만으로 기억하는데 6~7명은 현재도 국정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미림팀은 망원(정보원), 도청장비 설치자, 도청 수행 및 녹취록 작성자(대개 공 팀장 1인이 수행), 타이핑 작업자 등으로 업무가 나뉘어 운영됐다. 핵심 업무가 공 팀장 1인에게 집중돼 있었던 셈이다. 망원은 물론 안기부 직원이 아니다. X-파일 사건으로 비화된 1997년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의 만남도 해당 호텔에 ‘심어놓은’ 공 팀장의 망원이 예약정보를 제공해 공 팀장이 미리 식탁 아래에 녹음기를 설치해 뒀다.
“일단 각 식당 등지에 (종업원 등을 포섭해) 망원을 두고 (도청 대상) 인사들이 회동한다는 연락이 오면 (미림팀) 직원들이 직접 장비를 설치한다. 가끔 망원들이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는 직원들이 녹취를 하지만 대부분은 내가 직접 현장에서 청취한 후 테이프를 듣고 새벽까지 녹취를 끝낸다. 다른 팀원이 다시 이를 타자로 쳐서 보고서 형태로 만들어 상부에 전달하는 것이다.”
공씨는 “일단 망원들로부터 정·관·재계·언론계 최고위층 인사들이 회동한다는 예약 정보를 듣게 되면 도청 여부는 인사들의 중요도에 따라 내가 판단하여 결정한다. 대통령을 제외한 최고위층 인사는 모두 도청 대상자로 보면 될 것 같다. 당시엔 주요 인사들이 회동하는 장소가 요즘처럼 많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음은 미림팀 활동에 관한 공씨의 진술내용.
▲미림팀 활동자금 : 국정원 자체 예산에서 경비를 지원받았다. 매년 연도별 소요예산을 내가 신청해 월 800만원 정도를 사용했다. 망원 한 사람당 20만~50만원의 운영비가 들었다. 망원에 대한 운용비가 많이 들지는 않은 것이다.
미림팀은 직책상 대공정책국(실) 지역과 소속이었다. 미림팀 팀원은 서류상으로는 지역정보관들로 되어 있었다. 또한 지역과 지역담당 망원비로 운영비를 지급받았다. 이런 식으로 하여 안기부는 미림팀에 관해선 행정적으로 일절 근거를 남기지 않았다.
▲도청장비 : 국정원에서 지급된 소형 녹음기다. 테이프는 1주일에 1~2개 이상 녹음하기 힘들다.
“통신을 이용하는 곳”으로 소문
▲도청조직의 승계 : 도청은 상부 지시로 하게 됐다. 중앙정보부 창설 때부터 도청조직이 운영됐는데 쉽게 말하면 나는 그것을 승계한 것이다. 과거에는 ‘득문’ 위주였는데 내가 과학화하기 위해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기부 업무는 국제 파트와 국내 파트로 나뉘는데 국내 파트의 주요 업무는 정치동향을 파악하는 것이므로 정치, 경제, 언론 등 각 분야에서 벌어지는 동향을 상세하게 알기 위한 차원에서 그렇게 미림팀을 조직했다고 본다.
▲미림팀 활동의 불법성 : 맨 처음 활동 땐 대개 유흥업소 망원들로부터 득문 활동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91년 9월 내가 미림팀의 과학화라는 명목으로 장비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도청에 대한 처벌법규가 없었기 때문에 불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1993년 12월27일 통신비밀보호법이 제정됨으로써 미림팀의 도청활동은 불법이 됐다.
▲보고체계 : 공식 보고체계는 정보수집과장-부국장-국장-차장-부장(원장)이다. 처음에는 계통을 따라 보고하다가 오정소 국장이 등장한 이후로는 직접 국장에게 보고했다. 오정소씨가 차장이 됐을 땐 직접 차장에게 보고했다. 일부가 눈치를 주면 그 사람에게 간혹 문건을 사본해 주기도 했다. 기조실장 등 방계에는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
“식당측이 알아서 도청해주기도”
공씨는 “안기부 내의 같은 부서 직원뿐만 아니라 국내 활동 요원들은 모두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안기부로 개칭된 후까지 미림팀이 어떤 조직이며 무슨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전담 조직이 주요 인사를 불법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안기부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는 얘기다. 미림팀의 존재가 안기부 내에서 알려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공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미림팀은 다른 조직과 달리 밀폐된 단독 사무실과 안가를 사용했다. 미림팀장 차량 역시 고급 승용차에 외부에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도록 선탠을 했고 차량에 중형 수신기 안테나가 부착되어 있었다.
당직 근무자나 직원들은 미림팀장이 안가에서 철야 업무를 끝낸 후 보고서 초안을 갖고 녹취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새벽에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을 매번 목격했다. 미림팀이 어떤 조직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유흥업소나 호텔, 한정식집 등지에서 주로 ‘통신’을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조직으로 공공연하게 알고 있었다.”
1차 미림팀은 1992년 9월 대선을 3개월 앞두고 안기부 국장의 지시로 활동이 중지된다. 공운영 당시 팀장은 이 때부터 대기발령을 받았다. 공씨는 국장에게 자신을 무보직 발령한 것에 대해 항의했다. 그러나 국장은 “미림팀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며 공씨를 냉정하게 대했다고 한다.
1994년 6월7일 오정소 당시 대공정책실장은 공씨를 다시 불러 미림팀을 재조직하라고 지시했다. 공씨는 거절했으나 오 실장은 “승진을 시켜주겠다”며 공씨를 설득해 공씨는 다시 일을 맡게 됐다고 한다. 오 실장은 나중에 공씨를 서기관으로 승진시켰다. 공씨는 “미림팀은 국정원 내부 이외의 별도의 보고체계를 가동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오정소 실장의 보좌관이던 김모씨는 언론 등을 통해 “도청 자료들이 오 실장을 통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씨 등에게 전달됐다”고 주장했다. 검찰이 이 주장에 대한 의견을 묻자 공씨는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도청자료의 보관 : 미림팀 사무실에 있는 공용 캐비닛 안에 날짜별로 구분해 보관했다. 2, 3부의 녹취보고서를 만들어 상급자들에게 건넸으며 보관된 자료는 3개월 주기로 소각장에서 폐기처분했다.
2차 미림팀은 1997년 12월 대선 이후 활동을 중단했다. 그런데 2개월여 뒤인 1998년 2월까지 미림팀이 도청을 했다는 자료가 나왔다. 이에 대해 공씨는 “대선 이후로는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했는데 그 후로도 망원들이 ‘스스로’ 녹음을 하여 나에게 연락해왔다. 그래서 내가 1998년 2월 이를 수거하여 집에 가져다놓은 것이 좀 있다”고 설명했다.
“호남 출신 직원들과 불화”
공운영씨는 도청 자료를 빼내게 된 동기에 대해 말하면서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상관의 냉대, 조직에 대한 배신감, DJ 정부로의 정권교체에 따른 불안감 등이 작용했다고 한다. 특히 국정원 내에서 ‘호남 출신 직원’의 득세를 보며 신변보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 공씨는 정권 교체 얼마 뒤 직권면직 처분됐다. 1990년대 국정원에서 일어난 지역감정 갈등 논란이 공씨 사례에서도 묻어나는 듯하다.
국정원 자료에 따르면 국정원은 1999년 3월 ‘조직개편에 따른 정원 대비 초과현원 직권면직 처리를 위한 심사위원회’를 열었다. 위원장은 라종일 1차장, 신건 2차장, 문희상 기조실장 3인이었다. 직권면직처분의 기준으로는 정년 임박자, 목적 외 채용자, 직무수행능력 부족자(건강, 판단능력, 근무태도 불량, 자질부족, 업무능력 부족, 지휘통솔력 부족, 근무성적 부족, 정신자세, 대인관계), 징계처분 등 처벌 전력자, 발전가능성 등이 제시됐다.
그런데 공씨는 ‘근무태도 불량자’라는 낙인과 함께 직권면직 처분됐다. 휴일도 마다않고 궂은일인 도청을 하고, 밤을 새우며 녹취록을 써서 보고해온 공씨로선 자신을 ‘근무태도 불량자’로 규정해 퇴출시킨 조직에 대해 심한 인간적 배신감을 갖게 된 듯하다.
“도청 업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그렇고 하여 내가 하다보니 몸이 안 좋아도 병원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가 아파도 병원을 못 가다보니 결국 틀니까지 하게 됐다.” (공씨)
도청 자체는 물론 국정원으로부터 도청자료를 유출하는 행위도 불법이지만 공씨는 이런 이유 등으로 자료유출을 단행한다(공운영씨는 국정원을 퇴직한 뒤 국정원장을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면직처분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해 승소판결을 받았다).
“대외파견 좋아하네”
다음은 공씨의 계속된 진술이다.
“서기관 승진 이후인 1996년 후반기쯤 국정원 간부 OOO에게 ‘(미림팀을) 그만두겠다. 대외파견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OOO은 ‘대외파견 좋아하네’라고 일축하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이제 나는 끝까지 가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앞날이 걱정되어 사무실에 있던 테이프와 녹취록을 일부씩 나누어 안가의 침대 밑에 가져다놨다. 그러다 1997년 12월19일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는 것을 보고 더욱 걱정이 돼 자료를 그달 하순 집으로 옮겼다.”
공씨는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면 저희(미림팀)가 감시를 한 것이 드러날 것 같았고, 특히 저와 사이가 나빴던 호남 출신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국정원 지휘부와 독대하는 상황을 보자 나의 신변보호가 절실해져 자료를 반출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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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씨의 우려대로 그는 1998년 4월13일 다른 국정원 직원 500여 명과 함께 퇴직대기명령을 받게 된다. 그는 이날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퇴직대기명령을 받은 날 비가 엄청 많이 내렸다. 내가 개인사물함을 꾸려서 갖고 나오는데, 직원 중 어느 누구 하나 나를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살생부’가 나도는 등 흉흉한 분위기가 지속된 가운데 퇴직하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 모두 경황이 없던 탓도 있을 것이다.
직원이 퇴직하면 다른 직원들이 송별회를 마련해주고 환송을 해줬는데, 당시에는 다른 직원들이 나와 가까운 척하면 손해를 볼 것 같았는지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비록 내가 사무실에서 사물함을 가지고 나올 때 웃는 표정을 지었지만, 차를 타는 순간 조직에 대한 배신감이 심하게 들었다. 죄인 취급을 받고 퇴직한다는 생각이 들어 피가 끓어올랐다. 억울한 심정에 ‘울컥’ 눈물을 쏟으면서 집으로 갔다.”
공씨는 퇴직대기발령을 받은 뒤 복직마저 무산되자 이때부터 갖고 나온 자료를 복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기발령 1년 뒤인 1999년 3월31일 국정원을 퇴직했다. 공씨는 “이 1년 동안 날마다 술과 눈물로 한탄하면서 생활했다”고 술회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미림팀장으로 근무하며 평생 공무원 생활을 했는데 불명예스럽게 직권면직을 당해 억울함이 너무 컸다. 퇴직할 당시 나의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아 앞날이 깜깜했다. 이때부터 같은 퇴직직원 임OO과 가까워졌다”고 한다.
“천용택에게 친전 보낸 이유는…”
공씨는 퇴직 후 자택 담보 대출금 1억4000만원과 퇴직금 1억5000만원을 전부 투입해 통신사업을 시작했으나 두 달이 지나도록 매달 3000만원씩 적자를 봐 정신이 아득했다고 한다. 한국 정·재계 거물들의 비밀 대화내용을 모두 엿들은 최고의 ‘정보 수집가’였지만 막상 퇴직해 생업현장에 뛰어들어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결국 국정원 퇴직 수개월 뒤인 1999년 9월 공씨는 임씨를 통해 박인회씨를 소개받은 뒤 삼성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전 회장의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와 녹취록을 박씨에게 건넸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이를 국정원에 신고하면서 삼성 건은 무산됐으며, 공씨는 갖고 있던 테이프 261개와 녹취록을 국정원에 반환했다.
그러나 공씨는 “천용택 국정원장과 관련된 테이프 2개는 별도로 밀봉해 천 원장에게 친전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대기발령한) 500여 명이 피눈물 나는 처지에 있다.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호소하는 차원이었다는 것이다.
공씨는 274개 테이프와 13권의 녹취록을 별도로 복사해 보관하고 있다가 2005년 7월 X-파일 사건이 터지면서 검찰에 테이프와 녹취록을 압수당했고, 본인도 구속됐다. 국정원에 반납한 개수와 차이가 나는 부분은 테이프에 라벨이 없거나 ‘시시한 내용’이라고 한다.
공씨는 이들 다량의 미공개 테이프와 녹취록에 대해 검찰에서 흥미 있는 얘기를 했다.
“국정원에서 도청 테이프와 녹취 문건을 서로 맞추어서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라 내가 관리하고 있던 도청 테이프와 녹취 문건들 중 중요한 것만 대충 챙겨 나왔다. 이 때문에 테이프는 있지만 녹취문건이 없는 경우도 있고, 녹취 문건은 있지만 테이프가 없는 것도 있다.”
그는 “테이프 중 그리 중요한 대화 내용이 없는 것은 보고할 필요가 없어서 녹취록을 만들지 않았기에 녹취 문건이 없는 것도 있다. 당시는 녹취 보고서를 가지고 나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녹취보고서와 도청 테이프를 맞추어서 가지고 나올 필요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테이프 없는 녹취록이거나 그 반대”
공씨의 이런 주장에 따르면 274개의 도청 테이프와 13권의 도청녹취록이 1대 1 대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X-파일 사건 수사 당시 13권의 도청녹취록 분량이 3000여 쪽에 이른다고 언론에 알려졌는데, 공씨는 검찰에서 “13권의 녹취록은 A4지 500여 쪽 분량”이라고 말했다.
테이프의 수는 274개에 이르지만 이중엔 녹취록이 작성되지 않은 것도 상당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테이프에 부착된 라벨로 대화 녹음 시점, 장소, 대화자를 식별해야 한다. 결국 이런 기본 사항조차 정확하고 자세하게 파악되지 않은 테이프가 꽤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럴 경우 테이프만으로는 정보 가치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공씨는 테이프보다는 녹취록을 가져 나오는 데 중점을 뒀다고 했으므로, 녹취록엔 민감한 내용이 상당부분 담겨 있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테이프가 없는 녹취록 내용 또한 무용지물이다. 즉 검찰에 압수된 274개 도청 테이프와 13권의 녹취록은 그 방대한 분량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말을 했는지를 음성과 내용으로 완벽히 입증할 수 있는 숫자는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사생활이나 일상적인 내용은 빼고 수사의 대상이 되는 범죄 정보의 실마리가 되는 내용은 더욱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공씨의 이 같은 진술은 274개 테이프 내용의 공개 및 수사를 촉구하는 측에겐 “실제 공개 및 수사 대상이 되는 내용이 예상보다 적으므로 수월하고 신속하게 추진해 마무리할 수 있다. 빨리 하자”는 명분을 줄 것이다. 반대로 도청 테이프 내용 공개를 반대한 측에게도 충분한 반대논리를 제공할 수 있다.
“테이프와 녹취록이 제대로 대응이 되지 않는 등 정보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 수사기관에 의한 임의적인 표적 수사의 가능성 또한 더욱 높아졌다. 불법도청자료의 공개 자체도 불법이지만 부정확한 불법도청자료의 공개는 더 큰 문제며 그 부작용이 너무 크다”는 논리가 가능한 것이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미공개 자료를 공개한다면, 결국 13권의 녹취록 내용 중 테이프가 있는 부분 중에서 일부 선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