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세 오판이 심각하다.
그런데 이 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에게 “양국의 선대 지도자들이 손수 맺어 정성껏 키워낸 전통적 우의 관계는 시대의 풍파와 시련을 겪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교체된다고 해서 변할 리가 없다”고 했고, 이에 대해 후 주석은 “북중동맹을 자자손손 발전시켜 나가자”고 언급했다. 상당수 북한 전문가와 언론은 이 같은 언급의 의미를 북한의 김정은 후계자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김정은 후계자설은 뜬소문
또한 2010년 3월 조선중앙방송에서 양형섭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백두산이 낳은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혁명 수위에 모신 건 행운이며 그이를 자자손손(子子孫孫) 충실하게 모시는 데 조선 민족의 미래가 있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어떤 국책연구기관 박사가 “북한이 ‘자자손손’을 부각한 대목에서는 김 위원장의 셋째 아들 정은(26)으로의 3대 세습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분위기가 확연하게 읽힌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이 같은 김정은 후계자설은 지난해 상반기부터 확산됐는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진보 성향 잡지 ‘민족21’이다. 이 잡지는 2009년 6월호에서 “김정운(국가정보원은 김정은이라는 이름이 맞는 것으로 안다고 밝힌 바 있다)이 후계자로 최종 결정됐으며 북한이 후계자 지도체계 수립에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비슷한 시기 보수 성향의 민간단체 ‘북한민주화네트워크’도 소식지 15호에서 “평양 시민들 사이에 김정운이 후계자로 낙점돼 후계자 수업을 받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전했다. 이에 더해 세계적 주간지 ‘타임’은 2009년 6월1일 인터넷판에서 ‘북한 김정일의 후계자-부친이 총애하는 김정운’이란 제목으로 “김정운이 북한의 권력을 장악 중인 국방위원회 지도원이 된 것으로 미뤄볼 때 김정운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뒤이어 상당수 정부 관계자도 김정은 후계자설을 사실인 양 받아들였다.
결국 현재 시점에서 대다수 북한전문가와 언론 심지어 상당수 정부 관계자까지 김정은 후계자설을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고, 이와 다른 주장은 소수 견해로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 같은 김정은 후계자설은 심각한 오보이고 나아가 북한정세 오판을 낳는 주요한 원인이다.
이번 북중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언급한 “시대의 풍파와 시련을 겪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교체된다고 해서 변할 리가 없다”라는 말의 의미는 김정은 후계자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20년 동안의 북중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 직후 중국은 한국과 수교를 맺음으로써 북한으로 하여금 강한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뒤이어 심각한 식량난으로 인해 1990년대 말 200만명가량이 아사했다는 이른바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혈맹이라는 중국은 특별한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이 같은 북중관계의 균열과 북한이 느낀 배신감은 결국 북한을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내몰았다. 2006년 1차 핵실험, 2009년 2차 핵실험 과정에서 북한은 중국과 협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복잡 미묘한 갈등을 겪었다. 김 위원장은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국무원 총리의 북한 방문(2009년 10월)과 올해 북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과 중국이 시대의 풍파와 시련을 극복하고 혈맹관계를 재정립하자는 취지에서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교체된다고 해서 변할 리가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를 두고 북한 김정은 후계체제를 암시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주관주의의 전형일 뿐이다.
그리고 자자손손이라는 표현은 2008년 5월 후진타오 주석의 와세다대 강연에서 ‘중·일 우호의 씨를 뿌려 그 기치를 자자손손 전해야 한다’라고 언급한 것에서 나타나듯, 북한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흔히 쓰는 표현이다. 양형섭의 발언 또한 김정은 후계자설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침소봉대일 뿐이다. 2009년 4월6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선거를 이틀 앞두고 노동신문이 ‘정론’을 통해 “이번 선거를 계기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일심단결을 세계에 과시하자”고 주민들에게 촉구한 것이 북한 노동당의 공식 의견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김정은 후계자설은 아직 단 한 번도 노동신문, 평양방송, 중앙방송이 공식적으로 언급한 바 없을 뿐 아니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2009년 9월 “후계자 문제는 논의되지 않고 있다”고 표명한 바 있다. 오직 이런저런 소문만이 난무할 뿐이고 그런 소문을 근거로 해 기사가 만들어지고 그것에 북한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주석이 덧붙여질 뿐인 것이다.
김정은 후계자설을 비롯한 북한 관련 정보의 부정확성이 만연한 데는 여러 원인이 있다. 우선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노무현-김대중 정부 10년 동안 붕괴한 대북 정보 획득 사업을 성급한 성과주의 위주로 복원·추진하는 과정에서 비롯한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북한 전문 인터넷 매체의 활동 과정에서 형성된 경쟁주의를 지적할 수 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북한 관련 정보 브로커에게 돈이 흘러가고 있다. 이들 브로커와 북한 전문 매체가 북한 관련 정보를 임의로 가공하고, 이것을 주류 언론이 인용 보도한다. 이 같은 보도는 거꾸로 남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북한 주민에게 전해지고 북한 주민이 한국 언론 보도를 전해 듣고 역으로 소문을 퍼뜨리는 양상이다. 왜곡된 정보시장 메커니즘은 민간 대북지원 단체들이 북한식량난을 주관적으로 과장해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만약 김정은 후계자설을 좀 더 설득력 있게 주장하려면,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나 조작 가능성이 높은 문서 등이 아니라 북한 공식매체인 평양방송, 중앙방송이나 노동당기관지인 노동신문이 김정은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김정은이 후계자라면 노동당의 어떤 부서에서 어떤 직책을 가지고 활동하는지를 밝혀내야 할 것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김정은, 김정남, 김정철 중 노동당에서 공식 직책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은 없다.
왜곡된 북한 정보시장 메커니즘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가 되는 과정을 분석해보면, 김정일은 1964년 중앙당에 진입한 후 선전선동부 과장,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서 김일성의 현지지도에 동행했으며 1969년에는 가극 ‘피바다’를 제작했고 1973년에는 3대혁명소조운동을 지휘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김정일은 1973년 9월 당 중앙위원회 비서로 추대됐고, 1974년 2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을 맡으면서 사실상의 후계자가 됐다. 그 이후에도 치열한 권력투쟁 과정을 거쳐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주체사상을 유일지도이념으로 정립하는 것을 주도하면서 후계자의 위상을 확보했다. 이 과정은 김일성에 의한 후계자 낙점이 아니라 김정일이 후계권력을 쟁취하는 투쟁의 역사다.
김정은 후계자설과 관련한 사건들을 들여다보자. 2002년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가 자신의 아들인 김정은 또는 김정철을 후계자로 만들려는 욕심으로 자신을 평양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로 칭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이에 동조한 대표적 인물이 박재경인데, 그는 2004년 8월 고영희 사망 이후 김정일 측근에서(박재경은 상당 기간 현철해와 함께 김정일 최다 수행 기록을 갖고 있었다) 배제돼 권한은 없고 형식적 지위만 높은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좌천된 바 있다. 고영희와 가깝던 인물들은 한직으로 물러나거나 교통사고로 죽었다.
김정은 후계자설은 김정일 건강이상설, 뇌출혈설과 연관돼 있고 나아가 북한체제 위기론으로 이어진다. 북한체제 위기론은 2008년 8월 김 위원장의 뇌출혈설로부터 비롯해 2009년 초 김정은 후계자설로 증폭됐으며 2009년 11월 시행한 화폐개혁 실패론과 맞물리면서 확산됐다. 그러나 통일부 발표에 따르면 김 위원장의 2009년 공개 현지지도 횟수는 역대 최다다. 2010년 현지지도 횟수도 2009년과 엇비슷하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이번 북중 정상회담 때도 정상적인 활동 능력을 보였다. 화폐개혁 실패론도 도마에 오른다. 북한의 시장경제 세력이 화폐개혁으로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나 전체적으로는 부작용을 수습해가고 있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필자는 1985년 장명봉 교수의 ‘북한사회주의헌법에 관한 연구’라는 박사논문을 읽은 것을 시작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선집, 모택동선집, 김일성·김정일선집, 주체의 사상·이론·방법 등에 대해 10년 가까이 공부했으며, 그 이후에는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관점의 여러 사상, 이론 서적을 공부했다. 그리고 SK텔레콤 북한담당 상무로 일하면서 남북 통신협상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주규창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 등 북한 노동당과 군부의 핵심인사(북한에서 통신은 사회주의 체제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에 당과 군부의 핵심인사들이 협상에 관여한다)를 수십 차례 만나 대화한 일도 있다. 그 같은 만남을 통해 북한이 살길은 개혁·개방밖에 없다는 소신을 갖게 되었다. 선진화 운동을 통해 북한이 개혁·개방화를 이뤄내고,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게 필자의 의견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필자의 견해로 볼 때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실사구시적 자세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찾아보기 힘들뿐더러 부정확한 정보와 소문에 휩쓸려 그릇된 판단이 횡행한다. 필자는 2009년 6월5일 한 일간지에 기고한 ‘김정운 후계자설의 허상과 대북정책’이라는 칼럼에서 김정은 후계자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김정은 후계자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확인된 정보를 바탕으로 의견을 제시할 것을 기대한 바 있다. 그러나 1년여가 지난 지금도 뜬소문 외에 김정은 후계자설을 뒷받침하는 정보는 전무(全無)한 상황이다.
6월7일 개최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대회에서 장성택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자 대부분의 언론과 학자는 이번 인사를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을 위한 포석으로 해석했다. 미국 해군분석센터(CNA) 켄 고스 외국지도부 연구담당 국장도 “김정일이 그의 셋째 아들(김정은)에 대한 후계 계획의 일환으로 천안함 공격 명령을 내렸다는 결론을 내리는 북한 전문가와 정보관계자가 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자신도 이 견해에 동의하는 쪽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분석 역시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정보에 근거했을 뿐이다.
미국 정보기관의 분석이 한국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위성촬영에 의한 정보, 도청에 의한 정보, 객관적인 데이터에 대한 분석 능력 등에서다. 대인정보에 의한 북한 정보 분석은 한국의 전문가들보다 오히려 딸린다. 북한 지도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폐쇄성을 자랑하는데, 미국인이 북한인을 접촉해서 정보 수집을 하는 데는 상당한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필자가 미국을 방문해 북한정보를 총괄하는 국가정보국(DNI)의 북한담당관 조지프 디트러니를 만나 대화했을 때 확인했던 것도 미국의 대(對)북한 대인정보 획득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이었다.
북한 정세 오판
필자의 지인이 3월 초 중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기 직전, 이 대회 참석을 준비하던 둥젠화(董建華) 전 홍콩행정장관을 만나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 그는 중국 공산당 고위층과 친분이 두터워 북한 관련 고급 정보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둥젠화는 김정은 후계자설과 관련해 북한 당국에서 김정은 후계자설에 대해 단 한 차례도 언급한 바가 없고 김영남은 부인까지 했는데, 왜 한국에서는 뜬소문을 가지고 호들갑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북중 신(新)밀월은 동북아 질서가 요동할 일대 사건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최근 발표한 ‘2010 월드팩트북’에 따르면 북한은 2008년, 2009년 2년 연속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 보고서는 북한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지난해 3.7% 증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북한 경제가 1980년대 말 소련,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이래로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수렁에 빠져 있었으며, 식량난이 심각하던 1990년대 말에 -8% 안팎의 성장을 기록했던 것과 비교해 2008년부터 연이어 2~3%의 플러스 성장을 기록한 것은 북한 경제 동향과 관련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경제는 이번 북중 정상회담을 통해 중대한 전환을 맞이할 것으로 예측된다. 중국은 2002년부터 동북진흥계획을 세우고 동북3성과 북한지역에 대한 개발계획을 수립했지만, 자본이 부족했고,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인해 북한과 미묘한 갈등을 겪으면서 그것을 실행하는 속도가 느렸다.
중국은 2조4000억달러에 달하는 세계 1위의 외환보유고를 가진 경제대국이다. 중국은 북한의 중국에 대한 확실한 지지를 조건으로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경제협력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 대한 지혜로운 대응
따라서 2009년부터 한국사회에서 회자되는 북한체제 위기론은 중대한 정세 오판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980년대 말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시작한 북한체제의 불안정성은 두 차례 핵실험 성공을 기반으로 최소한 체제 생존의 조건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올해 북중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대대적 경제지원을 약속받음으로써 1990년대 이후 그 어느 시기보다도 체제 안정적 요소가 증대됐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려면 치밀하게 정권진화(Regime Evolution)를 유도해야 한다.
한반도 정세에서 문제의 핵심은 중국에 대한 지혜로운 대응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이 가장 강성했을 시기인 한나라 무제 때와 당나라 태종 때 한반도는 한사군이라는 식민지 경험을 했고, 고구려가 망하면서 안동도호부가 설치됐다. 중국은 현재 미국과 더불어 G2로 불리는 초강대국이 됐으며, 동북아에서는 중국 전문가 이희옥 성균관대 교수의 표현대로 룰 메이커(Rule Maker)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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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혈맹관계 복원이 북한의 대(對)중국 종속화를 심화할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이슈다. 물론 북한은 두 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중국의 개입을 차단하려 했으며, 앞으로도 두 나라 사이엔 복잡한 함수가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정세의 흐름 속에서 중국이라는 파도의 크기가 너무 커서 북한이 그것을 감당해낼지 의문이다. 더 큰 문제는 파도가 북한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이다.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에서 한반도의 생존 전략, 발전 전략을 수립하려면 김정은 후계자설, 북한체제 위기론 등 뜬소문에 근거한 북한 정세 분석을 지양해야 한다. 갈수록 냉엄해지는 국제 질서의 현실을 직시하고 치열한 사색과 깊이 있는 연구를 기초로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만 한반도에 통일된 선진국을 건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