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프 아주 좋아하고 주는 술 마다 안 해
- 넉살 좋아 버스 안에서 마이크 잡고 좌중 압도
- 잘나갈 때 미련 없이 던지며 새로운 승부 즐겨
- 12년 만에 4급 보좌관에서 총리로
- “권력욕만 있지 콘텐츠는 없다” 비판
2009년 5월12일 김태호 당시 경남지사가 취재진으로 부터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금품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공세를 받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미리 보고 드리는 것이 도리라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도지사선거에 출마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더 큰 꿈을 위해서 민생을 보듬을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이 대통령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지사는 2004년 6월 보궐선거를 통해 경남도지사 자리에 오른 뒤 재선을 거치며 도정을 비교적 무난하게 이끌어 ‘3선 도지사’ 등극이 유망한 상태였다. 나이도 48세에 불과해 도지사를 한 번 더 한 뒤 진로를 바꿔도 늦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김 지사가 결심을 굳혔음을 알아차리고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나도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나라를 이끌어보겠다는 큰 꿈을 키웠다”며 격려했다고 한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청와대 핵심 인사에게서 이 일화를 들었다고 한다. 이 의원은 “이 대통령이 김 지사를 만난 후 참모들에게 ‘참으로 난 사람이다. 젊은 사람이 대단하다’고 자주 칭찬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가 도지사 재임 시절 4대강 정비사업을 적극 지지한 점도 이 대통령의 호감을 사는 계기가 된 것으로 전한다.
새해, MB와 김태호의 독대
김 지사는 이 대통령과의 독대를 마친 뒤인 1월25일 경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6·2지방선거 불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가 밝힌 이유는 “새로운 인물이 새 뜻을 펼칠 길을 터주기 위해서”였다. 불출마 이후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가에선 두 갈래 해석이 나왔다.
하나는 이 대통령에게 말한 대로 ‘지방 정치인’의 한계를 극복하고 중앙무대로 진출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했다는 관측이다. 같은 맥락에서 입각설이 나왔다. 그러나 청와대 대변인은 언론 브리핑 자리에서 이를 부인했다. 다른 하나는 2008~09년 부산·경남 정치권을 초토화시켰던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돼 출마를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었다. 야당 의원들이 김태호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 때 보자며 벼르는 부분이기도 하다.
먼저 김 후보자와 박연차게이트의 관련성에 대해 알아봤다.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사실상 박연차게이트 수사가 전면 중단됐다. 얼마 뒤인 6월9일 대검 중수부는 김 후보자를 소환했다. 2007년 4월 ‘경남 밀양 영어도시 사업설명회’를 위해 미국 뉴욕에 갔다가 거기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돈 수만 달러를 받았다는 혐의였다. 그때 박 전 회장은 맨해튼 소재 한인 식당 주인에게 돈을 전해달라고 부탁했고 식당 주인은 여종업원에게 돈 전달을 맡겼다는 의혹이다.
이밖에도 김태호-박연차 커넥션과 관련해 여러 이야기도 나왔다. 박 전 회장이 2004년 6월 구입한 경남 진해 소재 동방유량 공장 부지는 고도제한 규제가 풀려 15층짜리 아파트를 지을 수 있게 됐다. 이 과정에 김 후보자가 개입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 후보자와 박 전 회장이 실제로 가까운 사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두 사람은 경남 일대의 골프장에서 여러 차례 라운딩을 했다고 한다. 나아가 박 전 회장이 김 후보자가 적극 참여하고 있는 ‘뉴경남포럼’의 창립회원이었다는 말도 흘러 다녔다. 뉴경남포럼은 경남 출신으로 서울에 와서 성공한 재계·학계·언론계 인사들의 향우회다. 손병두 전 서강대 총장, 박재규 경남대 총장,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등이 핵심 멤버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김 후보자는 박 전 회장 관련 의혹들을 모두 부인했다. 검찰은 수만 달러 수수 의혹과 관련해 참고인으로 조사해야 할 여종업원의 행방을 찾지 못하자 무혐의 처리하고 수사를 종결했다. 나머지 의혹은 의혹을 제기한 쪽에서 사과하거나 정정한 경우도 있지만 말끔히 풀리지 않은 부분도 남았다.
같이 라운드하고 포럼 나갔다?
박연차게이트에 연루돼 도지사 출마를 포기했다는 추측은 꼬리를 물었다. 심지어 친이계 인사를 한나라당 경남지사 후보로 공천하기 위해 청와대가 당시 김 후보자와 ‘딜’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 즈음에 경남지역의 K의원은 김 후보자와 단둘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직접 진위를 물어봤다고 한다. 그러자 김 후보자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진짜 걸려 있으면 오히려 경남지사선거 출마를 강행하지 포기하겠느냐? 출마해서 당선되면 오히려 방어하기에 더 좋은 것 아니냐? 검찰로선 일단락된 사건을 놓고 현직 도지사를 계속 수사하기엔 부담이 생기지만 ‘백수’면 다르니까.”
김 후보자의 한 지인도 “도지사라는 사람이 도내 기업가의 돈을, 그것도 식당 여종업원을 통해 건네받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상당수 친이계 인사는 ‘더 큰 꿈을 위해 도지사를 접었다’는 해석에 더 무게를 둔다. 이 대통령이 그를 총리로 지명하는 과정에서 청와대가 면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았을 리 없다는 거다. 이러한 해석이 사실이라면 김 후보자는 ‘타고난 승부사’ 임에 틀림없다. 기득권을 버리고 가능성이 희박한 곳에 올인해 결과적으로 더 큰 것을 성취하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연상된다.
김 후보자의 이력에 따르면 그는 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기회가 생기면 다음 단계를 겨냥해 몸을 던지는 성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는 아버지의 친구인 이강두 한나라당 의원의 4급 보좌관이었다. 그러다 경남도의원, 경남 거창군수, 경남도지사를 거쳐 총리 후보자에까지 오른다. 10여 년 만에 보좌관에서 총리후보자가 됐다. 도약의 고비마다 그는 승부수를 던진다.
이강두 전 의원은 1998년 그가 보좌관 자리에서 뛰쳐나와 경남도의원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할 때 만류했다고 한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곧장 총선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는 게 낫다는 현실적 조언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의원 출마를 고집했다. 이 전 의원은 “뿌리에서부터 챙기며 배워가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당시 도의원 후보 경쟁자는 이 전 의원의 친척이었다. 김 후보자는 경선을 거쳐 당선됐다.
도의원 자리에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거창군수에 도전해 전국 최연소 기초단체장이 됐다. 그러나 군수마저 거쳐 가는 자리에 불과했다. 2년 후인 2004년 6월 김혁규 지사의 사퇴로 경남도지사 보궐선거가 실시되자 그는 출마를 감행했다. 결국 어려운 여건을 뚫고 당선돼 전국 최연소 광역단체장이 됐다. 이어 2006년 6월 경남지사선거에서 김두관 열린우리당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재선했다.
그간 걸어온 길을 감안하면 김 후보자가 더 큰 꿈을 위해 도지사 3선을 포기한 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한 지인은 “김 후보자는 도지사 재선에 성공한 순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마음을 굳힌 것으로 안다. ‘젊은 나이에 도지사를 두 번 하나 세 번 하나 다를 게 없다. 지방행정은 충분히 익혔으니 일찌감치 큰 꿈을 펼칠 곳으로 나가겠다’는 말을 친한 사람들에게 했다”고 말했다.
“도지사 두 번 하나 세 번 하나”
그는 도지사 재선에 성공한 뒤 서울의 한 오피스텔에 개인 사무실을 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에 들러 정치인, 기자들과 스킨십을 가졌다. 또 7촌인 가수 김태욱(탤런트 채시라의 남편), 연예인 정준호와도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그의 돌파력과 승부사 기질은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닮은 구석이 있다. 그는 YS계와 인연을 맺으며 정치를 처음 익힌다. 그는 경상남도 거창 시골마을에서 김규성(76)씨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스스로 ‘촌놈’ ‘소장수의 아들’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한다. 언뜻 들으면 빈농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소장수’라고 하지만 그의 부친은 소 대여섯 마리를 키우면서 때가 되면 우시장에 내다팔고, 송아지를 사와 다시 키워서 팔아 ‘중농(中農)’은 됐다고 한다. 소장수라고 칭하는 것은 우시장에 갈 때 마을 사람들의 소도 몰고 가 대신 팔아주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거창농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농대 농업교육과를 다녔다. 그것도 당시 시골마을에선 웬만큼 돈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동일계 특차전형 방식으로 서울대 농대에 합격했다. 동일계 특차전형은 실업계고교를 장려하기 위한 정책으로, 농·공·상고 졸업생이 대학의 농대·공대·상대에 진학할 경우 모집정원의 10% 범위(당시) 내에서 그들끼리만 따로 경쟁을 벌여 신입생을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일반전형 합격자와 비교했을 때 예비고사 점수에서 큰 차이가 났지만 농고 졸업생 가운데는 비교적 성적이 우수했기에 진학이 가능했다고 한다.
서울로 유학 온 그는 부친의 고향친구인 김동영 전 의원(1991년 작고)의 집에서 아이들 공부를 도와주는 ‘입주과외’를 했다. 김 전 의원은 YS의 핵심 측근으로 그의 집에는 ‘민주산악회’ 멤버를 비롯한 상도동계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친해지면서 정치에 매력을 느꼈고 YS의 텃밭이던 경남에 지역구를 둔 이강두 의원의 보좌관이 된다. 그 뒤에도 ‘YS식 정치’를 학습한다. 김 후보자가 1995~97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사회정책실장으로 재직할 때 함께 근무했던 전직 당직자의 기억이다.
“그때 이미 김태호 후보자는 정치를 알았다. 그는 대화를 할 때 아주 쉽게,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듣도록 말한다. 현학적인 수사가 전혀 없다. 그런 것은 YS계 정치인들의 특징이다. 시골 사람들에게는 쉽게 하는 말이 제대로 먹힌다. 거창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도 누구에게나 다가가는 친화력과 솔직담백한 말솜씨 때문이었다.”
사실 ‘김태호’ 하면 ‘친화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총리 후보자가 되자 많은 언론이 앞 다퉈 그의 광폭 인맥을 화제로 삼았다. 아무것도 그려놓지 않은 백지처럼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귄다고 해서 ‘백지인맥’‘마당발 인맥’이라 한다. 그는 한 번이라도 만난 사람에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아버님’, 한 살이라도 연장자면 ‘형님’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자주 인사를 하는 아버님만 1000명, 형님은 800명”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런 태도 역시 상하관계를 분명히 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상도동계 사람들과 꼭 닮았다. 상도동계 출신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그에 대해 “개인적으로 내가 잘 아는 동생이다. 매사에 꼬인 데가 없고 소통도 좋다”고 했다.
“돈 구애 않고 화끈하게 술 사준다”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가 8월8일 서울 세종로 자신의 오피스텔에 들어서며 손을 흔들고 있다(왼쪽). 김 후보자의 민생탐방 모습.
“김 후보자는 골프를 아주 좋아한다. 도지사 불출마 선언 후 공백기일 때 골프장에 자주 나갔다고 한다.”
“김 후보자는 판돈을 건 포커 카드게임을 즐겨왔다.”
“아슬아슬한 야한 농담도 잘해”
“김 후보자는 공식적으로는 주량을 소주 반 병 또는 한 병이라고 하는데 실제 술자리에선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주는 술을 거의 마다하지 않는다.”
“김 후보자가 도의원, 군수 할 때 자세히 봤는데, 정말 넉살이 좋다. 버스 대절해서 연수라도 갈 때면 한두 시간 정도 계속 마이크를 잡고 좌중을 압도한다.”
“나이 많은 아주머니에게도 누님, 누님 하면서 ‘애살’을 떠는데, 정말 대단하더라.”
“때로는 아슬아슬한 야한 농담도 정말 자연스럽게 한다.”
경남도청을 출입하는 한 지역신문 기자는 언론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현재의 김두관 지사와 비교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김두관 지사는 꼭 당부할 일이 있어 기자들을 식사 자리에 불러놓고도 머뭇거리는 표정이다. 이런저런 다른 말만 하다가 본론은 제대로 꺼내지도 못하고 자리를 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 김태호 전 지사는 자신이 아쉬워서 기자들과 만나도 ‘형님들, 동생들이 한번 도와주쇼’라고 터놓고 부탁한다.”
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를 통과해 총리로서 내각을 통솔하면서 이명박 정부의 집권 후반기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을까. 또한 세대교체론에 힘입어 박근혜 전 대표와 경쟁하면서 차기 대권주자로 설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이 엇갈린다.
총리는 행정 각 부를 통할하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부처끼리 사사건건 부딪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러자면 국정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그러한 경험이 없다면 오랫동안 사회지도자 위치에 있으면서 쌓은 경륜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각을 장악할 수 있다. 역대 총리 대부분은 그런 요건을 갖췄다. 그러나 김 후보자는 아직 물음표다. 김 후보자에 앞서 40대 총리가 4명이나 된다고 하지만 이들은 모두 건국이나 정변의 혼란기에 총리가 됐다. 1971년 당시 45세였던 김종필 전 총리 이후 무려 39년 만의 40대 총리다.
그가 중앙정치무대에서 활동한 경력은 국회의원을 보좌한 일이 유일하다. 군정과 도정의 경험으로는 온갖 나라 일을 처리하기에 역부족이다. 젊은 패기와 친화력만으론 감당하기 어렵다. 내각에서 노회한 친이계 2인자 이재오 특임장관에게 휘둘릴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나라당 한 중진 의원은 “그가 국무총리 후보가 된 것은 48세로 젊다는 이유, 단 하나밖에 없다. 대표적인 커리어라고 해봐야 경남지사 6년밖에 없지 않으냐”고 평가절하했다. 다른 한나라당 관계자는 “그는 권력욕이 남달라 빨리 출세했지만 깊이 있는 정치철학이나 콘텐츠를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노무현은 승부사 기질 외에 권위주의 타파, 지역주의정치 극복과 같은 철학이 있었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물론 경륜이 일천하다는 이유만으로 지레 ‘실패한 총리’가 될 것으로 단언할 수는 없다. 청와대는 발탁 배경을 설명하면서 “지역·세대·계층 간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내각에 활력과 역동성을 불어넣어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국정운영을 주도할 것으로 확신 한다”고 했다.
“누구 뒤에 줄 서고 싶지 않다”
김 후보자는 총리 지명과 동시에 차기 대선 주자로 부상했다. 친박근혜계에선 신중한 반응이지만 그에 대한 인식은 별로 좋지 않다. 그는 원래 친박계 도지사로 분류된 인물이었다. 박근혜 전 대표가 당 대표로 있던 2004년 경남지사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게 박 전 대표와의 인연이었다. 친박계인 한선교 의원은 “당시 경남지사 보궐선거 때 나도 열심히 뛰었고, 박 전 대표는 더욱 열심히 도왔다. 아주 큰 승리를 거뒀고 그때부터 두 분의 관계는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굉장히 좋았다”고 했다. 김 총리 후보는 2006년 경남도지사 선거 땐 선거공보에 박 전 대표와 함께 찍은 사진을 썼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그는 소극적이나마 박 전 대표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언제부터인가 그는 친이계 핵심인 정두언·진수희·정태근 의원 등이 참여하는 ‘통합과 실용’ 멤버들과 가까워졌다. 이 모임의 세미나에서 강연도 했다. 6·2지방선거에 불출마한 뒤 7·14 전당대회를 앞두고 정두언 의원은 그에게 지도부 경선 출마를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나가봤자 현실적으로 1위 득표로 당 대표가 되기는 어려운 만큼 최고위원을 목표로 하는 경선에는 나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한다. 그는 평소 “나는 누구 뒤에 줄을 서는 것이 아니라 내 뒤에 줄을 세우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친이계의 다른 주자 진영에선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김태호 카드’가 등장하자마자 “예측할 수 없고 검증되지 않았고 신뢰할 수 없는 리더십을 갖고 과연 선진국까지 갈 수 있겠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표출했다.
이 대통령이 띄워주었지만 결국 친이계 내부의 견제로 고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동안 친이계에선 박 전 대표와 맞설 수 있는 친이계 주자를 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정몽준 전 대표와 정운찬 전 총리를 시험대에 올려봤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는 좋지 못했다. 김 후보자가 이 두 사람의 뒤를 이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두 사람에 비해 국민에게 감동을 줄 인생 스토리가 훨씬 취약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특히 그가 나이도 많고 경험도 풍부한 장관들에게 휘둘려 갈팡질팡할 경우 그의 정치적 수명은 훨씬 짧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