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호

“대한민국 살길 찾으려면 박정희 · 김대중 영웅화 그만두라”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 구해우 |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06-23 15: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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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 16, 6 · 29는 죽은 길…‘참회 시간’ 가져야
    • 국가가 혈족 이익 위한 활용·탈취 대상으로 전락
    • 선진화(善進化) · 덕진화(德進化)로 극복 · 승화해야
    “대한민국 살길 찾으려면 박정희 · 김대중 영웅화 그만두라”
    김진현(79)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은 도착적 근대화(perverted modernization)가 전개되면서 악성 변종(malign hybrid) 국가공동화가 한국 사회에 나타났다고 진단했다. 동양 전통의 혈연연대와 서양 근대의 개인주의 · 자유주의가 만나 ‘자유로운 개인의 가족 같은 연대로 이뤄진 합리적 · 다원적 사회공동체’가 구축된 게 아니라 혈연 · 가족왕국, 재벌왕조, 독선적 이념왕국으로 도착되고 변질됐다는 것이다.

    김 이사장은 “지연, 학연, 부와 권력의 혼맥으로 이뤄진 ‘한국 새 귀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및 ‘군자(君子)다움’의 결여가 갈등을 증폭한다”면서 “지식인, 언론인, 문화예술인이 재벌-권력을 잇는 금권정치(plutocracy) 주변을 배회한다”고 지적했다. “인간, 사회공동체, 국가가 한갓 혈족의 이기적 목적을 위한 이용 · 활용 · 착취 · 탈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고도 꼬집었다.

    그는 ‘참회의 시간’ ‘참회의 무대’를 가지면서 도착적 근대화를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강의 기적에만 매몰된 경제 제일주의, 운동권적 시각으로만 사안을 들여다보는 민주화 제일주의, 폭력적 진보의 독선, 재벌중심주의, 혈족이기주의가 계속되면 자율적 · 합리적 사회공동체는커녕 법과 국가도 존재할 여지가 없다”고 개탄하면서 “근대, 현대의 길을 넘어서는 문명사적 격변, 즉 개벽(開闢)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너무 리버럴한 한국

    김 이사장은 동아일보 논설주간, 과학기술처 장관, 세계화추진위원장, 서울시립대 총장, 문화일보 회장을 지낸 원로다.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한국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에 천착해왔다. 5월 20일 ‘신동아’와 한 대담에서 그는 “산업화, 민주화의 기적에만 매달리는 찬양, 안주, 현상 연장의 길은 죽은 길”이라면서 “대한민국이 세계적 한국 모델, 세계 새 평화 질서를 창조해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 일본에 지인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2006년에는 ‘일본 친구들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도 내셨고요. 한일관계를 오랫동안 고민해온 것으로 압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한일관계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래 최악이라고 할 만합니다. 한일관계 악화는 국가미래전략 차원에서도 손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악화된 한일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비대칭적 힘’ 키워야

    “역사라는 게 배반적이라고나 할까요, 일직선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일본 외무성이 발표한 ‘외교청서’에서 일본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나라, 한국은 그렇지 못한 나라라고 했더군요. 일본이야말로 정치 · 이념적으로 보나, 사상적 지형으로 보나 일리버럴(illiberal, 자유를 제한하는)한 나라예요. 비(非)보편주의적 가치와 제도, 문화를 가졌습니다.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오히려 너무 리버럴해서 문제죠. 사회도 일본보다 훨씬 다원적이고요. 북한을 찬양하는 정치인도 있으니까요. 요컨대 한국은 일본보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가 훨씬 더 이뤄진 곳입니다. 일본이 우리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올바로 하지 않는 나라로 몰아가는데도 한국이 방어불능 비슷한 상태에 와 있는 것은 역설적입니다.”

    ▼ 대응은 어떻게….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호소해야 합니다. 일본과 1대 1로는 안 돼요. 일본을 ‘시민사회화’하려면 미국, 유럽연합(EU), 아시아에서 자유주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과 공동전선을 꾸려 대응해야 합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태와 잃어버린 20년 등으로 일본의 자존심이 무너졌습니다. 소니가 삼성전자에 밀렸느니, 미쓰비시가 현대중공업에 졌느니, 한국 K팝이 아시아를 지배하느니 할 때 일본의 프라이드가 얼마나 손상됐는지 우리가 간파하고 성숙하게 대처했어야 합니다.

    아시아 전체가 정상적 시민국가로 가야 한다는 것이 대전제가 돼야 합니다. 일본과 중국이 끝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미국, 유럽 등에 아시아가 보편적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 동참해달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한국 역사에서 자발적으로 중국, 일본과 싸워본 적이 없습니다. 두 나라는 한국뿐 아니라 동남아를 상대로,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한 나라예요. 중국이 중화주의, 패권주의를 지향하고 일본이 그러한 중국에 맞서는 동시에 우경화에 속도를 낸다면 우리 힘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습니다. 일본, 중국의 위협에 맞서 국방력을 강화한다 해도 두 나라 인구나 능력을 볼 때 대적이 되겠습니까. 중국은 미국 본토 공격이 가능한, 완성된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가진 나라입니다. 일본도 내일 곧바로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고요. 일본의 미사일 실력은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1945년 이후 우리는 ‘근대화 혁명’에 성공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140개 가까운 나라 중 근대적 경제성장, 민주화, 교육의 고등화, 과학기술 선진화, 문화예술 다양화, 사회 다원화를 이뤄낸 유일한 국가가 우리예요. 나는 이를 ‘대한민국 근대화 혁명’이라고 합니다.

    우리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뤘으나 중국, 일본이 그 기간 잠을 잔 게 아닙니다. 종래 개념으로서의 국력이니 힘이니 하는 것으로는 중국, 일본에 대응해 평화를 지켜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비대칭적 힘을 키워야 합니다. 스위스, 이스라엘이 가진 게 뭡니까. 훨씬 큰 미국, 독일, 영국이 스위스, 이스라엘을 무시하지 못하는 까닭이 뭡니까. 스위스가 2차대전 때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기를 만드는 데 필수불가결한 정밀기계, 정밀화학 기술 덕분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진 특수무기 기술과 정보력은 또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이 인구 780만 명으로 아랍에서 살아남은 것은 비대칭적인 힘 덕분입니다.

    대한민국은 비대칭적인 힘을 가져야 합니다. 군대를 늘린다, 해 · 공군력을 확충한다, 이런 식이 아니라 중국, 일본이 비수(匕首)로 느낄 만한 비대칭적 연성력(soft power), 군사력, 과학기술을 확보해야 합니다. 기획재정부, 미래창조과학부, 산업통상자원부, 국방부의 전략이 그런 쪽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先進化 대신 善進化

    ▼ 언론인으로 출발해 우리 사회의 주요 영역에서 소중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국가미래전략과 관련해 착할 선(善)자를 쓴 ‘선진화(善進化)’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善進化’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해주시죠.

    “한말의 개화나 박정희의 근대화나 같은 차원이에요. 서양 모델이 있으니 그것을 따라가자는 거란 말입니다. ‘개명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죠? 개명의 뜻이 선진화(先進化)예요. 근대화, 선진화는 서양 근대가 성공했기에 나온 말입니다. 한국이 성공했듯, 중국도 근대화에 성공했고, 동남아도 성공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개명이 일어나고요.

    근대화가 보편적인 것이 되면, 그간 ‘근대화의 세계화’라고 표현해왔지만, 전혀 다른 세상이 옵니다. 근대화, 세계화는 오랫동안 선(善, virtue)이었지만, 미래에는 저주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물 부족, 환경문제, 기후변화, 사막화로 인한 식량 위기가 예가 되겠죠. 경제가 성장하고 자동차가 느는 게 좋은 일이었지만 미래에는 다른 문제가 되는 겁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의 성취는 ‘대한민국 근대화 혁명’입니다. 프랑스 공화주의 혁명, 영국 산업혁명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한민국 근대화 혁명’은 2000년을 기점으로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공 스토리를 찬양하거나 그것에 만족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가령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은 남 일이 아닌 우리 일입니다. 환경, 물, 공기, 기후변화, 식량 문제를 우리 품으로 끌어안아야 합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표적 국가예요. 세계 역사상 에너지 밀도가 높기로 손꼽히는 나라입니다. 21세기 지구촌 생존 문제의 핵심 진앙이 한국에 있다고 여기고 선진화(善進化)에 나서야 합니다. 국가 전략은 물론이고 경제 · 외교 정책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맞춰 수행해야 하고요.”

    “대한민국 살길 찾으려면 박정희 · 김대중 영웅화 그만두라”

    김진현(오른쪽)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은 5월 20일 ‘신동아’ 대담에서 “대한민국은 ‘근대화의 세계화’ 과정에서 인류의 살길을 찾는 나라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착적 근대화

    그는 함석헌, 이문열, 김욱, 이응준의 글을 인용하면서 대한민국이 ‘참회의 시간’ ‘참회의 무대’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함석헌은 1958년 ‘남한이나 북한이나 외래의 꼭두각시일 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사상계’ 1958년 8월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2013년 소설가 이문열은 함석헌과 반대로 ‘나라는 있는데 백성이 없다’면서 ‘교육 현장에는 국민이 아닌 자유시민이 길러지고, 심한 경우 북한 국민이 길러진다’(2013년 4월 1일 ‘동아일보’ 인터뷰)고 말합니다.

    평론가 김욱은 대한민국은 한 나라가 아니라 ‘이종(異種)의 생명체’라면서 ‘어떨 땐 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를 산 게 아닌가, 그리고 지금도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개마고원, 2013)고 한탄했습니다. 소설가 이응준은 망국을 말하면서 ‘통일 앞에 우리 각자가 실증적인 용기를 발휘하지 못할 때 우리 국가 역시 우리 모두를 따라 망해갈 것이다. 조만간 세계사는 채 마무리 짓지 못한 20세기를 이 한반도 안에서마저 실험하려들 것이기 때문이다’(동아일보 3월 28일자)라고 단언합니다.

    이들의 말을 소개한 것은 통계와 지수로는 국가가 기적, 혁명이라고 할 만큼 발전했는데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생존 조건의 어려움에는 본질적 변화가 없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함입니다.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안보 · 외교 조건은 건국 이래 최대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일본의 국수적 민족주의, 중국과 미국의 충돌, 이민자 문제 등에서 드러난 유럽의 퇴행, 근대를 부정하는 이슬람국가(IS)의 등장 같은 사례에서 보듯 세계는 최근 500년 동안 진보라고 생각해온 방향과는 다른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길, 다시 말해 5 · 16(산업화), 6 · 29(민주화)의 길을 걷는 것은 죽는 길입니다. 산업화, 민주화의 기적에 매달리는 현상 연장의 길은 죽은 길이에요.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은 참회의 시간을 거쳐야 합니다. 유병언, 성완종 등에 의해 폭로된 국가해체 현상은 근대화 혁명의 실체를 정리하면서 경과와 후과(後果)를 점검해 살릴 것과 버릴 것을 선택하고 성공과 실패를 여과 · 소화 · 발효 · 승화시키기 위한 참회의 무대를 거치라고 요구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계 근대사에서 독특하고 유일한 ‘대한민국 근대화 혁명’을 지구촌의 새 대안 질서, 세계적 한국 모델(Global Korea Model), 세계 새 평화 질서(Pax Universa)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 이병철 · 정주영으로 미화하고, 민주화는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으로 미화하는 작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같은 영웅화, 개인화는 진영 논리를 고착화해 이성적 토의와 객관적 실증, 진실로의 접근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도착적 근대화의 질주를 반드시 막아내야 합니다. 도착적 근대화 현상은 전통에 충실해 문 닫고 살던 우리가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전면적으로 근대 · 현대로 돌진하면서 생긴 변종 현상입니다. 지구상의 어떤 선 · 후진국보다 초근대 현상을 압축적으로 담은 곳이 한국이거든요.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살길 찾기는 미래 인류가 살아갈 삶의 지향을 여는 길이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근대화 혁명의 성취와 도착적 근대화의 진행을 생명 · 생존 · 평화 · 보편윤리 기준으로 정리 · 극복하고 발효 · 승화시키면 그것이 바로 사는 길, 덕진화(德進化) · 선진화(善進化)의 길입니다.”

    ▼ 이명박 정부 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현대사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것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전쟁할 수 있다는 각오가 국력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고통의 산물입니다. 역사 교과서를 두고 이념 논쟁이 벌어졌듯 이승만, 박정희, 친일 문제 등으로 전시물 하나하나마다 싸움의 고통을 넘었습니다. 여러분은 전시된 것만 보지만 그 안엔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반동적 성공’을 잘하는 나라예요. 독재했다가 민주화하는가 하면, 찢어지게 가난했다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문을 열지 않는 나라였는데, 증권시장을 보세요. 영국, 프랑스보다 우리가 외자 비율이 더 높습니다. 한국 경제가 외풍에 요동치는 것도 그래서인데 좋다, 나쁘다를 떠나 특이한 현상입니다. 익스트림 리액셔니즘(extreme reactionism)이라고나 할까요. 극단의 대극주의, 반동주의 성향을 가졌습니다.

    근대화 혁명을 통해 힘을 어느 정도 축적했지만, 힘을 가진 것과 힘을 쓰는 것은 다른 차원이에요. 힘을 쓰려면 결심,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힘을 작동할 메커니즘도 갖춰야 하고요. 남북관계, 대중(對中) 외교, 대일(對日)관계 등 이슈마다 여야 간, 이념 간, 언론 간, 지성인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일례로 북한 애들이 한국 갖고 노는 거 보세요.

    대한민국을 건드리면 힘을 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힘이 의미가 있어요. 한국의 이익을 북한이, 중국이, 일본이 해칠 때 전쟁할 각오가 있는 사람이 여기 있어요? 대통령, 참모총장이 그런 용기 가졌을까요. 전쟁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전쟁은 막아야죠.

    그렇더라도, 우리 이익을 해치면 전쟁도 할 수 있다는 각오가 확실해야 합니다. 그게 국력이에요. 무기가 몇 개이고 병력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결의가 중요한 겁니다. 베트남과 비교해보세요. 베트남보다도 덜 무서워하는 게 우리나라예요.”

    ▼ 성취의 역사를 이뤄냈으나 전쟁할 각오조차 다지지 못하는 나라라는 말씀이군요. 좌우 갈등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입니다. 최근에는 5 · 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어떻게 부를지를 두고 다툼이 일었습니다. 진보좌파와 보수우파의 갈등,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반목, 영 · 호남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면 향후 우리가 풀어야 할 통일 문제와 미래 발전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보수우파, 진보좌파 간 소모적 갈등을 극복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어려운 문제예요. 제도적인 얘기를 꺼내면 답하기는 쉽죠. 학자들이 제도 얘기하는 것은 눈속임이에요. 대통령제 대신 내각책임제로 가야 한다든지, 지방 분권을 강화해야 한다든지, 이렇게 답하는 것은 내가 볼 때는 눈속임입니다. 정말로 개혁하려면 제도적으로 접근할 것인지, 사람을 바꾸는 방식으로 갈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김영란법이나 공무원연금 개혁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을 보세요. 그게 정치요? 그게 국회요? 한국은 근본적 제도 개혁, 국가 개조를 자생적으로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타율적으로 이뤄진 게 대부분입니다. 일례로 관리제도, 경영체제 등은 6 · 25전쟁의 산물입니다. 툭하면 브리핑하잖아요. 그게 미국 군대 산물이거든요. K팝의 뿌리는 미8군 부대고요. 한국에서 진정한 개혁은 타율적으로 이뤄졌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팔을 비틀어 재벌 열 몇 개가 없어진 적도 있고요.

    우리가 자생적으로 진정한 개혁을 이뤄내겠느냐는 질문에는 물음표를 붙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혁명이나 외부 압력으로 개혁할 것인가. 불행하게도 이제는 외부 압력이 없습니다. 박정희 독재가 심할 때 미국이 브레이크를 걸었는데, 그런 일은 더는 없습니다. 김대중 씨를 살려준 것도 미국 아닙니까. 우리 스스로 해야 합니다. 세월호 사건 때 좌파, 우파, 진보, 보수를 떠나 전 국민이 분노, 절망, 한탄했습니다. 이 같은 국민의 마음을 어떻게 비(非)혁명적 형태의 개혁 동력으로 승화시키느냐가 중요합니다.

    상법상 주식회사는 물론이고 공법인격인 각종 재단, 학교, 교회, 법조마저 사유화, 대물림되는 도착적 근대화 상황에서 소수지만 초과이익공유제를 주장한다든지, 자식에게 상속 안 하고 종업원지주회사로 형태를 바꾼다든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애국적 진보주의’라고 해서 극단주의 좌파와 손을 떼고 뭐 좀 해보겠다는 사람들도 있고요.

    비혁명적 방법으로 자생적 개혁을 이뤄내려면 이런 소수가 핵심적 다수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극소수가 의미 있는 소수로 우선 성장해야 하고요. 대통령제 아래서는 대통령이 소수를 밀어주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대한민국 살길 찾으려면 박정희 · 김대중 영웅화 그만두라”

    김진현 이사장은 “그게 정치요? 그게 국회요?”라며 한국 정치 현실을 개탄했다.

    일상의 독재

    ▼ 민주화 이후 세대가 국가 미래와 관련해 잘 해내리라고 보는 쪽입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젊은 세대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절대억압과 절대빈곤을 모르고 자랐다는 겁니다. 1958년 동아일보에 견습기자로 들어갔는데, 매년 겨울이면 쓰던 기사가 뭔 줄 알아요? ‘서울에 동사(凍死) ○명’ 식으로 얼어 죽은 사람 통계 내는 겁니다. 쓰레기통 뒤지다 복어알 잘못 먹어 죽은 사람 기사도 자주 썼고요.

    절대억압이라는 게, 박정희만 독재한 게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독재가 가득했어요. 회사 선배가 ‘야, 담배 사와’ 식으로 얘기하던 때죠. 식민지 독재는 박정희보다 수백 배 심했죠. 남의 집 멀쩡한 처녀를 강제로 끌어다 위안부로 보냈습니다. 젊은 세대가 독재라는 개념을 너무나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국가 건설 과정을 똑바로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1980년대 극단적 반동

    ▼ 2010년 한미비전협회 이사장을 맡으셨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산업화, 민주화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근대화 혁명’ 성취 과정에서 미국이 가진 의미와 역할은 무엇이었고, 향후 우리나라의 미래와 통일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과 의미는 어떠할까요.

    “젊은 세대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연결돼 있습니다.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 등 제3세계 국가의 근대 민족주의와 독립투쟁의 대상은 얼굴 하얀 기독교 패들입니다. 베이징조약, 톈진조약으로 중국에 모멸감을 준 것도 ‘흰둥이’ 크리스천들이고요. 한국만 달라요. 반(反)식민지 운동 과정의 저항 대상은 일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친(親)서방적입니다. 개화기 때 고종의 태도를 보세요. 미국을 우리를 도와줄 국가로 여기지 않습니까.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제3 세계 독립운동 지도자 중 크리스천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간디가 그랬습니까, 호치민이 그랬습니까. 우리는 달라요.

    이승만, 김구, 안재홍, 안창호가 크리스천입니다. 김일성은 아버지부터 다 크리스천이고요. 흰둥이 선교사가 한반도에 학교를 지어줬습니다. 불교 이슬람교 등 클래식한 종교를 가진 나라 가운데 나중에 크리스천 인구가 10% 넘은 곳이 없습니다. 지구상에 한국이 유일해요.

    미국 개신교는 한국에 압도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친미, 반미로 나뉘어 다툴 게 아니라 근대 민족주의 운동 안에 미국이 스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은 일본과 다르게 미국식 크리스천 리버럴리즘 풍토가 있습니다. 6 · 25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원조로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대학의 근대화, 심지어 언론 근대화도 미국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동아일보고 조선일보고 편집국장이든 누구든 중요한 사람 가운데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미국을 둘러보면서 언론의 자유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느낀 것이죠. 군인은 더하죠. 포병학교 ○○○명, 군관학교 ○○○명. 이런 식으로 미국에 갔으니까요.”

    ▼ 1980년대는 지금껏 말씀한 것에 대한 극단적 반동이 일어난 시기겠군요.

    “산업화 기적을 놓고 박정희를 영웅화하고, 민주화를 두고 김대중을 영웅화하는 게 문제입니다. ‘기적 찬양론자’들이 양 극단에서 다투고 있습니다. 우리와 미국은 가치동맹 수준에 와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불거질 때 우리가 기댈 언덕도 미국밖에 없잖아요. 중국, 독일, 러시아에는 없는 위안부 기림비가 미국에는 있습니다.

    독재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할 때 나서준 것도 미국 시민단체와 리버럴한 국회의원들입니다. 분단에 미국 책임이 있다? 예스, 사실이지. 그런데 소련하고 똑같이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왜 미국한테만 책임을 묻고 소련한테는 안 묻습니까. 야박한 얘기지만 분단은 우리가 힘이 없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

    미국 엘리트와 현실주의자들은 대서양 중심으로 사고했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한국이 일본 식민지가 되는 것을 용인하고 딘 애치슨이 한국을 극동방위선 밖에 둔 것도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대서양주의자가 보기에 한국은 핵심 이익에서는 비켜난 곳이죠. 그 사람들에게 일본이 중요한 이유는 유럽 세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중국을 제어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일본이 비참하게 항복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중국이 일본과 더 격렬하게 싸워 폭삭 망하길 바랐죠. 그래야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이익이 확보되거든요. 미국 엘리트의 기본적 사고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인터내셔널 리버럴리즘, 휴머니즘 같은 것이 강조되면서입니다. 가치동맹이 아닌 지정학적 차원에서만 보면 미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희생할 까닭이 없습니다.”

    ‘어떻게’ 못 다루는 한국 언론

    ▼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난 3월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차관이 한 동아시아 지도자들의 민족감정 이용과 관련한 발언으로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차원의 논란과 비난이 일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 보수 언론들까지 셔먼 비난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발언 전문을 읽어보면 셔먼의 의도는 동북아 정세에 대한 ‘짜증(frustrating)’을 표현한 겁니다. 부상하는 슈퍼 파워 중국을 상대로 한 · 미 · 일이 협력해야 하는데, 한일 갈등은 지속되고 한국과 중국은 과도하게 가까워지면서 문제가 꼬였다는 거죠.

    그런데 언론은 이에 대해 냉철하게 분석하기보다는 정치권과 마찬가지로 ‘민족감정 팔기’ 마케팅에 동참하는 양상이었습니다. 그 결과 한일관계는 더 악화되고, 한미관계도 더 소원해진 것으로 평가됩니다. 현재 격변하는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언론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고통의 산물이라고 했지요. 언제까지 그런 고통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까. 나라가 잘되려면 역할 분담이 잘돼야 합니다. 정부는 정부로서 역할, 국회는 국회로서 역할, 언론은 언론으로서 역할을 잘해야 합니다.

    언론이 일본 신문이나 북한 신문처럼 정부 나팔수가 돼서는 결코 안 되지만, 우리나라 언론은 공동 이익을 다루는 방식에 서투릅니다. 보수 · 진보 이런 것은 신념입니다. 언론도 진보 · 보수 신념을 가질 수 있으되 공동체 이익을 확대하는 것과 관련해 미디어의 역할이 무엇인지 깊은 성찰과 사색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정부가 이렇게 하니까 반동적으로 비판한다든지, 외교부 장관이 못마땅하니까 이렇게저렇게 하는 것은 보기에 안 좋습니다.

    친미연중(親美聯中)을 종합적으로 유연하게 타이밍에 맞춰 해야 한다는 말은 초등학생도 아는 겁니다. 언론이 글을 그런 식으로 써서는 안 돼요. 친미연중을 ‘어떻게’ 할지에 초점을 맞춰야죠.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잘 못한다면, 우리가 외무장관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다뤄야 합니다. 기획재정부는 어떻게 친미연중을 해야 하고, 문화관광부는 어떻게 친미연중을 할 것이며, 에너지 확보와 관련해서는 어떻게 친미연중을 할지 언론이 고찰해야 합니다. 안미경중(安美經中 ·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도 마찬가지고요. ‘어떻게’가 빠져 있으면 안 됩니다.”

    ▼ 5월 18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방한했습니다. 인도는 21세기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서 중국과 더불어 대단히 중요한 국가입니다. 모디 총리가 집권했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등장 배경, 개인 특성, 정책 전망 등 깊이 있고 유익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모디 총리의 이번 방한 기간 중 한국 언론에서 깊이 있고 유익한 기사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국 언론이 이 같은 문제를 극복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까.

    수박 겉핥기 끝내야

    “구로다 가쓰히로라고, 일본 언론 서울 특파원을 오래한 사람이 있습니다. 30년 가까이 서울에 있었을 겁니다. 정보원 비슷하기도 한데, 김종필 같은 정치인들과도 친해요. 한국 언론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인도 대학이 영국 시스템이어서 박사학위 받기가 그렇게 어렵답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자리를 못 잡습니다. 대부분이 한국외대 출신인데, 모교인 외대에도 자리 잡기가 어려워 시간강사를 합니다. 대학, 경영단체, 언론 등에서 당장의 수박 겉핥기만 하느라 이런 사람들을 활용할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진득하게 전문가를 키워내지 못하는 것도 한국 사회가 가진 문제점 중 하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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