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신고립주의의 원인? 증상!
‘혼란이었지만 큰 방향은 옳았다’
中 경쟁자로 규정한 전략 보고서
가공할 만한 규모의 對러시아 제재
마음에 든 동맹국엔 통 큰 선물
동맹 손절 명분 먼저 제공 말아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1월 2일(현지 시간) 텍사스주 휴스턴의 트렌드세터 엔지니어링 앞에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AP 뉴시스]
트럼프 1기의 외교정책은 미국의 여러 동맹관계를 위태롭게 했다. 특히 유럽 동맹들과의 ‘대서양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갔다는 지적을 받는다. 트럼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들의 방위비 인상 요구를 넘어 나토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했다. 미국은 1950년대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 이래로 줄곧 나토 동맹국들의 방위비 분담 확대를 요청해 왔지만, 트럼프만큼 거칠고 강하게 요구한 적은 없다. 트럼프는 이와 동시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호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나토가 “뇌사 상태에 빠졌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대서양 안보의 핵심 축인 미국 대통령이 불통의 모습을 보이자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가 자유 진영의 새 지도자로 부상했다. 2019년 나토 정상회담에서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를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 지도자들이 트럼프를 뒷담화하는 장면은 세계 미디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냉전 이래 미국의 지도자들은 동맹이 ‘공화국을 지키는 방패’라고 믿어왔다.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고립을 자처하던 미국은 양차 대전을 거치며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 지난 80년간 미국의 엘리트들에게 굳건한 동맹 네트워크는 세계 안보를 지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여겨졌다. 트럼프는 이 전제 자체를 부정한 첫 미국 대통령이었다.
한국 또한 트럼프의 돌출 행동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트럼프는 후보 시절부터 한국과 일본을 묶어 대표적인 안보 무임 승차자로 지목했다. 2017년에는 북한과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레토릭으로 긴장을 끌어올리더니, 이듬해에는 김정은과의 ‘브로맨스’를 과시하며 한미 양국의 대북 강경파와 온건파 모두를 당혹시켰다.
2019년 6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와 만나 인사한 뒤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으로 갔다가 다시 김 위원장과 함께 남측으로 넘어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런 그의 귀환 가능성은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북한의 핵 위협이 여전한 상황에서는 트럼프의 한반도 정책이 우려된다. 한국 정부는 최근 미국의 핵 확장 억제 공약을 강화하는 데 ‘올인’했다. 4월 발표된 워싱턴 선언 또한 한미 핵 협의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트럼프가 백악관에 복귀하면 이러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리라는 우려가 있다.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이 2024년 11월 미국 대선 전이 핵 확장억제 작전계획화의 ‘골든타임’이라고 주장한 이유다.
일각에는 핵 확장억제 강화만으로는 대북 억제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북한이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하는 한, 아무리 미국이 핵우산을 강화해도 한국의 독자 핵무장 없이 북한의 핵 공격을 억제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그 위험은 배가될 수 있다.
트럼프 외교의 실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1월 6일(현지 시간) 뉴욕 맨해튼지방법원에서 증언을 한 뒤 법정을 나서며 입에 지퍼를 채우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이날 재판장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사기꾼이라 한다”고 언성을 높이다 경고를 받았다. [AP 뉴시스]
동맹국들의 거센 질타를 받은 시리아 철수, 탈레반과의 협정 또한 많은 공화·민주당 의원들과 유권자의 희망을 반영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2021년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2020년 2월 트럼프 행정부가 탈레반과 맺은 도하 협정에 기반했다. 중동의 ‘끝없는 전쟁’에 지친 유권자들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즉 트럼프는 미국 신고립주의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증상에 가깝다.
트럼프의 외교 전략이 장점 없는 재앙만은 아니었다. 미국 조야에서도 트럼프가 좋은 외교적 ‘직감’을 가졌다고 인정하는 분위기다. 미 보수 진영 측은 트럼프의 외교정책은 “혼란스러웠지만 큰 방향에서는 대체로 옳았다”는 평가를 내린다.
우선 극적인 대중국 프레임 전환을 가져왔다. 탈냉전기 미국 지도자들은 관여와 대화를 통해 중국을 책임감 있는 이해당사자로 전환시키겠다는 포부를 유지했다. 오바마 행정부까지도 미국은 중국을 파트너로 여겼다. 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하며 인공섬을 건설하고 뱃길을 장악할 때, 오바마 정부는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에 비해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보고서에서 중국을 경쟁자로 규정하며 군사, 경제, 체제 경쟁 시대에 들어섰음을 선언했다. 중국의 야심을 일찍이 경계한 아시아의 미 동맹들에는 다행이었다. 익명의 일본 관료 Y.A.가 2020년 4월 미국 시사지 ‘The American Interest’에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정책이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거의 모든 면에서 전임자 오바마의 대중 정책보다 낫다”고 평가한 이유다.
유럽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촉구했다. 나토 회원국에 방위비 인상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러시아의 2014년 크림반도 침공 이래 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대해 안일한 태도를 취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나토 회원국 중 7개국만이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을 국방비에 지출했다. 유럽의 자발적 무장을 강조한 트럼프가 틀리지 않았던 셈이다.
트럼프는 나토 국가들의 대(對)러시아 에너지 의존 축소도 촉구했다. 유럽 동맹들과의 마찰을 감수하며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천연가스 수송 파이프인 노르트스트림2를 제재하기도 했다. 트럼프 본인은 푸틴의 스트롱맨 기질에 매력을 느꼈지만, 그의 행정부는 의회와 발맞춰 가공할 만한 규모의 대러 제재를 부과했다. 미국의 대러시아 ‘레토릭’은 트럼프가 헤드라인을 장식했지만, 대러시아 ‘정책’은 공화당의 반러 강경파가 주도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국제 다자기구들의 취약점도 부각했다. 그는 국제무역기구(WTO)가 일부 회원들의 덤핑과 국가보조금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으며, 유엔인권위원회(UNHRC)는 독재 국가들의 면피용 기구가 됐다고 주장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국제보건기구(WHO)가 중국의 영향력에 휘둘리고 있다며 직설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모두 부정하기 어려운, 그러나 기성 정치인이라면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웠을 지적이다.
물론 트럼프 본인이 일부 기구의 의미를 퇴색시키기도 했다. 유네스코와 파리 기후협약을 탈퇴한 결정은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훼손시킨 악수로 꼽힌다. 그러나 트럼프는 ‘머릿수가 능사가 아니’라는 국제협력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왔다. 이익과 가치가 일치하는 소수 국가들의 연합, 즉 소자주의 협력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동맹이라는 개념 자체를 반사적으로 거부하는 트럼프가 일본, 호주, 인도와의 쿼드(Quad·미국, 호주, 인도, 일본 4개국 안보협의체)만큼은 공을 들인 이유다.
이와 같은 트럼프의 정책은 대부분의 공화당 외교안보 전략가들이 그대로 이어받았다.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아닌 다른 공화당 후보가 집권하더라도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정책 기조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위의 정책을 일부 계승한 만큼, 더욱 주목해야 할 흐름이다.
‘Sequencing’ vs ‘Asia-First’
민주당과 공화당 공히 자국 우선주의를 고수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안보 위기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 국방부는 이미 2010년 ‘두 개 전쟁 독트린(Two War Doctrine)’을 폐기했다. 두 개의 대규모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능력이 없음을 시인한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유럽의 안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도-태평양에서는 중국과 북한의 도전이 예상된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재점화했으며 이란과 이스라엘, 걸프국들의 충돌 또한 우려되는 상황이다.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가랑이가 찢어지고 있다(overstretched)”는 정황이 보인다. 가장 큰 피해자는 미국의 동맹과 파트너들이다. 올해 초 대만에 공급될 예정이던 스팅어 지대공 미사일은 우크라이나로 향했다. 10월에는 우크라이나가 요청한 155㎜ 포탄이 이스라엘로 갔다. 우크라이나의 전황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하이마스, 패트리엇, 하푼, 스팅어 미사일은 모두 대만이 긴급히 필요로 하는 무기들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전임 트럼프, 오바마 행정부와 같이 아시아를 지정학적 최우선 지역으로 뒀다. 하지만 10월 20일 백악관이 미 의회에 요청한 1000억 달러 규모의 긴급 국가안보 자금 패키지에서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에 할당된 액수는 2%에 불과하다. 미국이 인도-태평양, 유럽, 중동 안보 위기에 고전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의 매슈 크로닉 연구원은 미국이 “유럽과 중동, 아시아의 안보 이익에 부합할 만한 병력과 탄약, 방산업 기반을 보유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에서는 두 갈래로 의견이 나뉜다. 민주당 주류는 ‘순차적(Sequencing)’ 전략을 추구한다. 임박한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면서 다른 곳에서 대결을 지연시켜 시간을 벌자고 한다. 다소 부실해도 급한 불부터 끄면서 아시아, 유럽, 중동 모두를 미국이 직접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거시적 관점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등을 맞대어 국제질서를 위협하는 상황을 경계한다. 이른바 ‘유라시아 악몽’이다. 중국·러시아와의 경쟁은 결국 장기전이 될 것이며, 한 전선을 포기하면 다른 전선도 결국 잃게 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트럼프를 포함한 주요 공화당 대권주자들(2위 론 디샌티스, 3위 비벡 라와스와미)은 ‘아시아 우선(Asia-First)’을 촉구한다. 이들은 유럽 방위를 거의 전적으로 유럽에 맡기고 미국은 인도-태평양에 ‘올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을 미국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규정하며, 안보 무임승차하는 동맹국에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대만만큼이나 중요하다며 계속적인 지원을 촉구하는 공화당 주자들도 있다. 니키 헤일리 전 유엔대사,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가 그 예다. 전통적인 국제주의적 공화당이라면 충분히 고수할 만한 입장이다. 그러나 이들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24년 바이든이 연임하든, 트럼프가 재선하든, 제3의 인물이 당선되든, 미국은 한동안 이 딜레마를 겪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분명하다. 미국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서도, 그렇다고 미국이 한미동맹을 경시할 빌미를 줘서도 안 된다.
중국과 밀착? 자기 충족적 예언!
트럼프는 미국과의 동맹 강화에 공들인 일본에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역사적 선물을 줬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아랍 국가들과 관계 정상화를 일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인도양에서 인도의 역할을 부각해 ‘쿼드’의 일원으로 참가시켰다. 2019년에는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강화한 브라질에 당시 기준 한국을 포함 16개국만이 포함된 ‘비(非)나토 주요 동맹국(Major Non NATO Ally)’ 지위를 수여했다.트럼프에 대한 호불호와 그의 외교정책의 성패를 떠나, 이러한 결정은 그가 동맹국들을 모두 불신하고 혐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줬다. 오히려 그는 마음에 든 동맹국들에 통 큰 선물을 줄 의향을 내비쳤다.
국내 일각에서는 트럼프의 재림을 대비해 중국과 밀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한국이 중국과 불필요한 마찰을 빚을 이유가 없다. 국내의 정치적 이득을 고려해 중국과 의도적으로 충돌하면 위험하다. 주요 서방국들이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 대신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제거)을 채택해 대중 견제 속도조절을 하는 만큼, 한국도 지나치게 앞서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급격한 친중 정책은 ‘트럼프가 우리를 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를 실현시키는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한국이 ‘손절될 리 없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나라’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격동하는 지정학의 시대에 지양해야 할 ‘한반도 천동설’이다. 친미나 친중이 아니라, 일관된 가치와 원칙을 바탕으로 움직여야 한다. 트럼프 2기에 불안해하는 국가는 한국뿐만이 아니다. 일본, 호주 등은 한국처럼 중국의 위협과 미국의 잠재적 태도 변화를 동시에 마주하고 있다. 이들과 조율하며 ‘트럼프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다.
또 미국 외교 엘리트들과 연합해 미국이 아시아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한미동맹에 대한 의지를 지키도록 유도해야 한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했다. 그가 1977년 집권했을 때, 박정희 정권은 이미 폐기한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을 부활하는 도박을 하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을 손절할 명분을 제공하는 대신 워싱턴 외교 엘리트들이 카터를 막아내길 기다렸다. 동아시아 방위 태세에서 한국의 적극적 역할을 어필했다. 당시와 상황은 다르지만, 워싱턴 외교 엘리트들의 ‘제 역할을 다하는 동맹’에 대한 수호 의지는 유효하다.
때로는 전략적 이슈 관리도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한미 방위분담금 문제는 미디어의 과도한 주목을 받았다. 마치 한미동맹의 핵심 이슈가 된 듯한 착각을 유발했다. 동맹 사이에도 이견과 갈등이 존재할 수 있다. 다만 한미 사이에서 결속력보다 차이점이 부각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
섣부른 비관보다 냉철한 분석을
자유무역 체제는 80여 년간 한국 경제를 지탱했다. 어느 시점부터 워싱턴에서 ‘자유무역’은 금기어가 됐다. 보수 진영은 미국이 국내 산업 보호를 포기하면서 세계시장의 ‘호구’가 돼간다고 주장한다. 진보 진영은 해외의 값싼 노동력에 국내 노동자들이 손해를 본다고 우려한다. 미국이 여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거부하고,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시장 접근을 제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처지에선 바람직하지 않다. 피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도 한국의 이익을 관철할 외교력이 필요하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기여를 통한 레버리지가 필요함을 의미한다.트럼프 2기의 불확실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트럼프가 귀환해도, 이것이 곧 희망 없는 재앙이나 세계 종말은 아니다. 미국 대선이 채 1년도 남지 않은 지금, 입체적이고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