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 한 장도 가치 없어”
- “사실 확인 빼먹고 열만 받아서 쓴 듯”
- “공직기강비서관에 보고된 정보 별로 없다”
- “조응천·박관천은 서로 칭찬하고 과신하는 사이”
- “그래도 야당 집권하면 청문회 열릴 것”
문건 작성 및 보고 라인인 조응천 당시 공직기강비서관은 지난 4·13총선에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됐다. “조응천이 ‘큰 거 한 방’을 가지고 있어 더민주당 대주주인 문재인이 삼고초려해 그를 영입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실제로 조 의원은 “제가 많이 알고 있는데 굳이 누군가가 제 앞에서 거짓말할 수 있을까”라며 뭔가를 갖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이런 점에서 ‘정윤회 문건’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문건을 작성한 박관천 경정은 4월 29일 2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이날 이 사건과 관련해 한 사람이 더 석방됐다. 한모(46) 경위다. 서울경찰청 정보1분실 소속이던 그는 정윤회 문건이 보도된 지 보름여 만인 2014년 12월 9일 최모 경위와 함께 검찰에 체포됐다. 이들은 박 경정이 서울경찰청 정보분실에 옮겨놓은 정윤회 문건 등을 복사해 유출한 혐의를 받았다. 검찰은 다음 날 이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는데 법원에서 기각됐다. 사흘 뒤 최 경위는 자살했다. 이후 한 경위는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이어 2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난 것이다.
“더 충격적인 얘기도 들었지만…”
정윤회 문건 사건의 핵심 관계자인 한 경위와 최근 어떤 자리에 우연히 동석했다. 그는 옆에 앉은 기자에게 이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의 말은 국가적 이슈인 정윤회 문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얼마 후 대화를 기사화해도 좋다는 그의 동의를 전달받았다. 다음은 그날 한 경위와 주고받은 문답이다.▼ 정윤회 문건의 내용은 몇 %가 진실인가요.
“편하게 말씀드릴게요. 그 문건이 사실을 담고 있다면 (언론 보도가 나오기 전에) 제가 그 문건을 사용했을 겁니다. 실적 세워 승진하기 위해서든, 어떤 목적에서든. 그러나 저는 단 한 장도 쓴 적이 없어요. 다 소용없는 것들뿐이었어요. 가치가 없다….”
▼ 문건 내용이 그렇게 형편없었습니까.
“네, 진짜 가치가 없는 거예요. 제가 갖고 있던 자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돌아가신 최 경위가 달라기에 별 뜻 없이 준 거죠. 기업 대관(對官)업무 하는 사람들도 다 알 걸요.”
▼ 문건 내용 가운데 중식당에서 정윤회 씨가 청와대의 십상시와 만났다는….
“저는 정보 파트에서 일할 때 정윤회 씨와 관련해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도 들었어요. 정말 많은 소문이 있었어요. 그러나 보고서로 만들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냥 시중에 돌아다니는 이야기일 뿐이니까. 하나도 확인이 안 되니까.”
한 경위는 수사기관에서 정보 보고서를 오랫동안 다뤄본 사람으로서 정윤회 문건이 사실관계를 확인한 것이 아니라 신원 미상의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언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단번에 알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우린 확실하지 않으면 안 쓴다. 그게 정보 요원의 특성이다. 이런 점에서 정윤회 문건처럼 아무것도 없으면서 문서화된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정윤회 파봐, 이랬겠어요?”
“그런 셈이죠.”
▼ 상당수 언론이나 일반인은 ‘다른 곳도 아닌 청와대의 민정수석실에서 만든 보고서인 만큼 풍문을 짜깁기한 것일 수 없다. 굉장히 신빙성이 높다’고 확신합니다.
“기자님은 기사를 쓸 때 취재원이 무슨 말을 하든 그 말을 다 기사화 하나요.
▼ 아뇨.
“기사를 쓰기 전에 그 말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어느 정도 확인 과정을 거치죠? 사정기관에서 보고서를 쓰기 전엔 더 철저하게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 문서엔 그 과정이 빠져 있어요.”
▼ 대통령비서실장에게까지 보고됐다는데 그렇게 허술하게 만듭니까.
“비서실장이 ‘야, 정윤회 한번 파 봐’ 이렇게 시켰겠어요? 정윤회 문건에 서술된 정윤회 씨의 행위들이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형사처분 받을 일입니까? 위법적 행위를 한 건가요?”
▼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은 공직비리를 다루는데, 정윤회 씨는 민간인이죠,
“(문건을 작성한 쪽이) 열만 받아서 쓴 것으로 보여요. (형사처분과 무관한) 그런 사안이니 마음대로 얼마든지 쓴 거죠. 박관천 경정이 박동렬 전 대전지방국세청장 같은 정보원을 만나 조그만 이야기를 듣긴 했을 거예요. 그 이야기 중엔 박동렬 씨가 자가발전한 이야기도 있을 수 있고요. 박 경정이 그런 걸 사실 확인 없이 썼다면 그건 잘못이죠. 자기가 확인하고 써야죠. (박 경정은) 지금도 문건의 신빙성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안 하잖아요. 문건 내용이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게 아니죠.”
“박관천 능력 과신”
정윤회 문건 내용의 진위 문제는 정윤회 문건 사건의 핵심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문건 내용이 허위라고 밝혔다. 그러나 많은 이가 박 대통령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이런 가운데 박관천·조응천 외에 이 문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 사건 핵심 관계자인 한 경위가 문건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한 경위의 발언이 주목되는 이유다. 한 경위는 청와대의 회유를 거절한 직후 검찰에 체포돼 옥살이를 한 터라 청와대와 대립관계에 있는 인물이다. 한 경위와 대화를 더 이어갔다.
▼ 그렇다면 정윤회 문건에 기록 안 된 더 속 깊은 사실은 없다고 봅니까.
“그렇다고 봐야죠.”
▼ 당시 박 경정이 작성한 그 보고서를 ‘데스킹’한 사람이 조응천 당시 비서관인데요. 조 비서관이 사실관계가 확인되지도 않은 그런 걸 걸러내지 못하고 상관에게 보고했다고 보는 건가요.
“박관천 씨가 그만한 능력을 가졌다고 과신한 거죠. 가령 경찰서 출입기자가 정보를 취재해왔다고 쳐요. 시경 캡(취재팀장) 기자가 ‘이 기자는 원래 일 잘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쉽게 믿어주죠. (조 비서관은) 박관천 씨가 가져오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은 거겠죠. 자기와 동향 출신인 데다…. 그러나 조 비서관은 검사 출신이니 그때 디테일하게 물어보고 확인했어야죠.”
▼ 팩트 체킹(fact-checking, 사실 확인)이 부족했다?
“솔직히 그 사람들을 재판정에서 봤는데, 박관천 씨는 조응천 씨에 대해 ‘애국자이시고 일밖에 모르시는 분이시고…’라는 식으로 말해요. 그러면 이 양반(조응천)은 ‘박 행정관은 잘못된 것을 끝까지 파헤치고…’라고 하고. 둘이 서로 칭찬해요. 서로 믿는 구석이 있고, 서로 의지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정윤회 문건도 믿었겠죠. (조 의원이) 이번에도 헛다리 짚었잖아요. 그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죠.”
‘이번에도 헛다리 짚었다’는 말은 조 의원이 6월 30일 대법원 업무보고 때 대법원 양형위원을 겸한 MBC 간부에 대해 성추행 전력이 있다고 허위 폭로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정윤회 문건도, MBC 간부에 대한 허위 폭로도 모두 헛다리 짚었다”는 것이다. 한 경위는 박 대통령과 청와대를 향한 조 의원의 추가 폭로 가능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확인된 게 없을 것”이라며 평가절하했다.
▼ 조응천 의원은 공직기강비서관 시절에 취득한 정보를 터뜨릴 수 있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합니다.
“신빙성이 없죠. 그가 갖고 있는 고급 정보가 아마 없을 거예요. 당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에겐 우리(경찰) 쪽 보고, 검찰 쪽 보고, 국정원 쪽 보고가 들어갔어요. 국정원 쪽 보고는 그다지 없었을 거예요. 국정원은 주로 (공직기강비서관이 아닌) 별도 라인으로 보고하는 걸로 들었어요. 우리 쪽과 검찰 쪽 보고의 경우도 조응천 씨는 많이 못 받아봤을 겁니다. 알아도 디테일하게는 알지 못할 거예요. 그쪽으론 인사 스크린 외엔 정보 보고 별로 안 해요.”
“제가 돈을 받았습니까…”
한 경위는 “조응천·박관천 두 사람은 어쨌든 성과를 낸 것 같다. 두 사람은 (정윤회 씨 관련 내용이) 공개되기를 원했던 것 같은데, 뇌관이 다른 데에서 터져서 그렇지 결국 공개됐으니까”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조응천 씨는 그 문건으로 국회의원의 꿈을 이뤘다. 박관천 씨는 나보다도 적은 형량을 받았고 (수뢰혐의 증거물로 압수된) 금괴도 공소시효 만료로 돌려받게 될 것 같다. 나만 파편에 맞았다”고 했다.▼ 형사처분을 받은 것이 억울한가요.
“새로 발령받아 왔는데 인사철이라 여기저기 모르는 짐이 많았어요. 복사기 옆인가에 서류를 담아놓은 박스가 있었어요. 그 안에 정윤회 문건을 비롯한 문건들이 있었죠, 작성자 이름도 없는. 처음엔 박관천 경정의 문서들인지도 몰랐어요. 정보 욕심과 업무 의욕 과잉 때문에 그걸 복사했죠. 찬찬히 읽어보니 가치가 없는, 쓸모없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같이 일하는 최 경위(자살)가 박관천 경정의 짐 같다면서 자기에게 복사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그에게 복사해준 게 제가 한 일의 전부예요. 나중에 아마 그들 중 누군가가 언론사에 정윤회 문건을 넘겼겠죠.”
한 경위가 설명하는 이런 정황은 법원 판결과 어느 정도 부합하는 듯하다. 2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한 경위가 처음부터 외부에 유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볼 증거가 없고, 업무에 대한 의욕이 지나쳐 한계를 넘은 행위를 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자살한 최 경위에 대한 부분은 상급자인 최 경위와 상의하다가 최 경위의 권유에 따라 나눠준 것이다. 처음부터 (문건이) 광범위하게 유포될 것으로 예상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정윤회 문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았다면, 한 경위의 행위는 그냥 넘어가줄 수도 있는 수준의 잘못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2심 때 재판장이 검사에게 ‘피고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라고 물어봤어요. 검사가 ‘한 피고인은 주범도 아니고 공범도 아닙니다. 애매합니다’라면서 확답을 피했어요. 저는 이 사건으로 직업과 명예를 잃었어요.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져 최근 파산신청을 했습니다. 제가 돈을 받았습니까, 여자 문제가 있습니까. 범죄정보를 수집하는 경찰관으로서 진짜 일 잘하려고 너무 적극적으로 하다가 이렇게 된 건데….”
“7시간이든 문건이든…”
한 경위는 “2014년 정윤회 문건 사건에 휘말리기 직전에 나는 법조비리 첩보를 열심히 조사하고 있었다.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와 홍만표 변호사 사건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정윤회 문건 사건의 향배와 관련해 그는 “사실은 없고 설(說)만 있다. 그래도 야당이 집권하면 ‘세월호 7시간’이든 ‘정윤회 문건’이든 청문회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마지막으로 대법원의 판단을 받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