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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조작 간첩사건 피해자 가족의 분노

“자살하면 끝날까… 진실 밝힐 시간과 권리를 달라!”

고문조작 간첩사건 피해자 가족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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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남편은 구속됐고 사기사건으로 약점이 잡힌 시동생이 재판에 검찰측 증인으로 나오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눈앞이 캄캄하고 홀로 낭떠러지에 선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야 했다.

“당시 텔레비전에서 ‘수사반장’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였는데, 그런 프로에 나오는 최불암, 이낙훈씨가 범인을 너무도 잘 잡아서 위대해 보였어요. 그래서 혹시 이 사람들이 영향력이 있지 않을까 해서 남편 얘기를 편지로 써 보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는 대법원장이 대구지방법원을 방문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황씨는 손꼽아 기다린 끝에 법원으로 달려갔다. 기념식수를 하는 대법원장을 발견한 황씨는 절박한 심정으로 “대법원장님, 이것 좀 받아주세요!”라고 소리치며 편지를 내밀었다. 순간 누군가 편지를 가로챘고 파출소로 끌려간 황씨는 밤늦게야 훈방됐다.

“언니가 죽으면 얼마가 생기는데?”

“대통령 아들들이 다니는 학교까지 찾아가 편지를 전하려고 기를 썼죠.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먹고살려니 낮에는 돈을 벌어야 했기에 편지는 주로 밤에 썼습니다. 깨알같은 글씨로 얼마나 긴 편지를 써 보냈는지 몰라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바보였어요. 세상을 너무 몰랐지요.”



답답한 마음에 별별 생각을 다했다. 인질을 잡고 빌딩에 올라가 남편에 대한 진실을 밝혀달라고 협박을 하다 죽으면 해결이 될까.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월부책장사, 보험외판원, 상조회 경리, 치킨집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이를 악물고 살았다.

월부책 장사를 할 때 관할 담당형사가 책을 사주겠다며 찾아오라고 했다. 경찰서에 앉아 기다리던 황씨 앞으로 두 사람이 다가오자 황씨는 새파랗게 질려 얼어붙었다. 담당형사와 함께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남편을 고문했던 수사관이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쳤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그 수사관처럼 검은 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사람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린다.

체면과 자존심을 내던지고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지만 생활은 늘 적자였다. 어느 날 신장이 망가져 피오줌을 쏟은 뒤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앉혀놓고 보험증서를 내밀었다.

“엄마가 죽으면 이 돈을 타서 살아라.”

여섯 살 막내딸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엄마, 그럼 언니가 죽으면 얼마가 생기는데?”

이 철없는 것들을 두고 어떻게 죽을까 기가 막혔다.

긴 형기를 마치고 남편 신씨가 가족 곁으로 돌아온 것은 황씨가 경리로 있던 상조회 회장의 회비횡령 사건이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대책위원회를 이끌면서 소송을 주도하던 황씨는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하필 사정이 나쁠 때 남편이 출소하자 황씨는 기쁨보다는 ‘입이 하나 더 늘었다’는 걱정이 앞섰다. 가장의 빈 자리가 채워지면서 온전한 가족이 됐지만 예전의 화목함을 되찾을 순 없었다.

감옥생활은 남편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당뇨병을 얻어 성치 않은 몸에 그동안 쌓인 울분을 풀 데가 없는 남편은 황씨를 상대로 화풀이를 했다. “좋은 놈 있으면 가라”고 소리칠 땐 정말 참기 힘들었다. 황씨는 정신적 상처가 있는 환자라는 생각으로 남편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이제 장성한 자식들은 다 번듯한 직업을 갖고 결혼해 열심히 살고 있다. 하지만 자녀들이 결혼할 때 혼수 하나 변변하게 못 해준 것이 두고두고 황씨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간첩으로 몰린 반공투사

“친정어머니는 사위 때문에 마음 졸이다 출소하는 것도 못 보고 돌아가셨죠. 세상이 원망스럽지만 우리 부부 소원은 살아 있는 동안 진실이 밝혀져 여생이나마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는 것이지요.”

간첩방조, 편의제공죄로 무기징역형을 받은 석달윤(75)씨는 서울시경 정보과에서 대공업무에 종사하다 1969년 고향 진도로 내려가 양식업을 시작했다. 6·25전쟁 때 행방불명된 사촌형이 빌미가 되어 1980년 8월 중앙정보부 직원에게 연행된 석씨는 47일간 불법 구금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같은 해 10월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나중에 20년으로 감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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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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