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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 최송설당의 인생 역전

‘반역자의 피, 천한 관기(官妓), 탐관오리의 아내’ 뛰어넘은 마지막 승부

여걸 최송설당의 인생 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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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의 숙원 사업

여걸 최송설당의 인생 역전

최송설당 동상 건립식에 참석한 송진우(왼쪽), 여운형과 찍은 기념사진.

1920~30년대 조선의 중등학교 입시 경쟁은 상상을 초월하게 치열했다. 명문학교든 아니든 가릴 것 없이 웬만한 중등학교의 입시 경쟁률은 10대 1을 훌쩍 넘겼다. 진학 희망자에 비해 학교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입학시험에 통과한다고 누구나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골학생이 중등학교가 있는 도시로 유학하자면 학비와 생활비까지 매달 20~30원은 필요했다. 신문기자 월급이 50원 정도이던 시절, 20~30원은 가난한 농민이 부담하기에 벅찬 금액이었다. 도시로 유학 갈 형편이 못 되는 청년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학업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등학교 설립은 김천 주민들의 숙원 사업이었다. 1924년 김천 주민들은 ‘김천고보 기성회’를 조직하고 중등학교 설립에 박차를 가했지만, 재단 설립에 필요한 30만원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무려 6년 동안 제자리걸음이었다. 현재 가치로 300억원에 달하는 30만원은 가난한 김천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마련하기에는 몹시 큰돈이었다.

김천 주민들의 숙원 사업은 1930년 서울 무교정에 사는 김천 출신 일흔여섯 살 노파의 조건 없는 기부로 결실을 보았다. 철종 6년 화순 최씨 집안에서 태어난 노파는 이름이 없어 ‘송설당(松雪堂)’이란 호를 이름 대신 썼다. 전라도 고부에서 살던 부친이 김천으로 이주해 터를 잡아서 ‘고부댁’ ‘고부할매’라고도 불렸다. 최송설당이 재단 설립 자금으로 기부한 재산은 김천, 김해, 대전 세 곳에 흩어져 있는 20만2000원 상당의 토지와 10만원의 은행예금까지 총 30만2000원이었다. 그처럼 거금을 교육사업에 기부한 이유는 한없이 소박했다.

“나는 원래 자수성가해 남보다 넉넉히 지내는 편입니다. 얼마 안 되는 재산이나마 그것을 가지고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일찍부터 생각했으되 오늘까지 결정을 못하다가 이번에야 겨우 결정을 한 것입니다. 김천은 나의 고향인 만큼, 항상 그곳을 생각해왔습니다. 경상북도는 인구가 그렇게 많은데 중등학교가 한 곳밖에 없는 것을 늘 유감으로 생각해왔습니다. 학교가 설립되면 나도 김천으로 이사할 것이며, 김천 지역의 인사들과 협의해서 일을 처리하려 합니다.” (‘최송설당 여사 특지’, ‘동아일보’ 1930년 2월26일자)




재단 설립 자금이 마련됐다고 학교가 순탄하게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경상북도 학무국은 김천에는 고등보통학교 같은 인문계 중등학교는 필요 없다며 농업학교나 상업학교 같은 실업학교가 아니면 재단 설립 인가를 내주지 않으려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30년 가을 대공황의 여파로 쌀값이 폭락하자 기부받은 토지에서 나온 소출로 교사 신축 대금을 치르려던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 공사 대금이 2만원가량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최송설당은 자신이 살고 있는 무교정 자택마저 내놓았다. 쉰다섯 칸 무교정 저택은 대지 234평, 시가 2만5000원에 달했다.

살던 집까지 바친 최송설당의 열성 덕분에 교사 신축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그러나 임시 교사가 완공될 때까지 학무국은 실업학교가 아니면 재단 설립을 인가할 수 없다는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최송설당은 고보를 설립할 수 없다면 기부를 철회하겠다는 배수의 진을 치고 학무국과 담판을 벌였다. 학무국은 공립학교도 세워주지 않으면서 사립학교 설립마저 막으려 드느냐는 여론의 질타에 떠밀려, 실업교육을 병행한다는 조건으로 마지못해 재단 설립을 인가했다.

최송설당의 아낌없는 기부와 결연한 의지 덕분에 김천고보는 1931년 5월 개교했다. 그때부터 김천의 가난한 집 자식들도 실력만 있으면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김천고보 설립에 기부한 최송설당의 32만7000원은 적어도 매년 100여 명의 젊은이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사연 많은 여인

김천고보를 설립할 때까지 최송설당은 대중에게는 물론 재계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태어난 여인이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모았는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주위 사람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대한제국 고위관료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기자들과 만나는 것도 꺼리지 않았지만 사생활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최송설당이 김천고보 설립을 위해 전 재산을 기부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일보 기자가 찾아갔다.

뚱뚱하고 점잖아 보이는 여사는 기자에게 자리를 권하며

“앉으시오.”

기자는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간단한 첫인사와 기부에 대해 치하를 드린 후

“경성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벌써 서른다섯 해가 지났네요. 동학란에 살 수가 없어 상경했지요.”

지난날의 슬픔이 떠올라서인지 여사는 감개무량한 듯 얼굴을 숙였다. 기자가 다시 물었다.

“가족은?”

“아무도 없어요. 영감도 자식도.”

“영감님은 돌아가셨어요?”

“예. 젊어서 없었소.”

자세한 말을 피하며 다시 쓸쓸한 표정이 떠도는 여사의 가슴엔 어떤 애화가 숨었는가? 곁에 앉은 여사의 조카라는 분이 말했다.

“일생을 혼자 지내셨습니다.”

(‘전 재산을 바쳐 학교를 세운 부인’, ‘조선일보’ 1930년 3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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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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