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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토론보다 선동의 시대, 군 나섰어도 온몸 던졌을 것”

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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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로 가득 찬 국민…용기만 있으면 됐다
  • 87년 5월, “6월에 잽 날리고, 9월에 제대로 붙자”
  • 명동성당 농성, 이한열 죽음이 6월항쟁 장기화 두 축
  • 全 정권 군 동원 가능성? “광주에서 한 짓이 있으니 그럴 수도”
  • 6·29선언 직후 ‘정권 꼼수에 말려들었다’ 지도부 책임론 제기
  • 이한열 장례식에 모인 수십만 시민…“그러나 선배들은 없었다”
  • 87년 전대협의 ‘DJ 비판적 지지’, 마음의 빚으로 남아
  • 노무현 정권의 失政, 386 탓으로 매도하지 마라
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열린우리당 이인영(李仁榮·43) 의원이 건네준 명함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인 건 e메일 주소였다. ‘liy1987@kuro.or.kr’. 이름 이니셜(liy) 뒤의 네 자리 숫자. 그에게 1987년은 그렇게 특별할 수밖에 없다. 1987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그는 그해 5월,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의장으로 선출돼 6·10항쟁의 전위대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결성, 초대 의장을 맡았다.

정확히 하자면 그는 ‘6·10항쟁’이 아닌 ‘6월항쟁’의 중심에 있었다고 해야 맞다. 6월10일에 그는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민심과 학생운동 조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당국은 서대협 의장인 그를 6월1일 체포했다. 그는 6월10일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되면서 수송차량의 작은 창틈으로 시청 앞에 모인 군중의 성난 함성을 들었다. 그리고 6월17일 ‘구속취소’라는 극히 이례적인 상황 전개로 감옥에서 풀려난다. 세상은 그렇게 긴박하게,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목청 높아지고, 손짓 강렬해지고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에 대학을 다닌 기자로선 일개 대학 총학생회장의 존재감이 얼마나 컸을지 사실 좀 회의적이다. 그러나 1987년 당시 고려대에 다닌 동료 기자의 전언에 따르면 이인영 의원이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학생들 앞에 서면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의 손짓에, 그의 외침에 학생들은 응어리진 분노를 터뜨리고, 용기로 무장했다. 이 의원은 20년 전 자신의 모습이 개인의 카리스마에서 비롯됐다기보다, 그 시절이 그를 비롯한 모든 대중으로 하여금 전사가 되도록 부추겼다고 말한다.

“사람들 가슴속에 사회 정의가 짓밟히고 유린되는 데 대한 분노,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학살자에 대한 분노가 있었고, 민주사회에 대한 열망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할 때였으니까요. 정서적, 정신적 공유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화나 토론이 아니었어요. 왜 나가야 하는지를 설득하기보다, 용기를 내도록 선동하는 게 필요했죠. 그래서 목청이 높아지고, 손짓이 강렬해지고…. 제 안에 있는 것을 토해내는 것과 사람들 가슴속 분노를 터뜨리는 건 일치된 과정이었지, 사람들에게 없는 분노를 심는 게 아니었어요. 의식을 세뇌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용기를 터뜨리는 과정이었어요. 그때는 그게 필요했을 뿐, 저는 카리스마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이 의원은 충북 충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재수 끝에 1984년 고려대 국문과에 들어갈 때만 해도 초등학교 교사이던 아버지를 뒤따라 교사가 되거나, 운 좋게 공부를 계속해 교수가 돼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성적인 청년이었다. 그러나 대학 1학년 봄이 채 저물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낭만적인 것인지 깨닫는다. 당시 대학은 민주 사회에 대한 열망으로 들끓었기에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는 그에게도 금세 전이됐다. ‘언더서클’에 가입해 활동했고, 3학년 2학기 때 과 학생회장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1986년 가을, 비공개 서클 활동이 점차 공개 활동으로 전환하는 흐름을 탔다.

혈서 유세

1986년 10·28 건국대 사태로 1300여 명이 구속된 뒤 언더서클 중심의 학생운동세력은 선도투쟁에서 대중노선으로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이 의원이 이듬해 총학생회장선거에 출마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이 의원은 당초 총학생회장은 자신과 상관없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은 조직 내에서 출마를 준비하던 친구가 학점 미달인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고, 조직은 그에게 출마를 권유했다. 선거를 30여 일 앞둔 2월 중순이었다.

“당시만 해도 학생운동을 하면서 ‘조직의 오더’ ‘사명’ ‘헌신’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어요. 또 총학생회장이 폼 나는 자리가 아니라 ‘징역 가는 길’이었으니 뺄 일도 아니었고요. 그게 옳고, 집단적 의사결정이 그렇다면 그대로 따라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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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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