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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편은 좋은 사람 나머지는 나쁜 사람?

‘선조실록’은 왜 수정됐나

우리 편은 좋은 사람 나머지는 나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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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 때 사라진 것은 조선의 사람과 궁궐, 보물만이 아니었다. 당대와 이전의 역사기록들도 손상됐다.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史官) 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심지어 역사기록의 기초 자료가 되는 책들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선조실록’은 제작 이후 기술의 정확성을 두고 잡음이 끊임없이 일었다. ‘선조수정실록’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 기막힌 사연은….
우리 편은 좋은 사람 나머지는 나쁜 사람?
2010년, 2011년, 2012년 하는 식으로 그레고리력(Gregory曆), 그러니까 교황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부활절 조정을 위해 만들어진 서양 역법을 사용하는 우리는 이미 간지(干支)로 해를 세는 방식을 잊었지만, 올해가 임진왜란 7갑자(甲子) 되는 해다. 1976년, 독립 200주년을 뻑적지근하게 기념하던 미국인과는 달리, 1392년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필시 건국 200주년이 되는 1592년에 기념식을 생각하지 않았을 터이다. 기념식이 별로 없는 문화 탓이기도 했지만 3갑자, 4갑자가 더 기억할만한 시간 단위였을 것이다.

기억의 수정

올해 7갑자를 맞은 임진왜란은 조선 14대 임금 선조 연간(재위 1567~1608)에 일어났다.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은 바로 선조 연간에 일어난 사실과 정치활동에 대한 기록을 편찬한 것이다. 편찬은 선조 다음 임금인 광해군대에 이루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으로부터 ‘철종대왕실록(哲宗大王實錄)’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의 실록 28종을 통틀어 지칭하는 것이다.

25대 왕인데 28종인 이유는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가 더해지고 중간에 개수된 실록이 3종 포함된 데다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편찬 주체가 일제였고 사료에 비판의 여지가 많아 ‘조선실록’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록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기획해 편찬한 역사서가 아니라, 역대 조정에서 사관이 기록하거나 모아놓은 문서, 즉 사초(史草)를 국왕이 바뀔 때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편찬한 ‘문서 모음’의 성격을 띤다.

선조실록은 그 기록의 공정성에 대한 의심 때문에 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되는데, 이는 조선시대 최초의 실록 수정이었고, 이후 실록이 개수(改修) 또는 수정(修正)되는 전례가 됨과 동시에, 수정 또는 개수에도 불구하고 원래 실록과 수정 실록을 모두 남기는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전통을 남겨줬다. 이번에는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편찬의 시작

광해군 즉위년 9월,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는 관청인 춘추관(春秋館)에서는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선왕조의 ‘실록’은 졸곡(卒哭·상례에서 삼우가 지난 뒤 3개월 안에 강일에 지내는 제사) 뒤에 곧바로 사국(史局)을 설치해 편찬해 내어야 하는데, 평시의 사책(史冊)이 모조리 없어져서 남은 것이 없으므로 망연해 근거할만한 것이 없으니, 지극히 민망스럽고 걱정됩니다. 그러나 막중한 일을 도저히 그만둘 수 없으니 해조(該曹·담당 관청)에 당상 낭청을 차출하도록 해, 혹은 사대부가 듣고 본 것을 수집하고 혹은 개인이 수장한 일기를 모으기도 해, 여러 방면으로 헤아리고 조절해 편리하게 거행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이때 광해군은 조사(詔使), 즉 중국 사신이 지나간 뒤에 사국을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이미 말한 대로 실록은 졸곡이 끝나 임금이 정무를 시작하면서 바로 편찬에 들어가는 첫 사업이라는 것이다. 둘째, 실록 편찬은 역사를 담당하는 춘추관에서 발의하고, 임금은 그 발의에 따라 전교를 내린 뒤 임시 관청이 실록청을 춘추관에 설치하면서 시작된다. 셋째, 사책(史冊)이 모조리 없어져서 걱정이니, 사료를 수집해야 한다고 했다.

임진왜란. 7년간 진행된 침략전쟁. 선조 25년 4월 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피란을 떠났다. 그 무렵 무력한 조정을 비판하듯 궁성에 불이 났다. 물론 그 틈에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을 훔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먼저 불탄 곳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였다. 두 곳의 관서에 공사노비(公私奴婢)의 문적(文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다. 이 대목을 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뒤 역대 홍문관에 간직해둔 서적, 춘추관의 각조실록(各朝實錄), 다른 창고에 보관된 전조(前朝)의 사초, 즉 ‘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할 때의 초고가 불에 탔다. 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남김없이 불탔고, 내외 창고와 각 관서에 보관된 것도 모두 도둑을 맞아 먼저 불탔다. 그런데 탔을 뿐 아니라, 태우기도 했다.

한양을 버리고 파천(播遷)하는 와중에 역사기록들도 손상됐다.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이나 승정원 주서(注書)도 도망쳤기 때문이다. 사관 조존세(趙存世)와 김선여(金善餘), 주서 임취정(任就正)과 박정현(朴鼎賢) 등이다. 이들은 좌우 사관으로서 처음부터 호종하면서 선조의 침문(寢門)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선조가 자식처럼 대우했다. 주서는 ‘승정원일기’의 작성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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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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