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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장자치구 르포 上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한족에 잠식되는 ‘작은 아랍’

  • 카슈가르=모종혁 | 중국전문 칼럼니스트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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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무슬림 위구르족, 한족과 인종·언어·문화·종교 딴판
  • ● ‘하나의 중국’ 원칙…3시간 차 베이징과 동일 시간대
  • ● 개발 광풍에 한족 대거 유입, 위구르족 소외
  • ● 中 정부 ‘전통가옥 개조사업’으로 공동체 해체 위기
  • ● 위구르 주민 “기본적 인권, 자유 없다”
중국 신장(新疆)자치구의 최서단에 자리 잡은 오아시스 도시 카슈가르(喀什). 이곳 원주민 위구르족(維吾爾族)은 매주 금요일 오후 에드카(艾提尕爾) 모스크 광장으로 몰려든다. 에드카는 1442년에 지어진 신장 최대의 모스크다. 이들이 에드카를 찾는 것은 금요일 합동예배 ‘쥐메’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위구르족은 독실한 수니파 무슬림이다. 이슬람 세계의 휴일은 일요일이 아닌 금요일로, 무슬림에게 가장 신성한 날이기도 하다.

이슬람교도는 평소 집 안팎에서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신성한 날에는 반드시 모스크를 찾아 다른 무슬림들과 함께 예배를 올린다. 에드카 모스크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최다 2만 명. 이슬람교는 신도의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평등하게 대한다. 먼저 모스크를 찾은 무슬림은 예배당 안에 들어가고, 늦게 온 신도들은 모스크 주변에 양탄자를 깔아놓고 쥐메에 참가한다.

시곗바늘이 오후 3시를 가리키면 모스크의 스피커에서 이맘(이슬람 성직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예배는 아랍어로 진행된다. 이슬람 교리에 따라 여성은 모스크 일대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기에 나름의 방식으로 쥐메에 참여한다. 그들은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남자들의 입가에 물, 음식, 과일 등을 댄다. 그러면 남자들은 입에서 성스러운 기운을 불어줘 알라의 은혜를 ‘간접적으로’ 나눠준다.



 中, 모스크 밖 예배 금지

필자는 1997년 카슈가르를 처음 방문했다. 토요일에 도착하는 바람에 이곳 13개 모스크에서 집전되는 쥐메를 볼 수 없었다. 2009년 6월 말 두 번째로 찾았을 때 비로소 에드카의 쥐메를 취재했다.



7년 만인 지난 8월 5일, 에드카에서 본 쥐메는 이전과 좀 달랐다. 광장 곳곳에 사복경찰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한 경찰이 사진을 찍는 필자에게 다가와 “어디서 왔나” “왜 여기에 머무나” 꼬치꼬치 캐물었다. 예배당에 못 들어가는 위구르족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광장에서 만난 무슬림 압둘레임은 “(중국 당국이) 2, 3년 전부터 모스크 밖에서 쥐메 예배 드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에드카 광장의 이런 풍경은 중국의 ‘화약고’로 변한 신장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예배를 마친 위구르족은 모스크 주변에 모여든 걸인과 장애인에게 성금을 건넨다. 또한 업무 때문에 쥐메에 참석하지 못한 친인척을 찾아 신의 축복을 나눠준다. 현지 무슬림 오스만은 “정부 기관과 일반 기업은 위구르족이 쥐메에 참석하도록 편의를 봐주지 않는다. 단지 무슬림들이 건물 한쪽에 모여 예배 보도록 잠시 시간을 내줄 뿐”이라고 했다. 그나마 이 정도 배려는 신장에서도 위구르족의 인구 비율이 높은 카슈가르, 쿠차(庫車), 악쑤(阿克蘇), 호탄(和田) 등 일부 도시에서나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이슬람 국가에선 쥐메가 정오쯤 거행되는데 왜 에드카의 쥐메는 오후 3시에 열릴까. 이는 중국 정부의 ‘하나의 중국(統一中國)’ 원칙에서 비롯됐다. 카슈가르는 중앙아시아의 파키스탄·키르기스와 맞닿은 국경지역이다. 중국 수도 베이징(北京)과는 경도상 3시간의 시차가 난다. 하지만 중국은 러시아와 인접한 두만강에서 카슈가르까지 하나의 시차로 묶었다. 여름철 카슈가르에선 오전 8시가 훨씬 넘어서야 해가 뜨는 것도 그래서다.

중국 정부는 이처럼 시간대를 하나로 묶어버렸지만 위구르족은 현지 사정에 맞게 생활한다. 카슈가르의 일상 업무는 오전 10시가 돼야 시작된다. 이런 독자성과 통일성이 오늘날 신장 문제를 이해하는 키포인트다.

카슈가르의 독자성은 바자르(Bazaar)에서도 드러난다. 바자르는 투르크어로 ‘시장’이란 뜻이다. 위구르족에게 바자르는 단순한 시장이 아니다. 이웃과 소통하는 교류의 장이자, 한 주의 피로를 씻는 쉼터다. 1000년 역사를 지닌 카슈가르의 바자르는 현재 세 곳에서 열린다.



‘바자르’의 도시

 첫째는 중시야(中西亞) 바자르다. 2004년 카슈가르 시(市)정부가 1억 위안(약 170억 원)을 투자해 만든 상설시장이다. 600여 개의 상점이 입주했는데, 주민과 관광객, 중앙아시아 상인들로 문전성시다. 지난해 카슈가르에서 수출된 11억 달러(약 1조2000억 원)의 상품이 대부분 이곳에서 거래됐다.

둘째는 일요일마다 열리는 역센베(星期天) 바자르다. 중시야가 개설되기 전 카슈가르 바자르는 역센베를 가리켰다. 상설시장이 들어서면서 일요일 노천시장으로 개념이 변했다. 그마저 2년 전부터는 과일을 제외한 모든 물품의 거래 행위가 금지됐다. 중시야에서 만난 주민 푸르캇은 “3년 전부터 테러 사건이 빈발하면서 시정부가 마차와 삼륜차의 도심 진입을 막았고, 거리에서 일상용품의 거래를 금지했다”고 전했다.

셋째는 우락(巴札) 바자르다. 우락은 위구르어로 ‘가금(家禽)’을 가리킨다. 카슈가르 외곽에서 일요일마다 열리는데, 주로 위구르족이 먹는 소와 양을 거래한다. 우락의 규모는 7년 전보다 훨씬 커졌다. 이곳에서 만난 아무르한은 “우락은 시정부의 간섭이 적어 카슈가르 일대의 모든 위구르족이 몰려와 다양한 물품을 사고판다”고 했다. 노천식당과 쉼터도 열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카슈가르는 환경적 요인으로 ‘바자르 도시’가 됐다. 카슈가르는 톈산(天山)산맥, 아래로는 쿤룬(崑崙)산맥, 동으로는 타클라마칸 사막, 서로는 파미르 고원에 둘러싸인 탓에 사방 각지에서 쳐들어오는 외부 세력, 즉 유럽계, 중국계, 티베트계, 투르크계, 키르기스계 등에게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런데도 이런 약점을 역이용해 동서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카슈가르는 서역(西域) 36국의 하나인 소륵(疏勒)의 수도였다. 소륵은 기원전 2세기에 세워져 기원후 7세기까지 유지됐다. 한족도 위구르족도 아닌, 중앙아시아에서 온 유럽계 유목민이 세운 나라다. 이들은 2세기 인도에서 유입된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다. 주업은 상업. 카슈가르는 중국에서 톈산남로를 통해 인도로 갈 때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중앙亞 상업요지

6세기에 투르크계 위구르족이 침입해 소륵을 차지했다. 카슈가르라는 이름은 이때 얻었다. 카슈가르는 투르크어로 ‘옥(玉)이 모이는 곳’, 즉 상업 교류지라는 뜻이다. 카슈가르는 648년 당(唐)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고 그때 처음 중국 왕조와 인연을 맺었다.

그 뒤 여러 민족과 나라가 카슈가르를 지배했지만 바자르는 변함없이 열렸다. 몽골제국과 차가타이 칸국이 지배할 때는 카슈가르를 ‘녹색 지붕 건물’이라 불렀다. 상업이 번성하고 모스크가 많은 도시란 의미다. 우리 옛 문헌에도 카슈가르가 중앙아시아의 상업 요지로 자주 등장한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날 카슈가르는 신장 남서부의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지난해 지역내총생산(GRDP)은 780억 위안(약 13조2600억 원)에 달해 전년보다 12.2% 증가했다. 상업뿐만 아니라 농업, 목축업, 직물업, 관광업도 발달했다.

신장의 위구르족은 카슈가르를 ‘마음의 고향’이라 일컫는다. 위구르족의 종교와 문화 중심지라서다. 위구르족 도시 중 가장 먼저 이슬람으로 개종한 곳이다. 또한 위구르족의 종합예술 무카무(木卡姆)의 본고장이다. “카슈가르에 가지 않았다면 신장을 봤다고 하지 말라”고 할 정도다.



돌궐 부족 일원

신장엔 기원전 2000년부터 수백 년 동안 유럽어족의 유목민이 주로 살았다. 신장 서남부 로프노르(羅布泊)의 샤오허(小河) 묘지군에선 큰 키, 금빛 머리카락, 오뚝 선 코, 깊은 광대뼈 등을 지닌 미라가 다수 발견됐다. 샤오허 유목민은 동서 문명교류를 촉발한 메신저다. 중앙아시아 문화를 중국으로, 중국 문명을 서쪽으로 전파했다. 그들의 후예가 건국한 누란(楼蘭) 왕국과 호탄 왕국은 페르시아와 인도 문화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흉노(匈奴)가 등장하면서 신장의 구도가 변했다. 몽골고원에서 발원한 흉노는 기원전 4세기부터 중국 전국시대의 제후국들을 공격했고, 묵돌-노상-군신 선우로 이어지는 3대 81년 동안 최전성기를 보냈다. 영토는 신장 동부부터 만주 서부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신장이 중국 서쪽의 변경지역이라는 ‘서역’이라 불린 것도 이때부터다.

기원전 2세기에 한무제는 서역 및 중앙아시아의 왕국들과 화친을 맺어 흉노에 대항코자 장건(張騫)을 파견했다. 장건은 사신으로서의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13년간 서역과 중앙아시아에 머물면서 얻은 정보를 한무제에게 바친 덕분에 실크로드가 열리게 됐다.

흉노는 기원전 1세기부터 내분과 한의 잇단 공격으로 세력이 약해졌다. 2세기에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나 6세기 바이칼호 일대에서 등장한 돌궐이 흉노의 후예를 자처했다. 돌궐은 투르크계 민족이지만 문화와 풍습이 흉노와 흡사했다. 몽골고원부터 신장을 거쳐 중앙아시아까지 지배한 돌궐은 7세기 들어 부족 간 항쟁과 당나라의 이간책으로 붕괴했다.

위구르족은 돌궐의 한 부족이다. 쿠틀루그 빌게 카간(骨力裵羅)은 돌궐이 붕괴하자 744년 부족을 규합해 위구르제국(回鶻汗國)을 건국했다. 신장과 몽골고원 서부에 걸친 대국이었다. 건국 초기부터 당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755년 당이 안사(安史)의 난으로 위기를 겪자 대군을 파견해 진압하고 내정까지 간섭했다. 위구르제국은 페르시아에서 유입된 마니교를 국교로 삼았다. 오늘날에도 신장 곳곳에 마니교 유적이 남아 있다.

위구르제국은 100년간 번성했지만 840년 키르기스족의 일격에 멸망했다. 이에 위구르족은 수백 년간 신장 곳곳에 크고 작은 왕국을 세워 각자도생했다. 유목민이던 위구르족은 정주민이 돼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3세기 들어 몽골제국이 신장을 지배하면서 이슬람화가 이뤄졌다. 신장은 칭기즈 칸의 둘째아들인 차가타이가 다스렸는데, 그 일족이 이슬람에 귀의하면서 피지배민인 위구르족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신장 내 투르크계 민족은 무슬림이 됐고 다른 종교는 자취를 감췄다.



‘동투르키스탄 부활’

1750년대 청나라가 침입해 몽골을 몰아내고 곳곳의 위구르족 왕국을 무너뜨려 패권을 잡았다. 1759년 청군은 카슈가르를 다스리던 압파호자(阿巴克霍加)를 정벌하고 압파호자의 둘째딸 입파르한(伊帕爾罕)을 베이징으로 압송해갔다. 건륭제는 그녀를 강제로 범하고 첩으로 삼았다. 훗날 용비(容妃)로 격상시켰는데, 몸에서 향기가 난다고 ‘향비’라 불렀다. 향비가 죽자 시신을 카슈가르로 옮겨 향비묘를 만들었다.

19세기 들어 청의 지배가 느슨해지자 위구르족은 42차례나 독립투쟁을 벌였다. 특히 코칸트 칸국 출신의 야쿱벡은 1865년 카슈가르를 중심으로 동투르키스탄을 건국했다. 야쿱벡은 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영국이 각축하던 정국을 적극 이용했다. 우루무치(烏魯木齊)까지 점령하는 등 신장 중서부를 10여 년간 통치했다. 그러나 청군이 쳐들어오자 야쿱벡은 1877년 독살됐다. 이듬해 청은 신장 전역을 재점령하고 야쿱벡의 무덤을 초토화했다.

청은 러시아와의 세력 다툼에서 승리한 뒤 1884년 신장성을 설치했다. ‘신장’은 ‘새로운 영토’라는 뜻. 1911년 청 멸망 후엔 군벌이 다스렸다. 1933년과 1944년 소련의 도움 아래 위구르족이 봉기해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세웠다. 하지만 1949년 중국군이 신장을 점령해 지금에 이른다. 오늘날 위구르족 분리독립단체들이 한결같이 ‘동투르키스탄의 부활’을 외치며 투쟁을 펼치는 배경엔 이런 역사가 있다.

그들의 분리독립투쟁은 과거의 향수 때문만은 아니다. 한족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경제·사회적인 요인이 가장 크다. 위구르족과 한족은 인종, 언어, 문자, 종교 등에서 전혀 다르다. 한족은 1949년 이래 신장으로 대거 유입됐다. 1953년엔 위구르족이 신장 인구의 74%에 달했고, 한족은 6%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족은 1973년 35%, 1982년 40%를 넘어섰다. 위구르족은 1973년 51%, 1982년 46%로 줄었다.

중국 정부는 ‘신장 개척’을 내세워 한족을 대거 이주시켰다. 1962년엔 란신(蘭新, 간쑤성 란저우-신장 우루무치) 철도를 개통해 기차로 실어 날랐다. 위구르족은 “한족은 기차가 낳고 위구르족은 사람이 낳는다”고 풍자했을 정도다.


중국 최대 자원 寶庫

2010년 조사 결과 신장 인구는 2181만 명이고 이 중 한족은 40.4%(882만 명)였다. 30년간 민족 구성비에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통계상 허점이 있다. 인구센서스의 조사 대상자는 ‘장기거주자’로 한정한다. 임시거류증 없이 일하는 외지인, 생산건설병단(生産建設兵團)에 소속된 군인 200만 명은 포함되지 않았다. 병단은 기업과 농장을 운영하는 준(準)군사조직으로 오직 신장에만 있다. 외지인과 병단원의 90% 이상은 한족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전에는 거주·이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한족은 1980년대 이전에는 정부에 의해 정책적으로 이주했다면, 그 뒤로는 일자리를 찾아 자발적으로 이주했다. 신장이 중국 최대의 자원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원유의 6분의 1, 천연가스의 30%가 신장에서 나온다. 이 ‘블랙골드’로 인해 새로 건설된 칼라마이(克拉瑪依)와 코를라(庫爾勒)는 한족의 인구 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신장의 기업과 상점들은 직원을 채용할 때 한족을 우선 뽑는다. 한족은 의사소통이 용이한 데 반해, 위구르족은 중국어가 서툴고 무슬림이라 경계 대상이다.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의 개발, 관리, 운송 등에 종사하는 인력은 거의 다 한족이다. 위구르족은 취직을 하더라도 가게 판매원, 식당 종업원, 청소부 등 급여가 낮은 허드렛일을 주로 한다. 카슈가르에서 만난 위구르족 대학생은 “지역 최고 명문인 신장대학을 졸업해도 중견기업에 취업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대다수는 정원의 50% 이상을 위구르족으로 뽑는 공무원과 경찰 시험에 도전한다”고 말했다.

금세기 들어 개발 붐을 타고 카슈가르 악쑤, 호탄 등 남서부에까지 한족이 밀려들었다. 2015년 카슈카르에서 한족은 29만 명으로 6.5%를 차지했다. 한족은 대부분 도심에 거주한다. 신장의 최서단 카슈가르까지 한족이 밀려든 데는 난장(南疆) 철도가 큰 역할을 했다. 난장철도는 1999년 개통됐는데, 우루무치에서 카슈가르까지 1446㎞에 달하며 코를라, 쿠차, 악쑤 등 위구르족 주요 도시를 통과한다.

2011년 10월 중국 정부는 카슈가르 경제특구(SEZ) 개발계획을 발표해 한족의 유입을 증폭시켰다. 카슈가르에 50㎢ 규모의 특구를 조성해, 물류·전자·섬유·건설자재 등을 핵심 산업으로 키운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들고 나왔다. 그 첫 행보로 지난 5월 6일 카슈가르에서 파키스탄의 항구도시 과다르에 이르는 총길이 1152㎞의 고속도로가 착공됐다. 우선 1구간 392㎞가 건설된다.



개발 혜택 소외된 위구르족

중국업체가 공사비 29억 달러(약 3조2500억 원)를 조달하고 시공을 맡았다. 이 사업이 ‘일대일로’의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남중국해가 봉쇄될 경우 중동으로 바로 나가는 길이라 중국엔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개발 바람에 따라 카슈가르엔 일확천금을 노려 돈다발을 싸들고 온 연해지방 투자자와 투기꾼이 수두룩하다. 지난 5년간 이들의 투기 탓에 카슈가르의 부동산 가격이 급상승했다.

하지만 위구르족은 개발의 혜택에서 소외됐다. 그 와중에 위구르족 전통촌락 카드미셰해르(老城)가 사라지고 있다. 2010년 8월부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70억4900만 위안(약 1조1983억 원)을 들여 ‘전통가옥 개조·정돈사업’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이 사업에 따라 지난해 말까지 507만m²의 촌락과 가옥을 철거하고, 4만9000가구, 22만 명을 신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다. 정부는 “위구르족 촌락이 오래돼 상하수도 건설이 어렵고 가옥은 지진에 취약하다”며 사업을 밀어붙였다. 지진이 빈발하는 신장에서 내진 설계가 안 된 전통 가옥을 철거하고, 위구르족을 현대식 아파트로 이주시켜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것.

하지만 위구르족의 반응은 차갑다. 카드미셰해르는 위구르족 공동체의 산실이자 전통문화의 보고이기 때문. 쿠드자 비쉬(高臺民居)에서 만난 주민 아니발은 “시 정부가 방은 1m²당 1600위안(약 30만6000원), 거실과 복도는 700위안(약 11만9000원)으로 쳐서 보상하겠다면서 이주를 강요한다”며 “카슈가르 외곽의 아파트가 1m²당 2600위안(약 44만2000원)이라 보상금으로는 새집을 구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아니발은 동생 오마르와 6대째 전통토기를 빚는 장인(匠人)으로 이곳 유명인사다.

카드미셰해르의 생활여건은 열악하지만, 아니발 형제는 아파트로 이주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다. 아니발은 “이곳이 우리의 집이자 일터”라며 “시 정부에서는 공방을 따로 만들어 우리를 고용하겠다는데, 우리가 왜 남의 밑에서 일해야 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 위구르족 주민은 “카드미셰해르의 원주민 70%가 쥐꼬리만한 보상금만 받고 이사하는 바람에 막대한 아파트 대출금을 빚으로 떠안으며 수백년 동안 살아온 생활 터전을 떠나야 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위구르족에게 전통 가옥은 단순한 주택이 아니다. 그들은 집에서 전통 음식과 전통 공예품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해왔다. 골목길에서 장작을 태우고 음식을 만들어 바자르로 가져가 파는 식이다. 아니발 형제처럼 집 안에서 토기를 구워내거나 다양한 수공예품을 만들었다. 카드미셰해르는 모스크, 시장과 더불어 위구르족의 생활상을 상징한다. 카드미셰해르엔 위구르족의 역사와 옛 도시계획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통 가옥은 길게는 500년 넘는 역사를 지녔다. 보리 짚과 흙을 덧쌓아 지었지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카드미셰해르 해체에는 중국 정부의 또 다른 노림수가 숨어 있다는 의심을 산다. 위구르족의 전통문화를 퇴색시키고 주민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라는 것이다. 신장대학의 한 위구르족 교수는 “신장 전역에서 진행되는 전통 가옥 개조·정돈사업은 위구르 공동체의 해체가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비판했다.



“인권도 자유도 없다”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에게 몇 가지 혜택을 주고 있다. 중국 최초로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했고, 공무원과 경찰을 채용할 때 위구르족을 인구 비율만큼 뽑으며 시험에서 가산점을 준다. 농촌에서 근무하는 공무원과 교사의 봉급은 도시보다 20~30% 더 많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위구르족 주민은 “얼마 전 길거리를 지나가다 검문을 당하면서 휴대전화의 SNS와 사진까지 검열당했다”며 “신장에 사는 위구르족에게는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가 없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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