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호

처칠 반대 무릅쓰고 ‘조선 독립’ 문안 집어넣어

장제스(蔣介石)일기로 본 카이로 회담 비화

  • 이상철 │일본 류코쿠(龍谷)대학 사회학부 매스컴 담당 교수 cieli@soc.ryukoku.ac.jp

    입력2014-05-21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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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제스를 만난 김구, 조선의 완전한 독립 요구
    • 동아시아를 대표한다는 장제스의 고집
    • 워싱턴과 카이로를 홀린 쑹메이링의 매력
    • 루스벨트는 격찬, 처칠은 험담
    처칠 반대 무릅쓰고 ‘조선 독립’ 문안 집어넣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 회담의 주역들. 1943년 11월 25일 카이로에서 환담 중인 장제스 중국 총통,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와 장 총통의 부인 쑹메이링 여사(왼쪽부터).

    현재의 아시아 질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11월 23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미·영·중 3국 정상회의(카이로 정상회담)에서 기본 틀이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장제스는 이 회의에 아시아를 대표해 참석했다. 회담의 주제는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다음 일본의 식민지와 일본이 전쟁에서 차지한 점령 지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였다.

    조선의 완전 독립을 주장한 장제스는 카이로 선언문 조항에 ‘조선의 독립’이 들어가게 했는데, 이 사실은 지금까지도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장제스의 일기에 흥미를 가졌다. 2010년부터는 거의 매년 여름 스탠퍼드대학의 후버연구소를 방문해 장제스의 일기를 읽었다. 장제스 유족으로부터 이 일기를 빌려온 후버연구소는 2006년 4월 일부를 처음 공개한 이래 세 번에 걸쳐 전부를 공개했다.

    그러나 사진 촬영은 물론이고 복사도 금지했기에 손으로 베껴 쓸 수밖에 없었다. 필기도구와 종이는 연구소가 제공하는 것만 써야 했다. 참고로 1999년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에서 낸 ‘백범 김구 전집’ 제4권에 실려 있는 장제스 일기는 진본이 아니다. 그것은 진본 장제스 일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장제스는 28세가 된 1915년부터 85세가 된 1973년까지 57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1926년의 북벌전쟁과 8년간(1937~1945)의 항일전쟁기는 물론이고 4년 이상 이어진(1945~1950) 내전기에도 빠뜨리지 않았다.



    장제스 일기는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주목을 받았으나, 일기 진본 전부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제스 일기를 읽고 쓴 논문이나 책이 더러 나오긴 했으나 2006년 이전에 나온 것들은 진본 일기를 보고 쓴 것이 아니었다.

    장제스의 일기는 시기에 따라 형식 면에서 조금씩 변화를 보이지만, 57년을 변함없이 매일 붓으로 300자 이상을 단정한 행서체로 적어놓았다. 갈겨썼기에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으나 알기 쉬운 문체라 전체 뜻을 파악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는 12 내지 14개의 세로 행이 있는 B5 용지 크기의 일기장에 한 행에 23자 정도씩을 써 내려갔다.

    그는 제일 먼저 ‘제요(提要)’라는 제목을 붙여 그날의 주요 사건과 그것을 알게 된 과정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예정(豫定)’이라는 제목하에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들을 적고, ‘주의(注意)’란 제목으로 국내외 형세에 대한 평가와 판단, 유념해야 할 점을 열거했다. 이어 ‘기사(記事)’라는 제목으로 그날 한 일을 적어놓았다.

    주말에는 그주에 대한 반성과 다음주에 예정된 업무의 내용을 적어놓았다. 월말에는 그달의 반성록과 그달에 있었던 주요 사건을 적은 대사표를 정리했다. 연말에는 그해 적어놓은 일기를 점검해 빠진 것과 미흡했거나 확실하지 않았던 기록을 보충했다. 물론 그해를 반성하는 글도 길게 서술해놓았다.

    장제스 일기는 글자 수가 제한돼 있어 기록하지 않은 사실은 있을 수 있으나 꾸며서 적은 것은 없다고 판단된다. 제요, 예정, 주의, 기사 식으로 일기를 간략히 적은 데다 주말과 월말, 연말에 반성록을 적어 거짓말을 적으면 전후 모순이 발생해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이 이렇다보니 사실과 다른 말을 적으면 찾아내기가 쉽다. 그가 역사 기록으로 남길 목적(보여주기 위해)으로 일기를 적은 것은 틀림없으나, 진실을 적으려고 애쓴 흔적은 분명히 보인다. 주위 사람에 대한 인물평이나 쌍욕을 적은 부분도 있고 성욕에 대한 내용도 있다.

    진주만 기습 덕에 연합국 된 중국

    처칠 반대 무릅쓰고 ‘조선 독립’ 문안 집어넣어

    후버 연구소는 장제스 일기를 A4 용지 크기의 청색 종이에 한 장씩 복사한 복사본만 공개한다.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 초대된 경위를 설명하자면 1941년 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급습한 것은 12월 8일 새벽 1시(중국 시간)였다. 3시간 뒤 장제스는 주미 중국대사 둥셴광(董顯光)으로부터 이 사건에 관한 보고를 받는다.

    그날 오후 장제스는 충칭(重慶)주재 미·영·소 대사를 접견해 일본과의 전면전을 불사한다는 뜻을 전달하고, 이튿날 오후 9시 대일 선전을 포고했다.

    그날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장제스에게 전보를 보내왔다. 내용은 4년 반에 걸친 장제스의 항일 투쟁에 경의를 표하고 힘을 합쳐 일본과 싸우기를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장제스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총리 처칠, 소련의 서기장인 스탈린한테 4대국 연합 군사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12월 10일 장제스는 ‘전국 군민(軍民) 동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한다. 이 편지에서 장제스는 ‘일본은 만주사변 때 우리의 선양(瀋陽)을 기습했던 술수로 우리의 우방인 영·미를 급습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세계와 인류에 전례 없는 혼란을 일으켰다. 민국 정부는 국제 정의를 신장하고 인류 문명을 지키기 위해 이미 일본에 대해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내렸다’라고 말한다.

    다음 날도 장제스는 전 인민을 향해 “우방의 적은 우리의 적이고 우방의 승패는 곧 우리의 승패다”라며, 반(反)침략전쟁에서 영·미와 함께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한다. 3주가 지난 1942년 1월 2일, 그는 루스벨트의 제안으로 중국전구(戰區)의 최고 사령관에 취임한다. 장제스는 이 사건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중·미·영·소 4개국은 이미 반(反)침략의 중심이 됐다. 하여 우리나라는 세계 4강 중 한 나라가 됐다. 거기에 더해 나는 중국전구의 최고 사령관에 취임하기로 했다. 내가 지휘하는 구역에는 베트남과 태국도 들어 있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의 위신과 지위는 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하지만 헛된 명예욕 때문에 해가 오지 않도록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1942년 1월 31일 쓴 ‘이번 달의 반성록’에서)

    중국전구는 워싱턴에서 열린 미·영군 참모장 연석회의에서 결정됐다. 애초에는 중국과 태국, 베트남, 미얀마의 북부를 하나의 전구로 할 계획이었는데 중국을 떼어내 독립 전구로 만들고, 나머지 동남아전구는 미·영 참모장 연석회의에서 관할하기로 했다. 전구 사령관 취임 뒤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전보를 보내 중국전선에서 참모장을 맡을 장군 한 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쑹메이링의 활약

    루스벨트는 조지프 스틸웰(1883~1946) 장군을 보내 장제스를 돕게 했다. 장제스는 수하에 군사 재능이 있는 인재가 없어 미국인 참모장을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첫째는 미국의 군사원조를 이끌어내고, 둘째는 미국인 참모장에게 미얀마 전역(戰役)을 맡겨, 미얀마전구의 지휘권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잘 맞지 않았다.

    장제스는 극동전선에서 일본을 견제하는 데 실패했다. 1942년 전반까지 큰 전과도 내지 못한 채 일본에 밀려 힘든 싸움을 했다. 1942년 11월 장제스는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을 신병치료를 하며 군사원조도 이끌어낼 겸 해서 미국으로 보냈다. 카이로 회담은 쑹메이링이 미국에 있을 때 구체적으로 논의됐고 일정도 결정됐다.

    쑹메이링은 신변에 일어나는 일을 남편에게 매일같이 보고하고 회답을 받아 행동했다. 원래 부부 사이가 좋았던 데다 미국에 대한 쑹메이링의 영향력이 컸기에 장제스는 외교부장이나 주미 중국대사보다 부인한테 더 의존했다.

    1943년 5월 3일 쑹메이링은 루스벨트 부인의 초대를 받아 백악관에 며칠 머물게 되는데, 그때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중국전선에서 벌어진 장제스와 일본군의 전투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5월 3일에 일어난 일을 쑹메이링은 장제스에게 이렇게 알리고 있다.

    ‘백악관에 도착해보니 루스벨트 부인이 현관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부인은 내 건강을 굉장히 염려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날 (대통령 부부와의) 회담은 밤늦게까지 계속됐고 그 후 4일간 이어졌답니다.’(1943년 5월 7일 전문, 쑹메이링이 장제스에게)

    5월 초순에 있었던 쑹메이링과 루스벨트 대통령 회담은 장제스와 루스벨트 정상회담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쑹 부인은 회담이 열리기 전은 물론이고 회담이 끝난 후 반드시 장제스에게 상세히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 회담에 임했기 때문이다.

    5월 7일과 8일, 11일 쑹 부인은 군사 문제를 의제로 한 전보를 장제스에게 보냈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미얀마 공격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재삼 설득하고 설명한 끝에 루스벨트는 우리를 돕는 새 노선을 선택하기로 했답니다.’

    이 전보에 대해 장제스는 ‘이 일(미얀마 공격 계획)은 굉장히 중요하니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5월 13일 장제스가 쑹메이링에게)라고 회답했다.

    장제스의 고민, 루스벨트의 배려

    처칠 반대 무릅쓰고 ‘조선 독립’ 문안 집어넣어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한국 독립운동의 강력한 후원자가 된 중국의 장제스 총통(오른쪽)과 백범 김구가 1933년 5월 난징(南京)군관학교에서 비밀 회동할 때 모습. 이 인연 덕분에 1941년 7월 26일 김구는 장제스에게 카이로 선언에 한국의 독립조항을 넣어달라고 요구했다.

    쑹 부인과 루스벨트는 전후 아시아의 질서를 어떻게 재편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상세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전후에 ①다롄과 뤼순, 대만을 중국과 미국의 군사기지로 만들어 공동으로 사용하되 중국 측이 준비되면 미국은 그 지역에서 물러난다. ②조선반도는 중·미·소 3개국의 공동 관리하에 둔다. ③일본이 점령한 태평양의 섬들은 연합국이 공동 관리하기로 한다(5월 25일 쑹메이링이 장제스에게)는 데 잠정 합의했다.

    쑹메이링을 만난 뒤인 6월 6일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카이로에서 4개국(미·영·소·중) 회의를 열려고 하니 참가해줄 것과 그전에 한 번 단둘이 만날 것을 요청했다. 쑹 부인과 나눈 얘기를 장제스에게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장제스는 이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중립조약을 맺은) 소련과 일본이 완전 결별하기 전에 그 회의에 참석하면 스탈린이 불편해할 것 같으니 미·영·소 정상이 만난 다음에 대통령을 만났으면 한다’(1943년 6월 7일, 장제스가 쑹즈원 외교부장에게)는 사양의 메시지를 외교부장을 통해 전달했다. 그런데 장제스 일기를 읽어보면 장제스의 생각은 더 복잡했던 듯싶다.

    ‘루스벨트가 4개국 회의에 출석해달라고 하면서 그전에 며칠간 단독으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달해 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회의에 출석하는 것은 겉치레에 불과했다. 유명무실하게 4개국 정상의 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어 그에 만족하는 것뿐이라 실익도 의미도 없다. 그들(미·영·소)의 얼굴을 빛내주는 것뿐이라 거절했다’(6월 5일)고 일기에 적어놓았다. 다음 날짜 일기에는 ‘나는 허명을 탐내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베풀어달라는 것도 아니기에 거절하기로 했다’고 써놓았다.

    힘든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장제스는 미·영·소가 중국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루스벨트가 장제스에게 초청장을 보낸 5월, 100여 명의 군사대표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한 처칠 영국 총리가 라디오 연설과 회의석상 그리고 담화 때마다 ‘앵글로 색슨의 위대함’을 강조했다. 처칠은 “여러 나라에 자유의 은혜를 보내주기 위해 앵글로 색슨의 위대한 두 나라 문명은 결속해야 한다” “전후 세계는 미·영·소가 주재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돌아다녔다. 장제스의 마음이 평안치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 참가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주요국 정상회의에 초대된 데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기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루스벨트를 만나면 공동 선언문을 발표해야겠다. 내용은 ①대서양 헌장을 작성해 전 세계 각국과 각 민족에 적용토록 한다 ②꼭 무조건 승리를 쟁취한다 ③전후에 유력한 국제평화기구를 설립한다 ④태평양 대일(對日)작전연합참모부를 충칭과 워싱턴에 설립한다 ⑤전후 경제 건설에서 미국과 협력한다 등이다’(7월 9일). 의제를 적어놓은 것인데, 장제스는 조선 문제는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우리의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장제스가 전후 처리 문제를 의논하러 카이로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안 것은 7월 중순이었던 듯하다. 7월 26일 장제스를 만난 김구는 “영국과 미국이 조선의 장래 지위(국제적 지위)에 대해 제멋대로 주장한다. (그들은 한국 문제에 대해 )국제 공동관리 방식을 채용하려 하고 있으니 중국은 그 주장에 현혹되는 일이 없이, 한국의 독립 주장을 관철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부탁을 들은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은 그런 생각(공동관리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문제를 확실히 하지 않으면 장래에 쟁의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한국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서부터 성심성의로 단결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해주면 좋겠다. 그래야 중국도 이 문제(한국의 완전 독립)를 쟁취할 수 있고, 이 일에착수하기도 쉬울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김구 “조선 독립 주장해달라”

    이 만남이 있은 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 의제를 고민하며 루스벨트와 처칠을 만나 나눌 이야기를 일기에 꼼꼼히 적는데, 그때마다 ‘조선의 완전 독립’이라는 조목을 빼놓지 않았다. 8월 18일 루스벨트가 측근인 하리 로이도 호프킨스를 통해 장제스를 워싱턴으로 초청하려 했으나, 중국 측은 “장 총통은 군사와 정치적으로 여러 문제를 안고 있기에 멀리 여행하기 힘들다”라고 거절했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장제스의 지시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9월 26일자 지난 주 반성록에 ‘처칠은 일요일(9월 26일) 우리 중국을 욕되게 하는 연설을 했다. 그자는 우리나라가(국제적으로)아무런 지위도 누리지 못하게 할 심산인가보다’라고 적어놓았다. 태연자약한 듯했지만 장제스는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 중국이 제외되는 것을 막을 방법을 궁리했다. 루스벨트와의 만남은 사양했지만 카이로 회담에는 꼭 참석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의가 끝난 그해 10월 28, 29일, 그리고 11월 1일, 루스벨트는 “스탈린은 참가하지 않기로 했으니 미·영·중 3국 정상회의를 열자”고 연거푸 세 번이나 제안했다. 스탈린이 장제스가 참가하는 회의에는 불참한다는 뜻을 루스벨트에게 보내온 다음이었다. 11월 2일 장제스는 ‘정식으로’ 회의에 참가한다는 뜻을 표명했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측근이자 육군장관인 패트릭 제이 헐리(Patrick Jay Hurley)를 사적특사로 임명해 충칭으로 보냈다.

    11월 11일 장제스를 만난 헐리는 “카이로 회담에서 대통령은 동아시아 현안에 대한 중국과 영국 정부의 정책과 방침을 듣고 싶어 한다. 장 위원장님과는 허심탄회하게 군사 정치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고 싶어 한다”며 루스벨트의 뜻을 전달했다. 그 즉시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초안이 마무리된 것은 11월 14일이었다.

    ‘군사위원회 참사실로부터 장 위원장에게’와 ‘카이로 회의에서 우리나라가 제기해야 할 문제에 관한 초안’이란 제목이 붙은 이 문서를 보면 ‘갑) 군사전략에 관한 제안’ ‘을) 극동정치에 관한 제안’ 순으로 돼 있는데, 을의 제2조항이 ‘전후 조선의 독립’으로 돼 있었다.

    장제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루스벨트, 처칠과의 회담에서는 애써 무엇을 요구하려는 정신 상태로 임해서는 안 된다. 허심탄회하게 군사, 정치, 경제문제에 관해 의견 교환만 하고 추호도 득실은 따지지 않기로 하자.’(11월 17일자)

    전후 일본의 천왕제 보존해주자

    카이로 회담은 장제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중국은 동맹국의 일원으로 미·영·소와 함께 악의 축과 싸워 왔지만 카이로 회담이 열리기 전까지 그는 그에 상응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1943년 1월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열린 회의에 스탈린은 초청을 받았으나 그는 초대받지 못했다. 그리고 10개월이 지난 지금 세계 4대국 정상의 일원으로 카이로 회담에 참석해 숙적 일본의 운명을 결정하게 됐으니 감개가 무량했던 것 같다.

    “전후 일본의 처리 문제와 일본에 대한 손해배상 문제는 영·미가 제기하도록 하자. 먼저 (이 문제를) 꺼내지 말자. 우리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세계대전에 추호의 사심도 없다는 것을 (영·미가) 알도록 하여,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만들어야 한다.”(11월 17일)

    장제스가 조선의 완전 독립을 주장한 것은 김구 등의 요청 때문만이 아니라 중국의 대범함을 보여줘, 영·미 등 서구 나라가 아시아인을 존경하도록 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후 일본 처리 문제를 놓고 루스벨트가 일본의 국체(國體)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묻자, 장제스는 천왕제를 보존하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대답하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만 공문서관에 보관된 카이로 회담일지에는 대표단이 충칭을 출발한 시각은 1943년 11월 18일로 돼 있다. 일행은 앙골라 카라치에 들러 이틀밤을 보낸 다음, 21일 오전 7시가 지나 카이로 교외의 페인필드(Payne Field)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미 육군 항공대 사열관인 클레어 리 세놀트(Claire Lee Chennault)장군이 마중 나와 있었다. 일행은 카이로 시를 가로질러 나일 강 서안 15km에 있는 미나호텔에 행장을 풀었다. 호텔은 대회 측이 배치한 보병 1개 대대와 헌병1개 소대, 사복 경찰 7명이 지켰다. 이는 자존심 강한 장제스에 대한 배려였다. 미나호텔에서의 첫날을 장제스는 이렇게 적었다.

    ‘호텔정원 소나무 밑에 호젓이 앉아 사색에 들어간다. 이번 회담에서 제기할 문제와 기록을 검토했다. 오후에 나무 밑에 앉아서 군사 경제 외교 문제를 검토하는데 갑자기 람프센이 정원으로 들어와 악수를 청하며 처칠 총리가 이미 (카이로에) 도착했다고 한다. (중략) 6시 30분 처칠이 묵은 숙소를 방문해 30분가량 얘기를 나누었는데 대화는 잘되는 편이었다. 만나기 전에 상상했던 것보다는 좀 더 좋게 보였다.’(11월 21일)

    날이 선 처칠과의 대화

    다음 날 처칠이 장제스 숙소를 방문하는데 그때의 정경을 장제스는 이렇게 적었다. ‘처칠이 와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칠은 주로 부인(쑹메이링)과 담소했다. 처칠이 부인에게 “부인께서는 저를 굉장히 나쁜 노인으로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 틀림없을 것 같아요”라고 하자, 쑹메이링이 대꾸하기를 “그럼 각하는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라고 했다. 처질이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쑹메이링은 “그럼 됐네요”라고 했다.’(11월 22일)

    장제스는 처음부터 처칠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티베트 문제는 물론이고 일본이 점령한 만주에 대해서도 처칠은 중국의 권익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지 처리에서도 처칠은 약소민족의 고충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장제스는 느꼈다.

    루스벨트는 11월 22일 가장 늦게 도착했다. 그날 저녁 일기에 장제스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검토해야 할 제안들. 1) 영·미와의 회담 요지를 연구(중략). 회담 목적. 갑)해군과 육군의 미얀마 동시공격 필요성. 을)미얀마에서의 이번 반격(중략). 정)전후 조선의 독립’(11월 22일 월요일 ‘금주 예정 업무과목’에서).

    회담를 하루 앞두고 마지막으로 의제를 꼼꼼히 점검한 것인데, 역시 조선 독립 조항을 빼놓지 않았다.

    11월 23일 시작된 카이로 회담의 1차 목적은 대(對)일본 작전과 전후 처리였기 때문에 참가자들 모두 군복차림을 했다.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대표단은 쑹메이링을 포함해 19명이었다. 정치 관련 업무를 담당한 왕충후이(王寵惠) 국방위원회 비서장, 군사 문제를 맡은 쌍쩐(商震) 등 6명, 기록을 담당한 위궈화(兪國華)와 경호와 서무 담당이 그 구성원이었다. 쑹 부인은 장제스의 신변을 보살피고 통역을 맡았다.

    회담장에는 적군이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장군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주목을 받은 이는 쑹 부인이었다. 원숙한 몸매가 드러나는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쑹 부인이 우아한 자태로 회의장을 오갈 때마다 살짝살짝 드러나는 흰 다리가 장군들의 주의를 끌었다.

    회담 첫날 일기에 장제스는 회담장에서 일어난 일들은 적지 않고, 회담가 끝난 다음 루스벨트와 만나 나눈 얘기를 적어놓았다. ‘(오후) 7시 반 루스벨트 대통령이 마련한 연회에서 밤 11시까지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할 얘기가 끊이질 않았다. 하여 다음 날 다시 만나기로 했다.

    오늘 저녁 나눈 얘기를 정리하면 ①일본의 미래에 있어서의 국체 문제. ②국제 공산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하여. ③영토 문제, 즉 동북 4성(당시 중국 동북은 3성이 아니라 4성으로 돼 있었다)과 대만, 펑후(澎湖) 열도의 중국 반환 문제 ④일본의 중국에 대한 배상 문제 (중략) ⑦ 조선의 독립 문제. 나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내 주장을 꼭 지지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11월 23일)

    이외에도 그는 세 가지를 더 적어놓았다. 일본이 항복한 다음 일본 본토를 이룬 3개 섬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의 문제에 장제스는 미국이 주체가 되고 중국이 협력하는 방식이 좋겠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루스벨트는 강력하게 중국이 주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쓴 다음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데에는 필시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나는 확실한 대답을 피했다. 오늘 저녁에 나눈 얘기는 이런 것들뿐이었다’라고 적어놓았다.(11월 23일)

    이날 일기는 보통 때와 달리 길게 적어 놓았다. 23일 저녁 회담은 정식으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회담에 동참했던 왕충후이가 회담이 끝난 후 기록을 만들어 남겨 두었다. 훗날 미국 공문서관에 보관하게 된 ‘카이로 회담록(The Conferences at Cairo and Tehran)’은 왕충후이가 남겨 놓은 기록을 영어로 옮긴 것이다.

    속 좁고, 교활하고, 이기적이고…

    카이로 회의 기간에 장제스는 루스벨트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지만 처칠과는 잡담 정도의 대화만 주고받았다. 장제스는 처칠을 전형적인 식민지주의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일기에서 처칠을 ‘따분한 조크를 쉴 새 없이 지껄이고 입이 가벼우며 오만하고 이기적인, 약소민족에게는 고압적인 식민지주의자’(11월 24일)로 평가해놓았다.

    회의 내용을 최종 검토하는 단계에서 장제스와 처칠은 여러 번 충돌했다. 11월 24일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 대표가 루스벨트 대통령이 작성한 성명문 초안을 가지고 와 쑹메이링에게 건네며 내 의견을 들려달라고 했다. 나는 초안에 들어 있는 모든 사항이 어제 저녁 내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기한 요지 그대로임을 알고 마음속으로 루스벨트가 중국에 대해 성심성의로 임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저녁에 처칠이 베푼 연회에 참가했다. 처칠은 부인한테 농담을 건넸고 부인은 담담히 가볍게 받아주고 있었다.’(11월 24일)

    이튿날 일기에서 장제스는 처칠을 이렇게 묘사해놓았다. ‘놈(처칠)은 전형적인 영국식 앵글로 색슨 인이다. 사상이나 정신적 기백, 인격에 이르기까지 루스벨트와는 동렬에 놓고 논할 수 없는 인간이다. 속이 좁고(狹隘), 교활(浮猾)하며, 이기적이고(自私), 완고(頑固)하다는 여덟 개의 한자로 딱 떨어지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11월 25일)

    ‘어제 사진을 찍고 손님들이 흩어진 뒤 루스벨트 숙소에 남아 어제 내가 제기했던 정치 문제들을 꺼내 얘기하고 이것들은 내 개인적인 의견이니 참고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내 의견은 이것뿐이라고 하는 말을 듣는 루스벨트의 표정은 진지했고 성의에 가득 차 있었다. 오후 4시에 다시 루스벨트를 찾아가 내가 제기한 성명문 요지(중략)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끝날 무렵 루스벨트는 한숨을 내쉬며 “지금 제일 큰 문제는 처칠이고 처칠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말했다.’(11월 26일)

    카이로 선언문이 확정된 것은 26일 오후 4시 30분이 좀 지나서였다.

    ‘이날 나는 루스벨트와 4시 30분까지 얘기를 나누고 함께 회담장으로 갔다. 회의장에는 처칠과 영국 외무장관인 앤서니 이든, 소련 주재 미국대사인 윌리엄 해리먼, 왕충후이 등이 있었다. (중략) 그들은 선언문 초안을 토의해 수정한 다음 그 자리에서 이든이 낭독했다. 나와 루스벨트 처칠이 그 문안에 동의해 (성명문 문안을) 최종 결정지었다. 남은 일은 루스벨트와 처칠이 테헤란에서 스탈린을 만나 기일 내에 이 성명을 공포하는 것이었다. 그에 나도 동의했다.’(11월 26일)

    성공에 만족한 장제스

    다음 날 밤 11시 장제스는 카이로를 떠났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29일 일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동북 3성(여기에서는 4성이 아닌 3성으로 적어놓았다)과 타이완, 펑후 열도를 잃어버린 지 50년(펑후 열도)에서 12년(동북3성)이 넘는다. 잃어버린 영토를 영미 공동성명에서 그들의 동의를 얻어 돌려받기로 했고, 전후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했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바라고 바라던 일이던가. 이를 3국 성명문에 끼워 넣을 수 있었으니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역사에는 전례가 없던 일이 아니더냐. 이는 외교적 성공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11월 29일)

    이날 장제스는 흥분을 감출 수 없는지 드물게도 일기의 문법이 좀 흐트러져 있었다. 11월의 반성록에서도 카이로 회담에 대해 적어놓았다.

    ‘카이로 선언문(三國公報)을 이끌어 낸 경과에 대해서는 기록을 보충할 필요가 있겠다. 성명 문안에 대해 토의하고 있을 때 영국은 조선 독립 문제를 성명문에 넣어서는 안 된다며 완고히 주장했다. 동북(만주)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이 만주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지만, (영국은) 만주를 중국에 반환하는 문제에 한해서는 한사코 말하려 하지 않으려 했다. 우리 대표가 미국의 협조를 얻은 덕분에 이런 내용이 선언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11월 30일)

    카이로 선언은 그 후 국제공약으로 이행됐다. 1945년 7월 26일자로 발표한 ‘포츠담 선언’ 제8항에서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그대로 이행된다’고 명기한 것이다. 덕분에 한국은 독립할 수 있었다.

    장제스의 공(功)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어떤 주장을 폈으며 영·미 정상과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느냐는 기록은 그의 일기 외에도 미국 공문서관에 있는 ‘카이로 회담록’이 있다. 그러나 이 회담록은 왕충후이 기록을 영어로 옮긴 것이라 중국어 기록과는 뉘앙스 차이가 있다. 영어로 된 이 회담록 편집자는 ‘카이로 회담록’ 서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 회담에 관한 미국 정부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양측(미·영) 모두 준비하지 않았던 듯하다. 1956년 편집자가 (대만 측에) 조회한 결과 미국 주재 중국대사인 둥셴광 박사가 중화민국의 공문서관에 이 회담에 관한 중국어 기록이 존재한다고 확인해주었다.[‘중화민국 외교사료 회편(中華民國外交史料匯編)’제11권]

    왕충후이 기록에는 장제스가 일기에서 언급한 내용이 그대로 나오는데 미국 공문서관의 ‘카이로 회담록’보다 더 상세하다. 예를 들어 일본의 천왕 존폐 문제에 관해 장제스는 “일본 인민이 자주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로 인해 국제관계에 갈등이 일어나거나 후유증을 남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전쟁에서 진 나라의 국체를 결정하는 데 관여해서는 안 된다. 일본 천왕제는 일본 민족의 정신 구조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를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와 같은 동양 사람인 중국 사람이야말로 그 점을 알고 있다”고 장제스는 주장했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장제스가 민족자결권을 중히 여겼고, 동양 민족의 상황에 맞게 전후 처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카이로 회담이 있기 전까지 미국과 영국은 조선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 흔적이 없다. 그러한 미국과 영국이 동양의 문제에 관해서는 장제스의 의견을 듣고, 장제스의 주장을 수용하게 한 것은 장제스의 공(功)이다. 이 회의에서 조선 독립을 의제로 집어넣어 조선의 완전 독립을 주장해 그 틀을 마련한 이는 장제스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처칠 반대 무릅쓰고 ‘조선 독립’ 문안 집어넣어
    이상철 교수는 흥미로운 이력을 가졌다. 1930년대 경주에 살던 그의 아버지가 만주로 건너감으로써 1959년 중국 헤이룽장성 자무스(佳木斯)에서 출생했다. 이상철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족, 재중동포가 된 그는 베이징의 중앙민족(中央民族)대학 소수민족언어문학과를 졸업한 후 큰 전환을 맞았다. 1987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치(上智)대 대학원에 들어간 것. 1994년 매스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98년 ‘다케야먀 소데쓰(竹山相哲)’로 개명해 일본에 귀화하고 류코쿠(龍谷)대학 사회학부 매스컴 담당 교수가 됐다. 이어 옌지(延吉) 출신의 재중동포와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대학교수가 된 후 그는 ‘李相哲’을 일어로 읽은 ‘리 소데쓰’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 영어를 할 수 있는 어학 실력에 중국과 남북한, 일본 그리고 서방세계도 살펴볼 수 있는 안목을 보태 독특한 저술에 나섰다. 국제적인 시각에서 한반도 문제를 일본에 알리는 전문가가 된 것. 이는 전공인 매스컴학에 이은 새로운 영역 도전이었다. ‘분케이주(文藝春秋)’와 ‘신초(新潮)’ 등 일본의 대표적인 월간지에 한반도 문제를 논하는 글을 기고하고, ‘김정일과 김정은의 정체’ ‘동아시아의 아이덴티티’ ‘박근혜의 도전’ ‘만주에서의 일본인 경영 신문 역사’ 등 단행본을 내놓았다. 때마침 일본에서는 한류(韓流)에 이어 한국을 거부하는 혐한류(嫌韓流)가 불었기에 그의 저작은 상당한 관심과 인기를 끌어, 거꾸로 그의 저작이 한국에서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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