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도덕적 문화국가’ 전통 이어 세계평화 선도하자

광복 60년, 세계사 속의 한반도를 생각한다

  •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 ojjung@snu.ac.kr

    입력2004-12-24 1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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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한국은 광복 60주년을 맞는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이다. 그렇게 열망하던 독립을 얻었으나
    • 그 동안 우리가 이뤄낸 건 무엇인가. 국론분열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지금, ‘대한민국호(號)’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침략과 약탈로 얼룩진 야만의 20세기를 청산하는 처방은 다름아닌 과거의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
    ‘도덕적 문화국가’ 전통 이어 세계평화 선도하자

    2005년으로 8·15 광복(사진) 60주년을 맞았다. 국론분열로 혼란스러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2005년 우리나라는 광복 60주년을 맞았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 환갑이 된 이 시점에 그렇게 열망하던 독립을 얻었으나 우리가 이뤄낸 것은 무엇인지 새삼 돌아본다. 이 혼란의 와중에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기본방향부터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서 우리의 현실을 타개할 방향과 방법을 정리하여 청사진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19세기 말부터 1세기 동안 진행된 우리 사회의 근대화는 ‘서구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도 일제 강점에 의한 타율적인 서구화로 시작됐다는 것이 우리가 겪은 근대화의 특수성이다. 이 서구화가 우리 사회에 과연 얼마만한 순기능과 역기능을 초래했는지는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기존 전통문화라는 거름종이에 걸러내어 우수하다고 인정될 경우에 한해 주체적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했다. 전환기마다 개방과 자기보존에 대해 고민하면서 우수한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고유문화의 한계성을 탈피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의 상황은 전 시대의 문화보강작업과는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지각변동이었다. 유교문화권에서 자급자족하는 안정적인 농경사회를 이룬 조선사회는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의 직업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물적 기초를 최고의 가치로 삼은 상·공·농·사의 직업분화로 구성된 서구자본주의는 충격이었다.

    더구나 전통적으로 약탈과 침략을 일삼아 ‘야만(野蠻)’으로 간주되던 일본이 서구화를 통해 ‘선진국’이 되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으로 진출하면서 강요한 근대화는 일본화와 맞물리는 중층구조로 전개됐고, 결국 일제의 강점으로 귀결됐다.

    “신발과 모자가 거꾸로 놓였다”



    당시의 제국주의가 군사·정치적 제국주의라면 현재 진행되는 세계화는 경제·문화적인 것이라는 차이가 있으나 거대구도로 통합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화는 대국의 논리다.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하나의 통합단위로 만들어가는 제국주의적 거대구조에서 주도국인 대국의 언어는 공용어가 되고 대국의 문물이 보편적 기준이 될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결국 약소국의 처지에서 보면 세계화는 현실적응을 위한 선택이자 예속화를 의미한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학교제도가 변경되자 당시 어느 지식인은 기술학과 외국어학이 성균관의 상위에 놓임으로써 신발과 모자가 거꾸로 놓였다고 갈파했다. 기술이 근대의 총아인 과학문명의 자식이고 외국어는 외국문화 수입의 도구일진대 기술과 어학은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시무(時務)였을 것이다. 그래서 인문정신과 인간교육을 우선하던 전통 교육기관 성균관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로 치부되어 하위기관으로 전락했다.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그 결과는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 잘 보여주고 있다. 민족 자부심을 상실하고 정체성이 해체된 상태에서 물신을 숭배하면서 비인간화한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에 몰리면서 겨우 생존문제를 해결하여 가난과 열등감에서 벗어났다고 착각할 즈음, 우리 사회를 강타한 IMF 체제는 우리의 허장성세(虛張聲勢)를 생생하게 증언해주었다.

    우리의 관심사는 21세기에도 이러한 시행착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 제국주의 시대에 열강이 짜놓은 틀에서 남의 뒤를 숨 가쁘게 따라가며 결국은 혼란으로 귀결된 20세기의 오류를 극복해야 한다.

    그 극복의 방향은 전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눈먼 과학기술문명에 등불이 될 인문적 가치가 우리 전통문화에 있기 때문이다. 침략과 약탈로 얼룩진 야만의 20세기를 청산할 처방을 평화공존의 문화가치를 추구하던 전통에서 이끌어낼 수 있을 듯하다.

    예치(禮治)가 주는 교훈

    군사대국인 청나라보다 선진이라 생각하고 당시의 세계인 동아시아의 문화중심국임을 자부하던 조선 후기 역사에서 21세기를 살아갈 지혜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남을 침략하거나 약탈한 전과가 없는 전력도 이러한 방향성을 제고하는 선도자 역할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겠다는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진적 자세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그 실마리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을 겪은 후 조선사회가 문화국가로 자기정체성을 세워가는 과정에서 찾아보자. 당시 조선사회는 왜란으로 와해된 하부구조를 복구하고 호란으로 상처받은 자부심을 회복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떠안고 있었다. 아울러 약탈과 침략을 일삼아 오랑캐로 여기던 북방족의 청나라가 군사대국이 되어 중원(中原)의 주인이 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사회는 평화적인 국제질서를 무너뜨린 청나라를 쳐서 복수설욕(復讐雪辱)하자는 북벌대의(北伐大義)를 외치며 국민단합을 꾀하고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예를 세워 사회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예치(禮治)를 내치의 목표로 설정하고 문화국가를 표방했다.

    강력한 군사대국 청나라에 대해서는 무법자라는 인식에 따라 그에 심복하지 않고 이미 멸망한 명나라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파병하여 도와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우며 불망지의(不忘之意, 은혜를 잊지 못하는 뜻)를 다졌다. 국가간에도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유교문화권의 공동선에 입각하여 조선의 입지를 다지려는 의도였다.

    두 번의 전란으로 무너진 사회기강과 질서를 세우기 위해 예치를 주요 현안으로 삼았다. 예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애경(愛敬)을 극진히 여기는 준칙이다. 사랑과 존경이 없으면 그 사회가 비인간화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인식의 소산이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인간관계의 회복이 급선무이던 조선사회에서 무너진 사회정의를 일으켜 세우고 질서를 회복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문화국가의 정통성 자부

    그로부터 환갑이 되는 1704년 갑신년에 조선 후기 사회는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문화국가로 우뚝 서서 명나라를 계승하는 동아시아의 문화중심국가가 바로 조선이라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를 선포하고 그 구체적 장치로서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왜란 때 도와준 신종 황제의 제사를 지냈다. 대보단은 후에 마지막 황제 의종과 명의 건국시조인 태조까지 합하여 삼황(三皇)을 함께 제사지내게끔 보완됐다. 대보단은 비록 청의 무력에 굴복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조선이 최고라는 문화자존의식과 함께 유교문화의 적통(嫡統) 계승자라는 의식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은 또한 문화국가의 정통성이 자신에 있다는 자부심을 키웠다. 무력으로 평화적 국제질서를 교란한 일본이나 명을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는 침략과 약탈을 일삼던 야만이므로 동아시아의 리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사회의 자부심 회복과 정체성 확립과 관련되며 이후 조선은 문화대국이라는 자부심으로 조선 고유의 문화 창달에 성공했다. 숙종 후반기와 영조·정조대인 18세기는 진경문화로 알려진 조선의 문예부흥기였다.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군사대국 청에 대응하기 위해 문화국가로서의 자부심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조선 후기, 우리 조상들은 강력한 군사대국인 청나라를 앞에 두고도 불굴의 자세로 자신의 방향성을 세우고 자부심을 회복했으며 문화대국의 의지를 키웠다. 그 결과 조선 후기 사회는 문화적 도덕국가로 거듭나고 200년 넘게 평화기를 누렸다. 그러한 평화는 조선이 자주국방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내수외양(內修外攘, 내치를 닦아 외적을 물리친다)의 기치 아래 국력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각기 내치에 주력하던 국제정세에도 힘입은 것이었다.

    19세기 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이르러 우리는 그때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직면했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어 광무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았고 서구제국주의의 팽창과 동양진출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려 영세중립국의 꿈은 무산되고, 마침내 전통적으로 힘의 논리에 익숙하여 재빨리 서양제국주의에 편승한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다. 결국 평화공존도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교훈을 뼈아프게 되새겨야 했던 것이다.

    근대적 민족주의 함정 경계해야

    앞으로 다가오는 세상에서는 지난 세기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역사의 창(窓)으로 보면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의 진행에 따라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무리 변하여도 이 세상에는 변치 않는 가치나 원칙이 있다. 예컨대 진(眞), 선(善), 미(美)와 같은 가치나 효도의 의미는 시간이 아무리 경과해도 변치 않는 진리일 터이고 인류애나 애국심도 변치 않는 가치라고 생각된다.

    지나간 세기에 이 두 가치는 상반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애국심은 민족의식의 발로요, 민족의식은 민족이기주의의 표출에 불과하다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따라서 애국심에만 무게중심을 두면 보편적인 인류애를 확대하는 저해요인이 된다고 이해됐다. 일본의 황국신민의식이나 독일의 나치즘같이 세계를 전란의 소용돌이에 밀어넣은 종족우월주의는 저급한 민족이기주의이며 제국주의의 원흉이라는 인식도 이러한 사고의 기저에 깔려 있다.

    세계의 여러 민족과 국가는 나름대로 민족적 특성과 고유 문화를 갖고 있으므로 각자의 우수문화를 계발 발전시켜 세계문화에 기여하도록 하되, 그 고유성과 정체성을 지키게끔 배려할 때 세계문화는 더욱 다양해지고 풍부해질 수 있다. 그러한 기초가 다져질 때 세계의 모든 민족은 더불어 살아가고 함께 번영할 것이다. 세계주의나 세계화의 논리가 대국이나 강국의 목소리에 불과하다는 한계성을 경각(警覺)하되 민족이기주의와 민족간 갈등과 투쟁이라는 근대적 민족주의의 함정에 침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원류는 우리의 전통시대, 아득한 옛날에 세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원대한 목표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지금과 가장 근접한 전통시대인 조선 후기 사회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그 시대에 세계의 문화중심국임을 자부하고 동방예의지국임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데서 분명해진다. 개개인 사이에 의리와 예의를 지켜야 하듯, 국가간에도 의리와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당시의 시대정신은 투쟁이 아니라 상호존중의식에서 출발했다.

    ‘도덕적 문화국가’ 전통 이어 세계평화 선도하자

    국민 대통합을 위해서는 국론분열의 다툼부터 종식시켜야 한다. 사진은 2004년 12월6일, 국가보안법 폐지안 및 형법 보완안의 상정을 둘러싸고 몸싸움을 벌이는 의원들로 난장판이 된 국회.

    예의를 갖고 상호간 신뢰를 기초로 각자의 애국심을 키우되 그것이 저급한 종족우월주의나 배타적인 애국심으로 전락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를 겨냥한 것이다. 그 결과 애국심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확대된 외연은 주변 국가나 민족에 대한 존중과 애경으로 이어져 사해동포(四海同胞) 의식이 표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향토애를 갖고 자기 고장의 문화와 고적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넓혀 애국심을 발휘하여 국가 발전에 기여하듯,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만이 세계 인류의 보편적 발전과 번영에 관심을 갖고 그 문화의 창달에 기여할 수 있다. 애국심과 인류애는 대극적(對極的)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안과 밖 같은 것이다.

    애국심과 인류애는 동전의 양면

    이는 사물에 대한 상보적인 이해에서 출발한다. 흑백논리와 경쟁과 투쟁, 적자생존이라는 정글의 논리가 판치고 개인관계는 오로지 이해관계만이, 국가간에도 이해득실만이 유일한 잣대가 되었던 지난 세기의 세계관을 불식하여 상호 애경의 세계관을 세우고 새로운 21세기를 설계하는 데 있어 남을 침략한 전과가 없는 한국인은 주역을 담당할 뚜렷한 명분을 갖고 있다.

    다가오는 미래에 인류의 각성과 인류애의 제고에 있어 한국인이 맡아 할 일은 지대할 것이다. 대국의 세계화 논리에 현혹돼서도, 편협한 종족우월주의나 민족이기주의에 빠져서도 안 될 것이다. 그야말로 균형감각을 갖고 상호존중과 상호협력을 이끌어내 애국심을 기초로 한 인류애를 제고하는 역할에 바람직한 21세기 한국인상(像)의 밑그림이 있다. 이러한 한국인상은 우리 역사에서 계속돼온 원형적 한국인상의 재현이므로 더욱 실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우선 시급한 일은 왜곡된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이를 바탕으로 근대 이후 단절된 전통문화와 맥락을 잇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과 맞닿아 있으며 민족공동체를 새롭게 인식하는 데 기여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남북이 한 뿌리임을 재확인하여 통일의 공감대를 넓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러한 기초공사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한 방향성을 세우고 설계하는 일이다. 21세기는 인류가 지나온 제국주의 시대, 부국강병 우선주의, 적자생존 등 투쟁 논리에서 벗어나고자 평화를 모색하고 공존을 도모할 것이 틀림없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망국의 뼈아픈 경험에 분단의 아픔까지 품고 있으며 아직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민족에게 남을 약탈하고 침략한 전과가 없다는 명분은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평화공존 시대를 여는 세계질서 재편기에 그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저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한 질서에서 우리는 동북아 경제중심이라는 가치로부터 한 걸음 전진하여 동북아 평화·문화 중심으로 거듭나는 날을 맞을 수 있다. 3세기 전에 조선이 동아시아 문화중심국으로 우뚝 섰듯이 21세기 대한민국은 도덕적 문화국가로서 세계평화를 선도해야 한다.

    단절된 전통문화 맥 잇기부터

    외환위기 당시 한말의 국채보상운동을 방불케 하는 금 모으기, 다이아몬드 모으기 운동이 일어나고 전국민의 거국적인 참여로 확실한 결실을 얻은 것도 우리 국민의 애국심과 저력을 보여주는 징표다. 이는 우리가 단일민족으로 단단한 응집력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고난의 역사에서 터득한 구심력이 단결심과 애국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2002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국민단합의 경험을 살려 국민의 힘을 하나로 묶는 뜻을 세우고 희망을 제시하는 일이 중요하다. 국민통합을 위한 대화합의 제의(祭儀)로써 국론분열의 다툼을 대승적 차원에서 종식해야 할 것이다. 적대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대립적 가치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모든 관계를 상호보완 관계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사물을 인식하는 차원에도 균형감각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과거사 청산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 그 과거사는 바로 일제강점기 당시의 처신 문제와 6·25전쟁으로 인한 이념갈등 문제다. 이념과 좌우대립의 상처는 현재의 남북분단체제와 맞물려 더욱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과거사 청산은 학자에게 맡겨 정밀한 자료조사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일이고, 국보법 폐지나 기타 법안도 국민 대통합 차원에서 적절한 시기에 다시 논의해도 늦지 않다. 더구나 정쟁(政爭)의 도구라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강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개인에게 뜻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듯이 국가도 뜻이 분명해야 한다. 이상(理想)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상을 향한 청사진 역시 필요하다. 국제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려면 국가의 방향성이 분명해야 한다. 그 방향성을 국민에게 설득하고 꿈과 희망을 심어줘야 한다. 그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국민 대통합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올 2005년은 어려울 때 더욱 강한 우리 민족의 강점을 재확인할 절호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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