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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20년

1987년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 의원의 ‘그해 6월’

전두환, 직선제 수용 건의에 “노태우를 설득하라, 특명이다”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1987년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 의원의 ‘그해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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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 의원의 ‘그해 6월’

1987년 6월29일 기자들에게 6·29선언을 발표하는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는 다릅니다. 결국 국민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습니까. 박 대통령은 삼선개헌으로 집권을 연장했지만 전 대통령은 그럴 마음이 애초에 없었죠. 국민은 믿지 않았지만…. 대통령은 이런 불신을 늘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어차피 대통령은 물려줘야 하고 그렇게 하기로 한 이상 국민의 요구대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선에서 이기면 더없이 좋고, 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물론 그렇게 권력을 인계한 뒤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지만.”

역사 물꼬 튼 ‘민심동향 보고’

▼ 직선제 수용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 같은데요.

“대통령은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시위에 대한) 해결방법이 여럿 있었죠. 비록 비극으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평화롭게 수습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어요. 그때 어떤 방법을 선택하는가는 전적으로 청와대와 민정당의 판단에 달려 있었습니다. 역사는 늘 선택의 연속 아닙니까. 국민의 요구를 정책적 대안으로 선택하는 용기, 그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 ‘여러 방법’에는 무력진압도 포함됐습니까.



“계엄령, 쿠데타, 국민투표안, 직선제 총선 연계안 등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뒤에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하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1987년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김 의원은 6월민주항쟁의 발단을 1986년 전두환 대통령의 개헌논의 허용에서 찾았다. 1985년 중순부터 시작된 개헌논의는 김대중씨 가택연금, 정치활동 중단 등 정치관련 금지법의 서슬이 퍼런 가운데 재야단체와 야당 일각을 중심으로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1986년 1월 개헌논의가 합법화하자 직선제 국민 서명운동이 벌어지는 등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박철언 전 의원은 회고록에서 ‘86년 말 전두환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통해 국회를 해산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으나 이 또한 확인되지 않았다.

“1987년 6월 ‘소요’는 1986년부터 예고됐습니다. 개헌논의에 불이 붙은 게 그 때니까요. 1986년 1월14일 민정수석으로 임명됐고 그해 4월24일 대통령에게 처음으로 민심(民心) 동향보고를 올렸습니다. 그 무렵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차 유럽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야당에서 개헌논의를 시작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었습니다. 저는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현장에 몰래 들어갔습니다. 대전 실내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집회에는 당시 야당 총재이던 이민우씨가 나왔고 김영삼씨가 고문으로 참가했죠. 2만여 명이 모인 거대 집회였습니다. 개헌과 관련한 집회나 논의가 일절 금지돼 있을 때였죠. 전 대통령과 여당인 민정당은 내각제를 추진하려 했고, 야당과 재야에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습니다. 대통령에게 1시간에 걸쳐 특별 동향보고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 대통령은 당시 민정수석이 야당의 집회에 몰래 간 것에 놀라 ‘이거 큰 사건이군, 잡히면 큰일인데’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때 와이프와 함께 갔는데, 30분 만에 못 나오면 경찰에 신고하라 하고 들어갔죠.”

▼ 동향보고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군중집회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렇게 계속 시간을 끌면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아예 대통령 직선제 개헌논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대통령이 평소 같으면 ‘네가 뭘 알아’라고 나무라고 끝냈을 터인데 민정수석이 집회 현장을 다녀온 것에 쇼크를 받았는지 ‘그래 알았다’고 했습니다. 며칠 후인 4월30일 개헌논의를 공식화하는 담화가 발표됐지요. 현장 상황을 캐치한 제 판단을 대통령이 믿은 겁니다.”

박종철 사건, 청와대도 속았다?

▼ 그로부터 1년 후에 4·13 호헌 조치가 나왔는데요.

“개헌논의 허용 이후 격렬한 싸움이 계속됐죠. 정부와 여당은 내각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야당과 재야에서는 직선제를 하자고 연일 집회를 하니 타협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1년의 시간만 흘려보낸 것이죠. 대통령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4·13 호헌 조치 발표는 당시 정무1수석이던 김윤환씨 소관이었습니다. 저는 민심 동향보고만 충실하게 했습니다.

발표 이전에 내부적으로 개헌논의를 했지만 도저히 결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1987년 3월14일 개헌논의 중단을 발표하고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곧이어 4·13 호헌 조치가 나왔고요. 결과적으로 야당과 재야, 학생들의 대(對)정부 투쟁에 불을 지피게 됐지만 청와대로서는 1987년 말 대통령선거 일정이 있으니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후보 지명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6월 초 민정당의 건의를 대통령이 수렴하는 식으로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후보로 지명하려는 계획을 짜놓고 있었습니다. 후보 지명 전당대회가 6월10일로 잡혀 있었는데, 그 무렵 공교롭게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죠. 이 두 사건이 합쳐지면서 정국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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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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