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호

박근혜 X파일 & 히든카드

최태민 수사기록 / 전두환의 도움 / 재산 변동 / DJ 연대설

  •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7-06-08 10: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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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규 “최태민은 사이비 목사이고 자칭 태자마마…”
    • 중앙정보부 수사기록 “최태민 부정행위 44건”
    • 합수부 이학봉 “비리 수사 뒤 최태민 강원도로 쫓아냈다”
    • 신기수 전 경남기업 회장 “전두환 지시로 박근혜 집 지어줬다”
    • 신당동 집과 성북동 집 사이 의문의 주소
    • “구심점 없는 여권…호남 정치권과 박근혜 연대설”
    박근혜 X파일 & 히든카드
    한나라당은 4·15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했다. 이명박(李明博)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朴槿惠) 전 한나라당 대표의 대립, 공천 실패가 원인으로 꼽혔다. 이후에도 이명박과 박근혜 간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대선후보 경선 방식’을 놓고선 파국으로 치닫는 듯했다. 당이 쪼개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그러나 이명박은 5월14일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의 중재안 중 자신에게 유리한 조항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박근혜가 이 제안을 수용하면서 4개월을 끌어온 ‘경선 룰 공방’은 일단락됐다.

    양측의 합의 중 주목되는 대목은 경선 시점이다. 한나라당 경선은 8월에 실시된다. 대선 4개월 전이다. 한나라당으로선 두 가지가 불리하다. 첫째 한나라당 후보는 단독으로 오랫동안 상대진영으로부터 혹독한 공격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둘째 한나라당 후보 확정 뒤 범(汎)여권에서 대통합, 오픈프라이머리 등으로 선거 이슈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다.

    “네거티브 이겨내면 대선 승리”

    따라서 한나라당으로선 흠결이 적어 공격을 이겨낼 수 있는 후보, 비전 제시 능력이 뛰어나 반대진영의 단기적 선거 이벤트를 무력화할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최후의 대선 승리자는 한나라당이 이명박 박근혜 중 누구를 후보로 정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선두권인 이명박 박근혜 자질 검증은 한나라당만의 문제가 아닌, 전체 대선 결과와 직결되는 사안이다. 그러나 8월까지 두 주자의 면면을 따져보기엔 시간적으로 충분치 않다. 특히 ‘지지율 2위’ 박근혜의 ‘과거 이력’에 대한 실증적 검증은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

    4월30일 이명박과 싸우느라 정신없던 박근혜 진영에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범여권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돼온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대선출마 포기를 선언한 것이다. 박근혜 캠프에선 희색이 돌았다. 이정현 공보특보는 ‘박근혜 재평가’의 기회가 왔다고 해석했다.

    “범여권은 이로써 ‘후보 진공상태’에 빠졌다. 시간적으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가능성은 사라졌고 현재 거론되는 후보군은 역대 대선 중 최약체다. 박근혜 이명박 중 누가 본선에 나서더라도 출마 명분, 대중적 인기, 국정 수행 능력 면에서 우위에 설 수 있다. 한나라당으로선 단 한 가지, ‘네거티브 공세’만 이겨내면 된다. 경선에서 흠결 없는 한나라당 후보를 선출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대역전의 기반이 조성됐다.”

    최근 정치권에 박근혜 관련 CD가 돌았다. 이 CD는 총 181MB 분량으로, 1980~90년대 일간지, 잡지 기사 18건의 전문(全文)을 담은 PDP파일 18개가 들어있었다. 이들 기사는 모두 고(故) 최태민 목사(1994년 사망)의 비리의혹 및 박근혜와의 관련성을 강하게 암시하는 내용이다. 박근혜 측에선 ‘흑색선전물’이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한나라당의 한 국회의원은 2007년 5월 초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1970년대 후반 최태민을 조사했던 중앙정보부의 백광현 검사와 신모 수사관이 아직 생존해 있다. 신 수사관은 현 정권에서 잘나가고 있다. 박근혜가 한나라당 후보가 되면 ‘최태민 건 한방’에 한나라당은 큰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최태민, 최태민 하는데…”

    다른 한나라당 의원은 “박근혜 관련 의혹의 90%가 최태민이라고 한다. 최태민, 최태민 하는데 도대체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최태민은 ‘박근혜 CD’에 들어 있는 18건의 기사, 박근혜를 다룬 3~4권의 저서 등에 언급되어 있는데,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로는 그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이 때문에 최태민 관련 기사나 저서에선 그의 생년 등 기본적 정보도 들쑥날쑥하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수괴미수죄로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뒤 1980년 5월24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됐다. 재판과정에서 김재규 변호인은 ‘항소이유서’와 ‘항소이유 보충서’를 군법회의 측에 제출했는데, 이 두 서류에 992자(字) 분량으로 최태민 관련 내용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김재규 측은 10·26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거의 하나로 최태민을 거론했다.

    김재규 변호인 항소이유서의 최태민 관련 전문은 다음과 같다(원문은 한 문장으로 이어져 있으나 읽기에 편하도록 내용별로 행갈이를 했다).

    “피고인(김재규)은 1975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최태민이라는 자가 사이비 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 등의 비위사실이 있는데다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런 일을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박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그런 것까지 하냐?’ 하면서 반문하길래 피고인으로서는 처음에 대통령의 태도를 보고 놀랐으며,

    대통령은 큰딸인 박근혜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나 근혜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여 대통령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조사 후에 최태민이란 자를 총재직에서 물러나게는 했으나 그후 알고보니 근혜가 총재가 되고 그 배후에서 여전히 최태민이 여성봉사단을 조종하면서 이권개입을 하는 등 부당한 짓을 하는데도,

    박 대통령은 김 피고인의 ‘큰 영애도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손떼는 게 좋습니다. 회계장부도 똑똑히 하게 해야 합니다’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도 있어서,

    대통령 주변의 비위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고 또 대통령 자신 그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친국(親鞫)”

    이어 김재규 변호인은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최태민을 언급했다.

    “1.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된 큰 영애의 문제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최태민 관련 기록은 여기까지가 전부다. 항소이유서에도 최태민에 대한 인적사항 등 기본 정보가 언급돼 있지 않다. 또한 김재규가 주장하는 최태민의 부정행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없다. 기타 최태민에 대한 과거 기사나 저서 내용은 수사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박정희 정권 시절 정부 관계자 인터뷰이거나 출처불명의 주장 등이 대부분이어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런 가운데 ‘신동아’는 중앙정보부가 작성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최태민 관련 수사보고서인 ‘崔太敏 關聯 資料’(사진)를 최근 모처에서 입수했다. 이 보고서는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최태민의 출생, 성장배경, 경력, 박근혜를 만나게 된 과정, 구국여성봉사단 창설 이후의 부정행위 의혹, 여성 추문 등을 A4지 16장 분량으로 상세히 담고 있었다.

    보고서의 ‘1. 신원사항’에 따르면 최태민은 1912년 5월5일생(1979년 당시 67세)이며 원적은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서동34번지, 본적은 경남 양산군 웅상면 삼호리 532번지, 주소는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689-25번지로 돼있다.

    보고서가 소개하는 최태민의 특이사항은 그가 7개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의 이름은 최도원(崔道源)에서 이후 최상훈, 최봉수, 최퇴운, 공해남, 방민, 최태민으로 변천했으며 호적 이름의 개명도 최소 1번 이상이었다. 다음은 보고서 관련 내용이다.

    박근혜 X파일 & 히든카드

    고 최태민 구국봉사단 총재(위)와 ‘신동아’가 입수한 중앙정보부의 최태민 수사보고서.

    “O 使用 姓名

    崔道源 (선녀가 지었다는 아명)

    崔尙勳 (월남 후 개명, 경찰 육군 및 해병대 비공식문관 재직시 사용)

    崔峰壽 (부산 거주시)

    崔退雲 (법명, 77.3.9 이전 호적상 성명)

    孔亥南 (천주교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 시 사용)

    房 敏 (계시에 의해 개명하였다고 자칭)

    崔太敏 (75.4 대한구국선교단 총재 취임계기 개명. 77. 3.9이후 호적상 성명)”

    중정 보고서는 이어서 박근혜를 만나기 직전까지의 최태민의 이력을 자세히 기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최태민은 1927년 3월 황해도 재령보통학교를 최도원이라는 이름으로 졸업했다. 이어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황해도경 고등과장인 서포의 추천으로 ‘황해도경 순사’로 재직했다.

    “경찰, 승려, 교장, 목사…”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월남해 최상훈이라는 이름으로 강원도경 소속 경찰이 됐다. 이어 47년 3월 대전경찰서 경사, 47년 4월 인천경찰서 경위 (사찰주임)가 됐다가 49년6월, 50년 7월엔 각각 육군 제1사단 헌병대 비공식 문관, 해병대 비공식 문관으로 일한 것으로 되어 있다.

    6·25전쟁 때인 51년 3월 최태민은 군에서 나와 최봉수라는 이름으로 사단법인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부산)으로 활동했다. 54년 초 부인 김제복(63)과의 가정불화로 경남 동래군 금화사로 도피, 삭발해 최퇴운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됐다. 55년 그는 비인가 학교인 경남 양산군 개운중학교의 교장, 대한농민회 조사부 차장, 전국 불교청년회 부회장, 한국복지사회 건설회(임의단체) 회장이 됐다. 불교계에 인맥을 쌓은 것이 계기가 되어 63년 5월 당시 집권여당인 공화당의 중앙위원에 선임됐다.

    그러나 65년 1월 천일창고(주)를 운영하던 최태민은 같은 해 2월15일 서울지검에 의해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입건돼 약 4년간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69년부터는 천주교, 불교, 기독교를 결합한 종교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 해 초 천주교 중림성당에서 영세를 받았고 이어 71년 10월엔 서울 영등포구 방화동 592-7번지 호국사에서 불교, 기독교, 천주교를 복합하여 창업한 영세계의 교리인 ‘영혼합일법’을 주장했다. 또한 방민이라는 이름으로 독경 및 안찰기도를 했다고 한다.

    최태민은 74년 5월 서울 동대문구 제기2동 122-16 박모씨의 집에 전세로 들어와 ‘태자마마’를 자칭했으며, 74년 8월에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54-5 선 모씨 소유 빌딩 2층(36평)으로 이전해 동일한 행위를 했다고 보고서는 기록했다.

    보고서는 최태민이 박근혜를 처음으로 만난 시점은 1975년 3월6일이라고 밝혔다. 보고서는 최태민이 고(故) 육영수 여사를 거론하며 박근혜에게 접근하여 대한구국선교회을 창설한 과정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정-관-재계 전방위 로비?

    “非理 事實

    崔太敏은 영혼합일법 등으로 전전하던 75.2말경 朴槿惠에게 3차에 걸쳐 꿈에 ‘陸女史가 나타나 槿惠를 도와주라’는 현몽이 있었다는 내용의 서신을 발송하여

    ▼ 75.3.6. 朴槿惠와 접견, 당시 교계의 난맥상을 개탄하면서 救國宣敎를 역설 끝에

    ▼ 75.4.29 朴槿惠의 후원으로 자신의 심복 중심으로

    大韓救國宣敎會 (76.12.10 救國奉仕團, 79.5.1 새마음奉仕團으로 각 개칭)을 설립하고

    總裁(朴槿惠는 名譽總裁)로 취임하여 救國宣敎를 OO(해독불가), 매사 朴槿惠 명의를 매명하여 이권개입 및 불투명한 거액금품징수 등 이권단체화로 치부…”

    보고서에 따르면 최태민은 기업인을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으로 위촉해 이들로부터 1인당 2000만~5000만원의 입단 찬조비나 월 200만원의 운영비를 받는 식으로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이 단체는 행정기관의 지원을 바탕으로 전국에 동 단위까지 조직을 확대해 300만 명의 단원을 확보했다고 한다.

    이어 보고서는 구국봉사단을 활용한 최태민의 부정행위 의혹을 상세히 제기했다. 이에 따르면 횡령이 14건(2억2135만6000원), 사기가 1건(200만원), 변호사법 위반이 11건(9420만원, 토지 14만1330평), 권력형 비리 13건, 이권개입 2건, 융자간여 3건 등 그와 관련된 의혹은 도합 44건이었다. 보고서 내용이 사실이라면 최태민은 정부, 공기업, 정치권, 군, 대기업 등을 상대로 한 전방위 로비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근혜 본인은 부정행위 부분에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 다음은 보고서에 수록된 의혹 중 일부다.(※편집자가 익명처리)

    “76.1.29 봉사단 공금에서 주택구입자금으로 1000만원 지출. 77.3.17~77.6.7 3회에 걸쳐 국민은행 관악지점에 봉사단공금 6000만원으로 부인 명의 3계좌를 정기 예금하여 은닉. 76.11.3~77.8.25 서울농협 불광지소에 봉사단공금 합계 1억5517만6000원을 2~3회에 회전분산한 후 가명 이송자, 박부전, 김기옥 명의 26계좌로 정기예금, 통지예금, 정기 적금하여 은닉. 77.5. 부인 명의로 브리사 승용차 1대 구입, 대금 300만원 지출.

    76.6 S교회 원모 목사에게 서울시장에게 청탁하여 성북구 석관동 사유지 50평을 동 교회 부지로 불하해주고 그 대가로 동 부지 시가 1할 상당액을 받기로 약속했으나 불하 실패.

    75.9.15 2군 이모 대령의 부인 김OO에게 국방부 장관에게 청탁하여 이OO을 준장으로 진급시켜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00만원 수수. 76.6.4 H사 사장 김OO에게 서울시장에게 청탁하여 서울시 비상유류 저장탱크 공사를 맡게 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5000만원 수수. 76.10 초순 한국소방기구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이OO에게 내무부 차관에게 청탁하여 소방기구 신규제조 허가를 억제해주고 동 기구검정권을 동 조합에 주도록 해준다는 조건으로 200만원 수수.

    76.8 전 중앙정보부 강원지부장 김OO의 부인 박OO에게 남편을 중정에 복직시켜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차에 걸쳐 150만원 수수. 76.9 초순 S관광 대표 진OO에게 대덕-연기 지역구 차기 공화당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받게 해준다고 하고 76.9.17~12.10 5회에 걸쳐 500만원 수수.

    77.3.24 H사 K회장에게 구국봉사단 부산지단장에 임명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00만원 수수. 75.9.27 H사 사장 K회장에게 대한화재보험협회에 청탁하여 동 협회 청사 신축공사를 맡게 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7000만원 수수…”

    “최태민, 자숙할 필요 있었다”

    보고서는 여성 추문 의혹과 관련해선 12건의 내용을 기록했다. 김재규의 항소이유서와 이 수사보고서엔 ‘자칭 태자마마’ ‘사이비 목사’ ‘사기’ ‘횡령’ ‘이권개입’ ‘회계’ ‘부정행위’ ‘최태민’ ‘구국봉사단’ ‘추문’ 등 구체적 용어나 표현이 무수히 겹쳐 있다. 김재규의 항소이유서는 이 수사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에서 핵심적 메시지만 간추려 정리한 것이며, 이 수사보고서는 김재규 항소이유서의 근거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10·26 이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는 최태민 비리의혹을 수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친분이 있었다는 한 언론인은 전 사령관이 이끈 합동수사본부가 최태민을 수사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처음엔 최태민이 누군지 몰랐고 그에게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김재규가 수사한 최태민 사건 내용을 전 사령관에게 알려줬다. 여성계 여론을 고려해서라도 최태민 건은 처리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했다. 전 사령관은 이학봉 처장에게 수사를 지시한 것으로 안다. 최태민은 서빙고동에 끌려가 1주일 정도 조사를 받았다. 이어 잠시 풀려난 뒤 다시 소환돼 좀더 조사를 받았다. 이후 신군부는 최태민을 강원도로 쫓아냈다. 최태민의 혐의가 문제 소지가 있는데다 최태민을 차단시켜놓을 필요성이 있어서였다.”

    이와 관련 이학봉 전 의원(1980년 당시 보안사령부 처장)은 최근 ‘신동아’ 인터뷰에서 “1980년 초 최태민씨를 불러 수사한 뒤 강원도로 보냈다”고 밝혔다.

    ▼ 합수부에서 최태민 목사를 조사했나.

    “조사했다. 그를 강원도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 강원도 인제 군부대로 보내 삼청교육을 받게 했나.

    “삼청교육대는 아니다. 조사해보니 최태민씨는 조용하게 자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를 강원도에 그리 오래 두지는 않았다.”

    박근혜 X파일 & 히든카드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자택.

    ▼ 최태민 목사의 구체적 비리혐의 중 기억나는 부분은?

    “27년 전 얘기가 되어서 지금은 별로 기억 나는 것이 없다.”

    ▼ 중정 수사내용에는 최태민 목사가 여러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 박근혜 전 대표도 연루의혹이 있었나

    “박근혜 전 대표는 관계 없었다.”

    “박근혜의 인간적 면모”

    김재규는 10·26 재판 때 “중앙정보부 백광현 국장이 최태민을 수사했다”고 밝혔다. 백광현(75) 전 내무부 장관은 1970년대 말 서울지검 검사로, 중앙정보부에 파견된 상태에서 최태민 수사를 맡았으며 1992년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뒤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백 전 장관은 ‘신동아’와의 전화 통화에서 “김재규씨가 최태민 문제를 억지로 갖다 붙였다”고 밝혔다.

    ▼ 정보부 재직 당시 최태민 사건을 맡았나.

    “김재규씨가 항소이유서에서 최태민씨를 언급했다는데 김씨가 최태민 문제를 억지로 갖다 붙였다. 최태민 문제는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이 없다.”

    ▼ 최태민의 혐의 중 사실로 확인된 것이 어느 정도인가.

    “당시 중정에는 수사국이 3개 있었다. 나는 3국장이었는데 수사 착수는 우리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잘 모른다. 최태민 사건은 당시 서울지검에서도 조사했다.”

    ▼ 기업체에서 돈을 뜯었다는 내용은?

    “실제로 나는 지금 잘 모른다. 그것이 사실인지 말하기 어렵다.”

    ▼ 중정 수사보고서를 보면서 얘기할 의향은?

    “오래전의 일이어서 문서를 보더라도 그 내용이 사실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소용없는 일이다.”

    최태민이 강원도로 쫓겨난지 10년 뒤인 1990년 그는 박근혜가 이사장인 육영재단의 고문으로 재기했다. 육영재단 내분 과정에서 숭모회라는 관련 단체와 박근혜의 동생 박근령은 박근혜의 이사장직 퇴진을 주장하면서 최태민이 전횡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근혜는 동생과 다툼을 벌이게 되는 상황까지 온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사장직을 동생에게 줬다.

    이에 대해 박근혜 측근은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엔 최태민의 비리의혹은 없었다”고 밝혔다. “최태민이 비리혐의자로 낙인 찍혔음에도 박근혜 전 대표는 최태민을 내치지 않았다. 배신을 싫어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박근혜의 인간적 면모때문이다. 일반적 정치인이라면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봐 자신과 최태민 사이를 차단시켰을 것이다.”

    최태민의 가족은 ‘신동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다만, 최태민의 딸은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아버지가 박 대통령에게 조사를 받고 5·17 이후에도 조사를 받았는데 죄가 있었다면 구속이 안 될 리 없지 않겠나”라며 선친 관련 의혹을 부정했다.

    ‘큰 영애 경호원’의 증언

    1970년대 청와대 경호실 소속으로 박근혜 경호를 담당했던 한 인사는 최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작은 영애인 근령씨가 대학 MT 갔다가 금새 사라졌을 때 그 일대에 비상이 걸리는 등 난리가 났다. 그러니 큰 영애인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경호는 얼마나 철저했겠나. 박 전 대표와의 면담은 경호실에 항상 노출돼 있었다. 공개된 자리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천영식 기자가 쓴 ‘박근혜 53년 인생 이야기’는 “일부에서는 (최태민에 대한) 안기부 수사기록 등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여권이 대선 때 더 많은 의혹을 제기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 저서가 대선 때 터질 것으로 예상한 ‘안기부(중정) 수사기록’은 이번에 ‘신동아’에 의해 공개된 셈이다.

    중정 수사보고서는 최태민의 신원을 명확히 했고 그의 혐의 내용을 김재규의 항소이유서보다 좀더 구체화한 성과는 있다. 그러나 ‘본질적 과제’인 최태민 의혹의 사실규명은 진척되지 않았다. 중정 수사보고서는 김재규의 의도 등 정치적 목적이나 실사의 어려움에 따라 최태민의 혐의가 다소 사실과 다르게 기술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구국선교회의 부정의혹은 최태민의 개인 비리의혹일뿐 박근혜와는 무관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태민 사건 수사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학봉 전 의원, 백광현 전 장관 등 최태민 사건을 가장 책임 있게 얘기해줄 수 있는 위치의 2인은 ▲최태민 사건은 현재 실체규명이 불가능하고 ▲최태민의 확인된 부정혐의는 그리 크지 않고 ▲박근혜와는 무관한 사안이라고 증언했다.

    향후 대선 과정에서 ‘현 정부에서 잘 나간다’는 신 모 당시 수사관의 증언이나 또 다른 중정 수사보고서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신동아’가 현재까지 확인한 것 이상의 신뢰성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박근혜는 육영재단, 영남대학교, 정수장학회 등과의 연을 끊었다. 2002년 2월 박근혜의 한나라당 탈당 시 한 신문은 ‘정수장학회 이사장’ 박근혜의 소득세 및 건강보험료 미납 의혹을 제기했다. 박근혜 측은 “장학회의 행정 착오였다. 고의는 아니었다”며 미납분을 모두 납부했다. 박근혜 측은 “이후 열린우리당 측은 정수장학회 감독기관인 서울시교육청 국감 때마다 정수장학회 회계 문제를 이 잡듯 뒤졌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이제 박 전 대표는 정수장학회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라고 말했다.

    ‘성북동 330-46’ 미스터리

    최태민 의혹을 빼면 박근혜에게 남은 검증대상은 재산변동 문제 정도다. 박근혜의 국회의원 재산변동 내역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 외엔 규모 있는 재산이 없다. 박근혜 재산 상태의 변화는 10·26으로 청와대를 나온 이후의 부동산 변동 내역과 일치한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당시 청와대 집무실엔 4칸으로 된 책장이 있었다. 전두환 측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손으로 2칸을 밀자 빈 내부가 나타났다. 박정희와 독대할 때 박정희가 책장에서 돈 봉투를 꺼내 자신에게 준 것을 기억한 한 언론인이 전두환에게 그렇게 해보라고 일러준 것이다. 책장 안 비밀금고엔 9억원의 자금이 있었다. 전두환은 이 돈을 유자녀 생계비로 박근혜에게 줬고 박근혜는 이중 3억원을 김재규 사건 수사 격려금으로 전두환에게 되돌려줬다.

    박근혜 재산의 ‘시드머니’ 6억원은 이렇게 마련됐다. 기록에 따르면 박근혜 소유 부동산은 신당동 박정희 사저-성북동 자택-장충동 자택-삼성동 자택으로 변천한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는 신당동 사저는 박정희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대신 성북동 자택은 ‘박정희를 잊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이 제공한 것’으로만 알려져 왔다.

    ‘신동아’ 최호열 기자는 박근혜의 성북동 330-416번지 자택 취득 경위를 검증했다. ‘폐쇄등기부 등본’을 확인한 결과, 박근혜는 1982년 8월25일 성북동 330-416 번지의 집을 신기수 당시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매입해 이주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폐쇄등기부엔 박근혜의 직전 주소는 ‘성북동 330-46’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신당동 주택에서 성북동 주택으로 왔다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른 내용이다. 취재 결과 330-46번지에 집이 있었다는 자료는 없었다. 박근혜가 왜 330-46번지에 잠시 주소를 뒀는지는 의문이다.

    전두환 “박근혜 집 크게 지어주라”

    성북동 330-416번지 주택은 상류층과 외교관 사저가 밀집된 고급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최 기자는 박근혜에게 이 집을 판 것으로 되어 있는 신기수 당시 경남기업 회장을 인터뷰했다. 이 무렵 그와 영화배우 장미희씨의 결혼설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었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박근혜 집을 지어줬다”고 밝혔다.

    ▼ 요즘 어떻게 지내나.

    “최근 18시간에 걸쳐 후강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아직 말은 잘 못한다.”

    ▼ 회사가 갑자기 넘어갔다. 본인으로선 억울한 점도 있었을 텐데.

    “그 시대는 다 그랬다. 20년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지금 경남기업이 잘나가고 있으니 됐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이제 아무런 감정도, 미움도 없다.”

    ▼ 회사에서 물러난 뒤 어떻게 지냈나.

    “출국 금지당해 12년 정도 전국을 돌며 그렇게 살았다. 1992년 김영삼 대통령 때 출국 금지가 풀렸다.”

    ▼ 박근혜 전 대표의 성북동 집은 어떤 연유에서 짓게 됐나.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표가 살 집을 지어달라고 내게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품이 많으니까 그걸 다 보관할 수 있게 지어달라고 해서 일부러 지하실을 크게 만들었다. 정확하게는 전두환 사령관이 대통령직에 오르기 전에 지시를 받았다.”

    ▼ 금액은 얘기하던가.

    “모르겠다. 지어주라는 말만 들었다.”

    ▼ 박 전 대표 집을 직접 지었나.

    “330번지 일대 주택은 대부분 내가 건축했다. 박 전 대표 집도 내가 했고.”

    ▼ 건축비는 받았나.

    “돈 받고 지었다.”

    ▼ 누가 준 돈이며 금액은?

    “누가 줬는지 모른다. 얼마인지도 모르겠다.”

    ▼ 집이 완성된 뒤 하자가 생기면 수리해줬나.

    “내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갔다. 중요한 집이니까 내가 갔다.”

    ▼ 당시 집주인인 박 전 대표와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들리는 말로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심적인 압박을 좀 받았다고 하는 것 같더라. 뭐든지 전 대통령 마음대로 할 때였으니.”

    ▼ 어떤 압박을 받았다는 건가.

    “그건 모르고. 내 기억으로는 박근혜 전 대표는 순수한 여성이었다. 그건 안 변했을 거다.”

    ▼ 박 전 대표가 1984년 집을 갑자기 판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동생 박근령씨가 이혼을 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추측한다(박근혜는 1980년대에 동생 근령씨에게 30평대 아파트를 사줬다).”

    신당동, 성북동, 장충동, 삼성동으로의 주택 갈아타기 과정에서 이전 주택의 가격과 매입한 주택 가격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살던 집 판 돈으로 새 집을 산 셈이다. 박근혜는 지금 사는 삼성동 자택을 1990년 7월5일 매입했다.

    서울 강남구청의 개별공시지가 확인서에 따르면 삼성동 자택은 박근혜가 주택을 매입한 시점인 1990년 1월1일엔 개별공시지가가 ㎡당 200만원이었으나 2002년 1월1일엔 ㎡당 195만원으로 12년간 소폭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2005년 1월1일엔 ㎡당 367만원이 되어 2002년부터 2005년까지 3년간 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변 부동산중개소에 따르면 145평 대지의 박근혜 자택은 평당 2000만원 이상 받을 수 있다고 한다(실 거래가 30억원선).

    그러나 투기 의혹이나 특혜 소지는 보이지 않는다. 강남구청과 부동산중개소에 따르면 박근혜 자택은 7층 이하 건물만 건립 가능한 2종일반주거지역으로서 향후 용적률이나 용도가 달라질 계획이 없으며 최근 수년간의 시세상승은 강남구 일대의 토지가격 상승에 따른 자연발생적 측면이라고 한다.

    신뢰의 리더십 VS 글로벌화 필요

    2002년 박근혜의 김정일 면담 및 두 사람이 합의한 4가지 약속(금강산댐 공동조사 등)이 실제로 이행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정치권에선 방북 전 박근혜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전조율이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이에 대해 박근혜 측은 “방북 전 정세현 통일부 장관을 만나 설명해드렸고, 방북 후 다시 정 장관을 만나 잘 반영시켜달라고 했다. 그러나 청와대와는 무관하다. 김정일 위원장은 그전에도 박 전 대표를 초청했는데, 2002년 당시엔 박 전 대표가 이사로 참여한 유럽코리아재단 측의 방북이 있어 이 방북단과 함께 방북해 김 위원장을 만난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는 경제 분야에선 ‘작은 정부-규제완화-기업투자촉진’(줄푸세) 정책, 통일 분야에선 핵무기 완전 제거-단일 경제공동체 건설, 외교 분야에선 한미동맹의 강화, 교육 분야에선 대학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의 선별적 도입, 지역개발 분야에선 U자형 프로젝트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박근혜가 제시하는 비전에 대해 부정적 관점에선 “특별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긍정적 관점에선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에 더 믿음이 간다”고 한다.

    “박 전 대표의 정책은 그간 중도보수 진영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러나 보수 진영이 대선에 승리해 이런 정책만 실천해도 한국 사회는 커다란 변화에 휩싸일 것이다. 그의 비전은 깜짝 프로젝트가 아니다. 평범하지만 꼭 해야 할 변화를 차근차근 이뤄낼 것이라는 ‘신뢰’에서 나온다.” (이정현 공보특보)

    권영갑 한러문제연구소 소장은 “박근혜 전 대표는 본인이 명령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닌, 상대가 잘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려는 자세를 갖고 있다. 한국 기업이 세계 일류가 되려면 이런 정치 지도자가 필요하다. 역대 대통령이나 대권주자는 기업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고 명령하는 태도였다”고 말했다.

    양승함 한국정치학회 회장(연세대 정외과 교수)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경험한 국민은 차기 대통령에게 ‘품위 있는 리더십’ ‘안정적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이런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권 소장은 박근혜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는 중요한 자산인 글로벌 마인드를 더 발휘해야 한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주요국 정상급 지도자들을 가장 많이 만나본 대선주자는 아마 박근혜 전 대표일 것이다. 그는 외교적 품위와 협상의 기술을 체득하고 있다.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 대권주자는 한국 사회가 세계와 연결되는 프로젝트, 큰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국제화 구상을 내놓아야 한다.

    예를 들면 에너지와 환경 분야다. 에너지 수급이나 지구온난화 방지는 인류의 문제이면서 국가적 차원의 당면 과제가 되고 있다. 남북한 평화공존과 연계하면 정치적 이슈가 될 수도 있다. 인류에게 절박한 과제일수록 세계적 시장이 창출될 가능성도 높다.

    세계 환경을 얘기하는 미국 엘 고어의 정치 스케일과 경제적 함의를 한국의 지도자들도 유심히 봐야 한다. 경제의 돌파구를 열려면 한국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통합과 연대가 곧 비전”

    전남 무안·신안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낙선했으나 한나라당 최초로 호남에서 10%이상의 득표율을 올린 강성만 후보(민주당 한화갑 전 대표 보좌관 출신)는 “김대중 전 대통령 등 호남 정치권의 일부 진영과 한나라당이 연대하는 극적인 모습이 이번 대선에서 그려진다면 그 대상은 현재로선 박근혜 전 대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지역에선 그런 설이 없지는 않다”고 말했다. 다음은 강 후보의 말이다.

    “목포 시민들은 이 도시를 찾은 박근혜 당시 대표에게 목포와 신안을 잇는 압해대교가 건설되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박 전 대표는 ‘알았다’고 했다. 시민들은 ‘립서비스’려니 했다.

    그런데 박 전 대표는 일주일 만에 예산반영을 지시해 실제로 한나라당 주도로 사업이 이뤄지게 됐다. 이때부터 목포에서 박 전 대표를 달리 보게 됐다. 그를 신뢰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유세 때 김홍업 후보 부부는 박 전 대표가 연설을 마칠 때까지 일부러 기다렸다가 박 전 대표와 악수했다.”

    호남 출신인 김동기 방송위원회 방송위원은 사석에서 사견임을 전제로 “범여권은 현재 뚜렷한 후보가 없다. 구심점이 없다. 호남 정치권과 박근혜 전 대표와의 연대는 명분이 있다. 동서 간, 남북 간 연대는 시대적 과제이며 경제 문제 해법도 된다”고 말했다. 권 소장은 “잔다르크 이미지의 박 전 대표는 2002년 방북 때의 ‘유연함’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통합과 연대’는 그 행위 자체로 어떤 대선공약보다 강력한 비전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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